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뷰티풀 라이프 (5)
햇빛 잘 들어오는 창가에 앉은 경우는 해사한 얼굴로 그렇지 못한 내용의 전화를 하고 있었다.
[예상하셨던 대로 길리엄 군에게 접근하려 하더군요.]
“물론 조쉬는 모르는 거겠죠?”
[네, 눈에 띄지 않게 주의를 줬습니다.]
“한 번만 더 그 녀석이 조쉬한테 접근하면 그럴 생각도 못 하게 확실히 경고하세요. 아니, 몰래 지켜보지 마시고, 언제 어디서건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식으로 어필해 두세요. 그럼 지레 겁을 먹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를 내린 경우가 전화를 끊었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은 정말 돈만 있으면 뭐든 가능한 나라였다. 영화 속에서나 봤던 탐정이 합법화된 나라였으니 경우는 실력이 좋다는 탐정을 고용해 조쉬를 괴롭혔던 알렉스라는 놈의 뒷조사부터 시작했다.
겁도 없고 치기 어린 사춘기 소년이었다. 웬만한 협박 가지고는 안 될 것을 경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은 먼지 털 듯 알렉스를 털어 버리는 거였다.
아무리 천지 분간을 못 하는 천둥벌거숭이라도 자신이 한 나쁜 짓이 까발려지는 걸 괜찮아할 사람은 없었다. 본인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옛 과거까지 들춰지자 알렉스 역시 겁을 먹었다.
잠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발악해 보려 했겠지만 이미 부처님 손바닥 안. 그 정도도 예상 못 할 경우가 아니었다. 어쨌든 알렉스 문제는 그 정도면 될 것 같으니 이제는 드라마 제작에만 신경을 써야 할 때.
Executive Producer를 맡은 스티븐 맥코넬은 제작에 들어갈 크루부터 섭외하기 시작했다. 대본 집필을 할 작가들이 모이자 자연스레 대본 회의가 시작됐다.
오리지널 콘텐츠가 아닌 원작이 있는 드라마를 어떻게 활용할지 오랜 회의가 이어졌다.
달빛 식당의 송 사장과 미스터 박을 중심으로 한 큰 줄기는 그대로 가져다 쓰고, 사람들이 털어놓는 고민 같은 경우는 조금 더 미국 현실을 반영하기로 했다. 그리고 원작에선 미스터 박이 동생의 죽음을 알고 그 역시 죽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다음 시즌으로 이어질 것을 생각해 결말은 바꾸기로 했다.
보통 다른 드라마들이 파일럿 에피소드를 제작해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핀 후 본편 제작에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뷰티풀 라이프>는 원작의 완성도가 높은 덕분에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있었다.
이미 방송국과도 계약을 마친 상황. 덕분에 파일럿 에피소드를 제작할 필요 없이 바로 본편 제작을 시작해야 했다.
원작을 감상한 스티븐 맥코넬과 경우가 중심이 되어 각색의 틀을 잡기 시작하자 회의는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총 12화의 전체 이야기 플롯이 어느 정도 정해지자 스티븐은 함께 회의에 참여한 경우에게 제안했다.
“제 생각엔 우리들 중 이 드라마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민 작가일 것 같은데 1화를 직접 집필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가요?”
“왜요? 문제 될 게 있나요?”
“그렇다기보다 저는 어쨌든 지구 반대편에서 살다 온 사람이잖아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죠.”
“그게 문제가 됩니까? 어차피 한국 드라마이지 않습니까? 정 걱정되면 제가 수정을 돕는 건 어떨까요? 아까 회의에서도 느꼈지만 이 드라마의 세계관을 설명할 1화를 민 작가만큼 잘 쓸 사람이 또 있을까 싶네요.”
이번은 리메이크였지만 언젠간 오리지널 드라마도 제작할 생각이었으니 이번 기회에 제작에 참여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걱정이 많았지만 스티븐이 수정을 돕는다니 다른 생각은 잊고 초안을 잡기 시작했다.
