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57화 (157/250)
  • #157.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2)

    드라마 아카데미.

    드라마 작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드라마 작가를 교육하는 교육기관도 많이 늘어났다. 각 방송사에서도 작가들을 교육할 교육기관을 만들어 운영했지만 아직까진 드라마 작가 협회에서 운영하는 드라마 아카데미가 단연 손에 꼽을 만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은 물론, 가장 많은 공모전 당선자를 배출했으니 해마다 밀려드는 지원자를 가리기 위해 면접까지 생겨났을 정도.

    그런 곳에서 자신에게 강의를 부탁했다는 게 경우는 신기했다. 어쨌든 안청모와 인연을 맺어 오늘에까지 이르렀으니 아카데미에 남다른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경우의 마음까지 알지 못한 김종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기숙 작가라고 지금 아카데미 원장으로 있는데, 저와 친분이 좀 있습니다.”

    “알죠, 두 분이 같이 드라마 하셨잖아요.”

    “꽤 오래전 일인데 그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작가잖아요. 과거엔 어떤 드라마가 사랑을 받았는지, 지금은 또 어떤 드라마가 인기 있는지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물론 모든 드라마를 다 볼 순 없지만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시간 날 때마다 드라마 많이 보려고는 하고 있어요.”

    “도대체 작가님은 몸이 몇 개나 되는 겁니까? 안 그래도 바쁜데 참 대단하시네요.”

    “대단하긴요, 신도현 작가는 한 드라마 기본으로 3번씩 보던데요? 그 정도는 봐야 작가 의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전 그렇게까지 못해요. 질보단 양? 어쨌든 좋은 드라마를 쓸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저도 가끔 특강 같은 데 나가곤 하는데 그럴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그거예요. 어떻게 하면 드라마를 잘 쓸 수 있을까, 연출을 잘할 수 있을까? 역시 기본에 충실하는 거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는 거겠죠?”

    “참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문제네요. 근데 정말로 이기숙 원장님이 저한테 강의를 해 달라고 하신 거예요? 혹시 대표님이 잘못 들으신 거 아니구요?”

    “네, 콕 찍어서 민경우 작가가 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지금 신지홍 PD가 창작반 강의를 맡고 있긴 한데 곧 드라마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자리가 빈 모양입니다.”

    “창작반이요? 설마 저보고 맡으라고 한 강의가……?”

    “네, 창작반입니다. 왜요?”

    “기초반이라면 모를까, 창작반은 거의 작가라 해도 무방하잖아요? 그런 사람들 앞에서 제가 강의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생각은 있으신 겁니까? 아무래도 바빠서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긴 했습니다만.”

    “예비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잖아요. 혹시 알아요? 그중에 대박 날 작가가 숨어 있을지.”

    “하여간 작가님 인재 욕심은 알아줘야겠습니다. 그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그럼 강의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요, 학생들 만난다고 생각하면 해 보고 싶긴 한데 제가 누굴 가르칠 입장은 아니잖아요.”

    “왜요? 작가님이 어디가 어때서요?”

    “실력 있는 작가님들 많으신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것 같잖아요.”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자격이라고 하면 이미 차고 넘치잖아요.”

    “에이, 뭘요.”

    “하는 드라마마다 대박 터트렸고, 크리에이터 시스템이라고 새로운 시도도 하고 있고, 작가들이나 현장에서 일하는 PD들 생각해 환경 개선을 하시려고 지금도 노력하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죠. 제가 아는 작가들 중에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작가님은.”

    “갑자기 비행기 태우시니 어질어질한데요.”

    “그거야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겁니다.”

    김종수의 농담에 결국 경우도 웃고 말았다.

    “고민되네요. 아시잖아요. 저도 아카데미 몇 번 안 나가고 그만둔 거요.”

    “확실히 작가님이 특이 케이스긴 하죠.”

    “강의라도 계속 들었다면 대충 어떻게 하는 건지 감은 있을 텐데 그런 걸 해 보지 못했으니 솔직히 어렵네요.”

    “그런 거라면 그리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창작반 강의는 사실 별게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창작반 강읜데요?”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저도 예전에 창작반 강의했던 적이 있거든요.”

    “대표님이요?”

    “네. 지금 신지홍 PD가 창작반 강의 맡은 것처럼 거의 10퍼센트의 비율로 PD들이 강의를 맡습니다. 아무래도 작가랑 연출자는 생각하는 게 다르잖아요.”

    “그럼 강의는 어떻게 하셨어요?”

    “기초반이나 연수반이면 강의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아예 드라마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대본 쓰는 법이라든지, 용어라든지, 시놉시스 쓰는 법까지 다 가르쳐야 하죠.”

    “네에.”

    “근데 전문반 정도 되면 이미 드라마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따로 강의를 준비할 필요까지 없습니다. 그때부턴 실전이거든요.”

    “실전이라…….”

    “네.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단막극을 제출하면 그걸로 합평을 하는 겁니다. 창작반도 다른 건 없어요. 오로지 학생들이 쓴 작품만 보면 되는 거니까. 그런 건 잘하시잖아요.”

    경우가 ‘스튜디오 글로리’에 처음 왔을 때 아이템 회의라고 했던 게 사실은 시놉을 토대로 합평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수업 내용이 그런 거라면 확실히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반에 20명이니까 한 학기 동안 한 사람당 2편 정도 제출하고, 그거 합평하고 나면 아마 학기가 끝날 겁니다. 원래 자기 드라마의 문제점은 잘 찾지 못하잖아요. 서로서로 지적해 주면서 문제점을 수정해 나가는 거죠. 작가님은 그거 듣고 정리만 해 주시면 됩니다. 학생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해 주면 더 좋죠. 근데…….”

