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56화 (156/250)

#156.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1)

평소 굳게 닫혀 있던 경우의 방문이 빼꼼히 열려 있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김종수가 가까이 다가갔다. 열린 문틈 사이로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자 그는 반가운 마음에 노크를 하는 것도 잊은 채 문을 벌컥 열었다.

“작가님!”

“대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벌써 출근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게 정말 몇 달 만입니까?”

“그러게요. 생각보다 일정이 좀 오래 걸렸네요.”

“소식은 들었습니다. 1화 대본을 직접 집필하셨다구요?”

“스티븐이 상당히 손을 봐서 제가 쓴 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영상 보내 주신 덕분에 우리도 이미 봤는데요, 뭘. 딱 봐도 작가님 분위기가 나던걸요? 괜히 엄살 부리지 마세요.”

“엄살 아니에요. 그만큼 스티븐 솜씨가 좋다는 거죠.”

“우리가 작가님 하루 이틀 봅니까? 어쨌든 고생 많으셨습니다. 좀 쉬시라 하고 싶은데 그러질 못 하겠네요.”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책상 위에 쌓인 시놉시스로 향했다.

S&Media 측에서 보내온 시놉시스였는데 편성이 고민되는 드라마가 있으면 시놉을 봐 주겠다고 미리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물론 S&Media에 인재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사장인 임장효는 물론 제작기획국 국장 최태영 역시 예능 PD 출신. 거기다 케이블이라 드라마 제작 역사가 짧다는 것도 문제였다. 혹시나 대박이 터질 드라마를 못 알아보고 반려할 수도 있었으니 작가 출신 제작사 대표이자 대주주인 경우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런 복잡한 사정을 알기에 받아들인 건데 이렇게 시놉시스가 많이 쌓여 있을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많네요. 저 가자마자 보내온 모양이에요. 그럴 줄 알았으면 미리 말해 둘걸.”

“아닙니다. 작가님 오신다는 소식 듣고 그제 보내온 겁니다.”

“그제요? 근데 이렇게 많아요?”

“그게 <열세 번째 달>이 시청률 1위로 종영했잖습니까. 아무래도 그 여파인 모양이에요. 요즘 S&Media 측으로 시놉시스가 물밀듯이 밀려온답니다.”

“아하.”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드라마의 대박 시청률을 좌우하는 건 좋은 대본, 대본에 알맞은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 이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뤘을 때 가능했다. 거기다 운도 따라 줘야 했다.

대본도 좋고 연출이나 연기가 다 좋아도 시청률이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은 드라마도 있었다. 대진운이 좋지 않아 소위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박작과 맞붙게 된다든지, 휴가철이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 평균 시청률이 떨어질 때라든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시청률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드라마가 종영하고 난 뒤 뒤늦게 웰메이드 드라마라며 재조명받는 일도 있으니까 역시 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니 드라마로 시청률 대박이 터지면 대박 기운이 그쪽으로 갔다 하여 그 방송사로 시놉시스가 몰리기 마련.

지금까지는 <뫼비우스>, <마르스>를 제작했던 SBC로 몰렸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케이블이라는 악조건을 이겨 내고 시청률 1위를 달성한 QVN으로 시놉시스가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 거기다 드라마 제작에 신경을 쓰겠다는 임장효 사장의 공표도 있었으니까.

“어쨌든 <열세 번째 달> 덕분에 다른 예능 프로까지 시청률이 잘 나오고 있다고 최태영 국장 입이 귀에 걸렸더라구요. 뭐, 작가님만 고생문이 훤히 열린 거죠.”

“제 발등 제가 찍었는데 다른 사람 원망할 거 없죠.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이번 은상 예술 대상에 <열세 번째 달>이 예술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솔직히 후반부 촬영이 까다로웠잖아요.”

과거의 송혜원과는 다른 선택으로 달라진 미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CG등 여러 특수 기법이 동원되었다. 덕분에 영화 같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대신 제작 기간이 길어진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고생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다행이긴 했지만 이런 드라마 두 번 했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겠다며 나중엔 제임스의 잔소리를 실컷 들어야 했다.

“맡겨만 놓고 가서 죄송했는데 정말 다행이네요.”

“상을 받아야 다행이겠죠. 민 작가까지 가고 없으니 제임스가 고생이 많았죠.”

“안 그래도 오기 전에 전화는 했습니다. 일 끝나면 바로 미국 돌아갈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안 갔네요?”