미스터 박, 미국판에서는 치매 노인인 Mr.Buck이 어떻게 달빛 식당을 찾아가 일을 하게 되는지를 그려야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경우는 회의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1화를 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조쉬가 ‘스튜디오 글로리’ 사무실을 찾았다.
경우를 만날 거라 생각했던 조쉬는 낯선 남자가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자 의아해했다.
“네가 조쉬 길리엄이구나? 만나서 반가워, 난 글렌 포스터라고 해.”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조쉬의 입이 쩍 벌리며 그가 내민 손을 황급히 잡았다.
얼굴은 알지 못했지만 수도 없이 들었던 그 이름, 그는 바로 드라마와 영화에 나오는 음악을 주로 담당하는 유명한 음악 감독이었다.
일반인은 잘 알지 못하는 그의 이름을 조쉬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취미로 기타를 연주했다. 그는 아들이 기타를 배우길 원했다. 아들과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게 그의 오랜 꿈이었으니까.
하지만 조쉬는 기타를 배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기타 줄을 잡느라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아픈 탓이었다.
포기하려 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글렌 포스터의 기타 연주 앨범을 들려줬다. 음악 감독이기 이전에 실력 있는 기타리스트인 그의 연주에 틀림없이 조쉬가 매료될 거란 계산이었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조쉬는 기타에 빠져들었다.
그 뒤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조쉬는 한층 더 기타에 몰입했다. 아버지가 남긴 기타를 연주할 때는 아버지와 연결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 글렌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팬이라고 하니 고맙네. 근데 나도 마찬가지야. 네 팬이 됐거든.”
“저요?”
“응, 네가 연주하는 동영상을 봤어. 무척 잘하던데? 기타는 어디서 배운 거야?”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아버지가 굉장한 실력의 기타리스트셨나 보구나.”
“네, 제 기준에선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세요.”
“아버지께서 뿌듯해하시겠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그때 네가 연주했던 곡, 어떤 곡인지 알 수 있을까? 내가 음악은 많이 듣는데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았거든.”
“아, 그게…… 실은 제가 만든 곡이에요.”
“네가?”
“악보를 살 여유가 없어서…… 처음엔 라디오나 TV에 나오는 곡 듣고 적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하나씩 그리게 됐어요…….”
수줍게 말하는 조쉬의 모습에 글렌은 어이가 없었다.
동영상을 볼 때도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더니 이렇게 가까이에 이런 보석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조쉬가 아버지께 배운 솜씨로 그려 봤다는 악보를 보던 글렌은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 이번 드라마 OST에 참여하는 게 어때?”
“드라마 OST요?”
“응, 실은 우리 모두 네 연주를 봤거든. 여기 보스가 네 연주가 특별하다고 드라마 속에 넣고 싶어 했어. 그래서 처음엔 테마곡을 만들어 연주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
“여기에 이미 너에게 딱 맞는 곡이 있는데 굳이 내가 만들 필요가 있을까?”
“…….”
“정식으로 나와 같이 일해 보는 건 어때?”
글렌이 조쉬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조쉬는 그런 그의 손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 * *
“오래 기다렸다면서?”
며칠 동안 호텔 방에서 대본 집필에 매달렸던 경우는 통조림을 끝낸 후 스티븐과 상의해 <뷰티풀 라이프> 1화를 끝낸 참이었다.
그런 그를 조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몰라서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네가 그냥 기다린다고 했다면서?”
“상의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집에 있기 그래서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한 거예요.”
“그래, 무슨 일인데?”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한 조쉬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글렌 포스터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포스터 씨가 너를 좋게 봤구나? 근데 뭐가 걱정이야?”
“솔직히 제가 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요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거든요. 근데 괜한 욕심을 부려서 아래로 떨어지는 건 아닌지 그런 걱정이 들어요.”