    “뭐가 또 있습니까?”

    “가끔 감정이 격해질 수도 있어요. 계속 지적받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상하겠죠. 가뜩이나 작가들 자존심 센 걸로 유명하잖아요. 아, 물론 작가님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보통 작가들이 그렇다는 거죠. 그러니 그 조율을 잘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긴장되네요. 원래 가운데 낀 사람이 제일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말이 강의지, 솔직히 저 때는 싸움 구경 간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작가들 글만 잘 쓰는 줄 알았는데 말발도 좋은 거 그때 처음 알았거든요. 틀린 말 하나 없이 다다다 쏘아 대는데, 그 뭐라고 하죠? 사이퍼? 랩 배틀 저리 가라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궁금해서라도 하고 싶어지잖아요. 확실히 창작반이 낫긴 하겠네요.”

    “그렇다니까요. 한번 해 보는 거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협회 쪽에 빚을 지게 만드는 것도 나중에 어떻게든 돌아올 테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다음 학기만 해 보겠다고 전해 주세요.”

    “전 분명 말렸습니다. 나중에 시간 없다고 저한테 매달리셔도 어쩔 수 없어요. 아시겠어요?”

    “언제는 한번 해 보는 것도 좋다면서요?”

    “그거야…….”

    “농담입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한 일에 책임은 지잖아요.”

    “솔직히 작가님 스케줄 생각하면 말리고 싶네요. 매주 2편씩 작품 분석하는 거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거기다 지금도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래서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거겠죠. 끝이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보면 말입니다.”

    김종수는 어쩌면 이렇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경우라면 분명 이런 기회 놓치지 않으려 할 테니까. 그러니 처음부터 말하지 않으려 했건만 마음이 약해서 탈이었다.

    어쨌든 이기숙은 신지홍 PD 후임으로 경우가 강의를 맡아 주겠다는 말에 시름을 덜 수 있었다. 대신 새로운 강의 준비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가장 중요한 건 교육생 선발이었으니 20명으로 한정된 창작반에 누가 들어가야 할지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의 학기가 마무리되고 다음 교육생 선발을 위해 한 달가량 휴식 기간을 가진 뒤 다음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경우는 아카데미로 향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경우는 이기숙의 부름에 원장실로 향했다.

    “이기숙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민경우라고 합니다.”

    “익히 들어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네요.”

    “감사합니다. 아, 원장님은 제가 예전에 아카데미 다닐 때 몇 번 뵀습니다. 오다가다 저만 본 거지만요.”

    “이렇게 대단한 작가가 될 줄 알았으면 그때 도장을 꽉 찍어 두는 건데.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나 봐요.”

    “아닙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 못 했습니다.”

    “강의에 대해선 들으셨죠?”

    “네. 매주 금요일 저녁 7시부터 3시간 강의라고요.”

    “시간은 괜찮으시겠어요? 교육생이라면 모를까, 강사는 절대 강의를 빼먹으면 안 돼요. 여기까지 겨우겨우 올라온 교육생이 많은데 수업 한 번 빠지면 누군가는 자기 작품을 손볼 기회마저 잃게 되니까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간절한 마음, 누구보다 제가 잘 알거든요.”

    “다행이네요. 아무래도 교육생 중에 직장인이 많다 보니까 스케줄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네요.”

    교육생의 대부분이 20대 후반에서 30대가 많았다. 그러니 대부분 직장인들, 당연히 교육 시간도 그들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가끔 어린 나이에 드라마 작가라는 꿈을 위해 대학도 포기한 채 아카데미를 등록하려 하는 이들이 한 명씩 있었다. 하지만 사실 아카데미에선 그렇게 어린 학생을 뽑아 주지 않았다.

    소설에 비해 통속극이니 쉬울 것 같아 보여도 드라마도 엄연한 인문학의 일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현시대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게 드라마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그러니 어린 학생의 경우 드라마에 파묻혀 있기보다 세상 경험을 더 하고 오라는 의미로 일부러 탈락시켰다.

    40대 작가들이 가장 많이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나이 또한 역시 무시 못 할 부분이었다.

    이기숙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우는 교육생들이 제일 처음 아카데미에 등록할 때 작성하는 기록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중엔 경우보다 나이가 많은 교육생도 있었다.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경우는 그런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교육생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다음 교육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강의실로 향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쏟아지는 환호에 경우는 깜짝 놀랐다.

    기초반, 연수반, 전문반을 거쳐 창작반까지 벌써 4학기째.

    운이 좋아 단번에 창작반으로 온 이들도 있었지만 창작반에 떨어져 전문반에서 재수, 삼수를 하고 온 사람들도 있었기에 이 바닥에 이골이 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경우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었다.

    누가 창작반을 맡을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그들이 가장 보고 싶었던 경우가 등장했으니 당연히 환호할 수밖에.

    생각지도 못한 격한 반응에 경우의 입꼬리가 자연히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민경우라고 합니다. 반응을 보니 저를 모르실 분은 없는 것 같고 그럼 저도 여러분 이름 좀 알아볼까요?”

    못해도 다섯 달 동안 마주해야 할 얼굴들이었다.

    경우는 출석부에 적힌 이름을 부르며 한 명 한 명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다. 다행히 출석부엔 처음 지원할 때 제출한 사진이 있었기에 나중에라도 이름을 꼭 외워야지 싶었다.

    다 큰 어른들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손을 번쩍 들며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송보배 씨?”

    “네.”

    “박선주 씨?”

    “네.”

    출석부를 보던 경우는 순간 멈칫했다.

    “……김명석 씨?”

    “네!”

    대답을 하는 김명석을 잠시 바라본 경우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 분명 그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이곳에서 김명석을 보게 될 줄은 경우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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