“비행기표는 작가님이 약속했다고 요즘 여기저기 구경 다니느라 요즘 정신없습니다. 계절이 딱 좋잖아요.”

“누구는 바빠 죽겠는데 신선놀음이 따로 없군요.”

어쨌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눈앞에 쌓인 시놉시스부터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 앉으려는데 나가려던 김종수가 머뭇거리는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대표님, 하실 말씀 더 있으세요?”

“그게…….”

조금 전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과 달리 김종수는 망설이고 있었다.

“아닙니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한테……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돌아서는 김종수를 경우가 붙잡았다.

“그렇게 가시면 제가 오히려 궁금해서 일을 못 하죠. 무슨 일인데요? 할지 말지는 제가 판단할 테니까 일단 말씀해 보세요.”

경우의 말에 김종수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맡아 줄 수 없겠냐고 제의가 들어왔어요.”

“아카데미요?”

어리둥절해하는 경우의 모습에 김종수는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오가진 작가를 만나고 돌아온 며칠 후 김종수는 그녀로부터 시놉시스를 첨부한 메일을 받았다.

기발한 아이디어, 예상 못 한 전개에 흥미를 느낀 김종수는 어서 대본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가진의 평소 성격을 봤을 때 그녀가 먼저 나서진 않을 테니 김종수는 내친김에 대본도 받고, 아예 계약 문제까지 해결하잔 생각에 다시 오가진과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도착한 약속 장소엔 오가진 말고도 한 사람 더 있었으니, 아카데미 원장 이기숙이었다.

“이 작가,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러게요. 살다 보니 우리가 다시 마주할 날도 있네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지금이야 집필을 쉰 채 아카데미 원장을 맡아 후배를 길러 내는 데 공을 들이고 있지만 이기숙은 시청률이 잘 나오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당연히 방송국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난리였던 탓에 각 방송사를 돌며 일해 본 PD도 많았다.

하지만 고정적으로 일하는 PD가 없었으니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기숙은 사실 함께 일하는 PD들과 모두 한 번씩 싸워 본 경험이 있을 정도. 스스로도 성격이 모났다고 표현했으나 그보다는 드라마 작가로서 프라이드가 높았다. 그러니 대본을 두고 PD와 언쟁이 있을 수밖에.

“저도 알아요. 제가 좀 지랄맞잖아요.”

“작가가 그 정도의 고집은 있어야죠. 지금이야 지났으니 망정이지, 솔직히 그때 이 작가를 내가 좀 무서워했어요.”

“PD님이요? 말도 안 돼요, 그런 기색이 아니셨는데요?”

“왜? 티를 안 내려고 노력 많이 했죠. 아, MBS 김동권 국장하고도 만나 술 한잔한 적 있는데, 김 국장도 이 작가 무서웠다고 하던걸요.”

“에이, 김 국장은 아니죠. 얼마 전에 저도 그 인간 우연히 만났는데 아직도 팔팔하던데요. 이제 붙으면 제가 깨갱 하겠더라구요. 어쨌든 PD님껜 죄송했어요. 드라마를 위한다는 생각에 그런 거니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사과받자고 한 말 아닌데 괜히 미안해지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왜 무섭다고 했겠어요? 이 작가 말이 구구절절 다 옳으니까 그랬겠죠. 나이나 경력으로 봐도 내가 선밴데 틀린 소리 안 하는 후배가 선배로서는 당연히 무섭죠. 지금은 다 이해합니다.”

“어휴, 지난 이야기 하느라 주인공은 내팽개치고 우리 둘이 너무 신나게 이야기했네요.”

“아니에요. 저도 옛날이야기 듣는 거 재밌는데요.”

“오 작가, 그건 아니지.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가 갑자기 확 늙어 보이잖아.”

“그러게.”

“에이, 그런 뜻 아닌 거 아시면서 괜히들 그러셔.”

“안 넘어오네.”

“오 작가도 많이 컸죠.”

“뭐, 어쨌든 오 작가 시놉 괜찮던데? 이왕이면 우리 제작사에서 드라마 제작 맡았으면 좋겠어. 이건 내 생각이지만 XCN 쪽에서 편성 잡으면 좋을 것 같아. 그쪽 분위기랑 오 작가 드라마 분위기랑 잘 맞거든. 내친김에 전속 계약도 하는 거 어때?”

