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58화 (158/250)
  • #158.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3)

    이성적인 사람일수록 작가나 감독이 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다.

    가뜩이나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 몇몇 성공한 작가나 감독만 보고 그쪽으로 진로를 정하기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두운 면이 많았다. 억대의 고료를 받는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최저 시급도 받지 못한 이들도 분명 존재했으니까.

    소싯적 글 좀 썼다는 김명석은 이성적인 편에 속했다. 우스갯소리로 주제 파악을 잘하는 인간이었다.

    학창 시절 글짓기 대회라도 열릴라 치면 내는 족족 상을 받았다. 주변에선 그를 두고 이름난 작가가 될 거라 기대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 또한 당연하게도 문예 창작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선배들 중 소설가나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이들은 손에 꼽았다.

    그나마도 어렵사리 등단했다는 선배를 찾아가 보면 하나같이 거지꼴을 면치 못했으니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지하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줄담배만 피워 대며 글을 끼적이고 있는 모습이 도저히 사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예술가는 원래 가난을 먹고사는 거라고 하지만 눈앞의 현실을 보니 암담했다. 꿈을 이뤘다는 선배의 모습에 김명석은 그의 모습이 자신의 미래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두려움마저 느꼈다. 그런 게 예술가의 길이라면 솔직히 따르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건 동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작가의 현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선배가 한 달 월급도 안 되는 고료를 위해 문예지에 쓸 글을 몇 달 동안 다듬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난 저녁에 했던 드라마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야, 이번에 새로 나온 드라마 봤어? 제목이 뭐더라? <봐도 다시 봐도>? 아무리 드라마라도 그렇지, 어떻게 겹사돈을 할 생각을 해? 너무 한 거 아니냐?”

    “시청률 잘 나오데. 드라마판은 결국 돈 이니냐? 돈만 되면 장땡이지.”

    “야, 그런 거 보지 마. 넌 시나리오 쓸 거라며? 시나리오 작가가 될 놈이 괜히 통속극 보다가 수준 낮아져. 원래 드라마 같은 건 아줌마들이나 보는 거라니까. 이해하려고 할 필요도 없어. 안 보는 게 상책이야.”

    “그래도 재미있지 않아? 법적으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도 어르신들은 겹사돈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잖아. 충분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가지고 갈등을 최고조로 만들었다는 점, 난 괜찮던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재미만 있으면 장땡이야?”

    “재미만 있으면 장땡이 아니라 재미라도 있어야지. 솔직히 네가 지난번에 써서 냈던 단편 소설, 의미도 없지만 재미도 없잖아.”

    “뭐야? 너 말 다 했냐?”

    동기들과의 대화는 거의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그들은 이상만 높아 자신들의 현실을 보지 못했다. 원고지 100장 짜리 단편 소설 하나도 제대로 못 쓰면서 마치 자신들은 대가라도 된 듯 기성 작가들의 작품을 신랄하게 씹어 댔다.

    그런 이들에게 김명석은 항상 그렇게 말했다.

    “말로는 누가 못 해? 그럼 네가 쓰면 되잖아. 네가 드라마계에 진출해서 다 평정해 버리면 되겠네.”

    “못 할 것도 없지. 하지만 난 안 해. 호랑이가 배가 고프다고 풀을 뜯어먹을 수는 없는 거잖아. 호랑이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고기를 먹어야 하는 법이야.”

    할 재주도 없으면서 말만 그럴 듯.

    그들은 마치 영화는 예술이지만 드라마는 통속극이라며 한 수 아래라는 듯 우습게 봤다. 격 떨어지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그런 식으로 정신적 위안을 얻는 거라는 걸 김명석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문예 창작과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들이 노벨상을 탈 대문학가가 될 거란 생각을 한다. 아무도 자신이 등단조차 못 할 거라는 걸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소설가로 등단하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 그나마 국어 선생님이나 학원 강사가 되는 경우는 다행, 아예 문학과는 관계없는 분야로 진로를 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시나리오 작가, 영화 감독, 드라마 작가는 소설가로 등단하는 수보다 더 적었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김명석은 더 살아보지 않아도 자신의 미래가 뻔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잡히지 않은 꿈만 보며 쫓기보다 현실적인 선택을 하기로 한다.

    애초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대신 좋아하는 영화 쪽에서 일해 보겠다는 생각에 영화사에 취직하기로 한 것이다.

    내가 쓴 시나리오가 영화가 되는 건 어렵지만 남이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드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테니.

    때론 현장에서, 때론 사무실에서 제작에 관한 전반적인 일을 하던 그는 본인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가 예상치 못한 순간 대박이 터져 성과급을 두둑히 챙기기도 했고 영화가 망하는 바람에 몇 달치 월급도 받지 못한 채 실업자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별의별 일을 겪으면서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영화란 게 결코 흥행을 예측할 수 없다는 거였다.

    영화사에서는 흥행을 바라며 영화를 제작했다. 망할 것 같은 영화를 제작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름 있는 감독의 작품이었다 하더라도 손익분기점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려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그런 불확실한 일에 자신의 미래를 내던질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삶에 변화가 생긴 건 제작 부문에서 배급 부문으로 자리를 옮기고 난 후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현장에서 일하기 힘에 부쳤던 그는 배급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갈수록 해외 시장에서 한국 영화가 잘 팔리고 있었으니 딱히 힘든 일도 없었다.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영화라 하더라고 해외 시장의 입맛에 맞으면 거기서 제작비를 건질 수도 있었으니까.

    거기다 해외 시장을 돌며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해외 영화를 수입하는 일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운이 좋아 해외에서 들여온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적은 돈을 들여 크게 벌 수 있으니 나름 괜찮은 일이었다.