“정 부담스러우면 하지 마.”
의외로 단호한 경우의 목소리에 조쉬가 놀랐다. 하지만 목소리와 달리 경우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하고 싶은 거지? 그냥 여러 가지 생각에 걱정도 되고 말이야.”
“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좀 못 하면 어때? 실력이 들통나면 어때? 아직 어리잖아. 얼마든지 시행착오를 거칠 수 있는 나이잖아. 이럴 때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거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러다 저 때문에 다 망쳐 버리면…… 그래서 다신 이런 기회가 없을까 봐. 그게…….”
“조쉬, 난 자선 사업가가 아니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내가 망하는 걸 왜 네가 걱정해? 만에 하나 망한다고 해도 너한테 책임지라고 안 하니까 걱정 마.”
“그래도…….”
“조쉬, 너한테 왜 이런 기회가 왔을 거라 생각해? 이런 기회,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거 아냐. 근데 왜 너한테 왔을까?”
“글쎄요.”
“우리 첫 만남을 생각해 보면…… 어설픈 소매치기가 시작이었지.”
“처음이었다니까요!”
“그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고. 어쨌든 그때 네가 그린 악보를 보지 못했다면 이런 기회가 없었겠지. 아무리 악보를 그렸어도 기타 연주가 형편없었다면 마찬가지로 기회는 없었을 거야.”
“…….”
“날 만난 건 행운이지만 네가 기회를 얻은 건 네 노력의 결과야.”
“......자기 입으로 행운이라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쑥스러우니까 괜히 딴소리하기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히려 이번 일은 경우에게도 행운이었으니 곤란에 처한 소년을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실력 있는 인재를 지나칠 뻔했다.
식당 손님들의 고민을 걱정해 주던 미스터 박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조쉬의 고민이 끝난 듯 보였다.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할래요.”
“알겠어, 그렇게 해. 대신 이거 하나는 기억해 줬으면 해.”
“뭔데요?”
“아주 나중에, 네가 나만큼 어른이 됐을 때 너처럼 당연한 걸 어려워하는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는 거. 지금의 내가 그런 것처럼.”
“그거야 말씀하지 않으셔도 당연한 거죠.”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
경우가 웃는 모습에 조쉬 역시 웃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조쉬가 쓴 악보를 글렌이 편곡해 <뷰티풀 라이프>에 알맞은 테마곡으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마침내 <뷰티풀 라이프> 첫 촬영이 시작됐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안드레 클라크가 Mr.Buck을 맡았으니.
치매 판정을 받은 후 요양원에 들어간 Mr.Buck은 자신의 삶은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봉사 활동을 온 어린 소년의 기타 연주에 과거 잊었던 약속을 떠올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험을 하기로 한다.
마침 그를 문병 온 친구들의 도움으로 병원 탈출을 감행한다.
첫 화 촬영이 끝난 후 조쉬가 등장하는 부분을 편집해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올렸다.
조쉬의 연주를 듣고 흥미를 느낀 사람들은 나중에 등장한 안드레의 모습에 환호했다.
덕분에 별다른 마케팅을 하지 않았는데도 드라마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이 치솟고 있었다.
거기다 어떻게 알았는지 웹플릭스에 올려 둔 한국 드라마 <뷰티풀 라이프>의 조회수가 대폭 상승했다.
덕분에 좋은 분위기 속에서 드라마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경우는 편집본을 확인한 후 홍보 방안까지 회의해 놓고 나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건 방송 뿐이었으니 굳이 미국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미국에 갈 때까지만 해도 2013년이었는데 그사이 해가 바뀌었다. 시기상으론 봄이었으나 공기는 어느새 후끈해져 있었다.
경우는 여독을 풀 새도 없이 오랜만에 사무실로 나갔다.
그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그의 책상 위엔 시놉시스가 한가득 쌓여 있었으니 경우는 산처럼 쌓인 시놉시스를 보며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