“그건 좀 더 생각해 볼게요. 대신 드라마 제작은 PD님께 맡기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대본만 잘 써 줘. 그럼 뒷일은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와, 진짜 PD님 입에서 그런 말을 다 들어 보고. 너무 달라지신 거 아니에요? 방송국 편성까지 쥐락펴락하고 계셨던 거였어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능력 있는 동업자를 두고 있으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이번에도 우리 작가가 편성 받아서 방송 시작했거든.”

“아, 구연하 작가요? 저희 아카데미 출신이라 알죠. 창작반 시절에도 눈에 띄는 학생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 작가가 아카데미 맡은 이후로 공모전 당선자 중에 아카데미 출신이 더 늘었다면서요? 드라마만 잘 쓸 줄 알았더니 학생들도 잘 지도하는 모양이에요?”

“제가 학생들 직접 지도하는 것도 아닌데요, 뭘.”

“그래도 지금 몇 년째야? 협회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이 작가한테 원장 자리를 맡기는 거 보면 그만큼 믿음이 가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근데 이 작가는 이제 드라마는 안 쓸 거예요? 원장 일 맡았다고 못 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통 소식이 없어요?”

“이제 그만 써야죠.”

“왜? 드라마 쓰고 싶은 생각 없어요?”

“왜 없겠어요. 잘 만든 드라마 보면 질투심에 아직도 손이 근질근질해요. 당장 컴퓨터 앞에 앉아서 드라마 써야 할 것 같고 그래요. 근데 저 같은 퇴물은 그만두는 게 맞아요. 그래야 새로운 작가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쓰겠죠.”

“후배 생각하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도 원장 몇 년 더 해 먹을 생각이었네.”

“PD님! 그럴 땐 후배 생각하는 좋은 선배라고 해 주셨어야죠.”

“됐어, 오 작가. PD님이 어디 그럴 분이야? 감동적인 거, 오글거리는 거, 못 참는 분이라고.”

“농담이에요, 농담. 내가 이 작가를 모르겠어? 벌어 놓은 돈도 많겠다, 은퇴해서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굳이 아카데미까지 맡아서 고생하는 마음 다 알죠. 아카데미 원장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린가? 이 작가 맡은 후, 전보다 나아진 건 현역에서 일하는 내가 잘 알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근데 역시 학생들 실력 끌어올려 주는 건 학생들 지도하는 강사의 실력이죠. 그래서 고민이 많아요. 새 학기 창작반 강의를 누구한테 맡길지요.”

“지금 강의는 누가 맡고 있는데요?”

“신지홍 PD가 맡았는데, 그것도 이번 학기가 끝이라 후임을 구해야 해요.”

“신지홍 PD? 내일 프로덕션에 가기로 한 그 신 PD?”

“네. KBC 그만둔 덕에 시간이 좀 남아서 도와달라 했었거든요. 근데 새로 드라마 연출을 맡기로 했다고 해서요.”

“아…….”

“왜 그러세요?”

“미안해서 어쩌나. 신 PD가 맡기로 했다는 드라마가 우리 소속 작가가 쓴 드라마거든요.”

“소속 작가요? 내일 프로덕션에서 제작한다고 들었는데?”

“그건 맞아요. 작가는 우리 쪽 소속인데, 제작은 이번에 내일 쪽에서 하기로 했어요. 지금 다른 드라마 제작 중이라 그 드라마까지 제작할 여력이 없었거든. 이럴 때 서로서로 돕는 거죠.”

이야기를 듣던 이기숙이 잘되었다는 듯 눈빛을 반짝이자 어쩐지 김종수는 불안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럼 저한테 좀 미안해하셔야겠네요.”

“본의 아니게…… 미안합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데요?”

“민경우 작가한테 부탁 좀 해 주면 안 될까요? 다음 강의 좀 맡아 달라고요.”

“예? 그건 안 돼요, 민 작가가 얼마나 바쁜데.”

“알죠, 민 작가 바쁜 거. 그러니까 말씀이라도 전해 주세요. 사실 요즘 학생들한테 물어보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민 작가거든요. 솔직히 PD님도 아시잖아요. 이만큼 센세이셔널한 작가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 학생들도 만나고 싶어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도 이건 좀…….”

“그럼 특강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네?”

이기숙답지 않게 조르는 모습에 할 수 없이 결국 경우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긴 했지만 가뜩이나 바쁜 사람에게 짐을 하나 더 얹어 주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역시나 김종수의 말을 들은 경우는 고민이 깊은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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