    일을 핑계로 해외 영화제가 있으면 해외로 나가 관광 겸 많은 영화도 볼 수 있었으니 그로서도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 년에 몇 번 씩 해외에 나가 바쁜 그를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대학 시절 함께 공부했던 동기 하나가 그를 찾아왔다.

    “오래간만이야.”

    “그러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어떻게 지내긴. 계속 영화 쓰고 제작사 돌리고 그렇게 지냈지.”

    “그래? 고생 했겠네. 그래서 계약은 했어?”

    “어. 너네 회사랑 이번에 계약했어.”

    “어? 우리 회사? 우리 회사 이번에 허태인 감독님이랑 영화 제작하기로 했는데…….”

    김명석의 말에도 친구는 웃기만 했다.

    “설마 허태인 감독님이 맡았다는 영화가…….”

    “응. 내가 쓴 거야. 나도 영화사랑 계약한 뒤로 알았어. 네가 여기서 일한다는 거 말이야. 마침 해외 나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웃고 있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김명석의 기분은 묘해졌다.

    눈앞의 친구는 학창 시절 누구보다 뒤떨어지는 친구였다. 과제로 써내는 단편 소설에 한번도 교수님께 좋은 소리를 못 들었던 그였다.

    작가로는 영 아니라 생각했던 그가 작품 선택하기 까다롭기로 유명한 허태인의 눈에 띄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계약금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내가 진작 알았으면 잘 받게 도와줄 걸 그랬네.”

    그래서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괜찮아. 러닝 개런티로 받기로 했거든.”

    “그래? 잘됐네. 허태인 감독님이면 흥행은 보증된 거나 다름없잖아.”

    “그거야 뚜껑 열어 봐야 아는 거지.”

    수줍게 말했지만 결국 그해 최고 흥행작이 되었으니 러닝 개런티를 받기로 한 덕분에 친구는 결국 대박을 터뜨렸다. 이후 시나리오 작가로 승승장구.

    그런 모습을 보니 김명석의 마음 속에도 다른 생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 친구가 할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무턱대고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판에 들이밀기엔 이미 알게 모르게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분명 그의 도전을 비웃을 사람들도 있었다. 해서 그는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드라마 공모전의 문을 두드렸던 것. 혹시나 누가 알까 싶어 필명까지 써가면서.

    하지만 그도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그가 영화 제작사에 취직해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동안 친구는 계속 시나리오를 써 왔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학창 시절 그가 더 우수한 학생이었다 하더라도 시나리오를 계속 써 온 친구와는 이미 실력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걸 그는 생각하지 못했다.

    쓰기만 하면 당연히 당선될 거라 생각했지만 번번이 낙방.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그는 그만두는 쪽이 아닌 드라마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는 쪽을 택했다.

    다행히 영화 시나리오라면 질릴 정도로 봐 온 그였기에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후 그의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이제 드라마 작가로 입봉 할 고지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지난 드라마 공모전에선 최종심까지 올라갔지만 막판에 탈락한 게 그 증거라 생각했다.

    굳이 삼수까지 하면서 창작반에 올라온 것도 공모전이 떨어졌을 경우 인맥으로 입봉을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창작반을 맡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민경우라니 김명석은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반에서 자신이 두각을 나타내면 민경우의 눈에 띄어 곧바로 그의 회사와 계약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판에서도 민경우는 유명했다. 재벌 아들이라 자금력이 막강해 인재가 보이면 닥치는 대로 쓸어 담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김명석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민경우 눈에 들자. 그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작품을 제출하자고.

    출석부를 부르고 교육생들이 경우에게 질문을 하는 것으로 첫날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으니 합평을 할 순서를 정하는 것이었다. 교육생들에게는 이 순서를 정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초반은 실력을 드러내 보이기에 일렀고 후반은 남들 다 하고 난 뒤라 기대감이 떨어진 탓이었다.

    김명석은 딱 중간에 뽑히길 간절히 바랐다.

    “자, 그럼 순번은 어떻게 정할까요? 제 생각엔 고전적인 방법이 좋을 것 같은데.”

    각자 자신의 이름을 적어 통에 넣었다. 경우가 쪽지를 뽑는 순서로 순번이 정해졌다.

    마음을 졸이며 순번을 지켜보는 교육생들의 모습에 경우는 절로 웃음이 났다. 이럴 때 긴장하는 건 애나 어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린 순간 절망하는 이들도 있었고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별 거 아닌 일에 희비가 엇갈리니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김명석을 유심히 보며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느라 애를 써야 했다.

    이전 생의 김명석은 유명한 작가 중 하나였다. 표절 논란으로.

    경우의 기억에 따르면 김명석은 올해 공모전에 당선된다.

    그 뒤 그가 발표한 단막극 몇 편이 예술성을 인정받아 주목할 만한 신인 작가로 떠오른다. 미니시리즈까지 집필을 맡으며 승승장구 이름을 날리지만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누군가 익명으로 그가 표절을 했다고 의혹을 제기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가 표절했다고 주장한 작품들은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유럽의 예술성을 인정받은 영화들이었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작품을 대상으로 이름이나 직업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사정에 맞게 수정을 했을 뿐 기본적인 플롯을 그대로 가져다 쓴 거라 주장했다.

    그와 같은 주장에 김명석은 자신이 쓴 플롯은 어느 영화에나 쓰일 수 있는 흔한 클리셰일 뿐 표절은 말도 안 된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그가 영화 제작사에서 오래 일했고 영화 수입 때문에 해외에 자주 다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표절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표절 시비를 가리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으니 결국 유야무야로 끝나 버린다.

    자신이 한 짓은 생각하지도 않고 남의 작품을 어떻게 표절할 수 있냐며 고명희가 그렇게 욕하던 사람을 공교롭게도 자신이 맡은 창작반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경우는 다시 한번 인생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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