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54화 (154/250)
  • #154. 뷰티풀 라이프 (4)

    강남의 유명 한정식집.

    예약하기 어렵다는 이곳에 아는 사람을 동원해 자리 잡은 김종수는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문을 열리고 한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 작가!”

    “PD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어서 앉아. 진짜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이제 건강은 괜찮고?”

    “PD님 덕분에 죽다 살아났네요.”

    “내 덕분은 무슨. 이야기는 전해 듣고 있었어. 아카데미에서 학생들 가르치고 있다고?”

    “이제 그만뒀어요.”

    “아니, 왜?”

    “복귀할 생각이거든요.”

    혹시나 건강이 안 좋아져 그만둔 게 아닐까 걱정했던 김종수는 그녀가 복귀한다는 소식에 화색이 돌았다.

    “잘됐네! 시놉은 다 썼고? 당연히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할 생각이지?”

    머뭇거리는 오가진의 모습에 의아한 김종수가 물었다.

    “왜? 아직 시놉 안 끝났어? 복귀한다고 말하길래 난 시놉도 가지고 온 줄 알았지.”

    “시놉은 다 썼어요.”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근데 안 가져왔어?”

    “그게…… 죄송해서 그러죠.”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여러 가지…… 갑자기 그만둔 것도 그렇고요…….”

    “그게 어디 오 작가 탓이야? 그런 말 마. 오 작가 덕분에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가 이만큼 클 수 있었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PD님이 애쓴 덕분이죠. 아, 이젠 PD님이 아니라 대표님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됐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 작가한텐 PD가 편하지. 그러고 보니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네.”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오가진이 학생들을 지도했던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다. 오가진은 실력 있는 교육생, 김종수는 그런 오가진을 지도한 선생으로.

    대부분 작가들이 교육생을 지도했으나 가끔 현역에 있는 PD들이 강의를 맡기도 했다. 어쨌든 작가와 PD는 뗄 수 없는 관계였으니까. 가끔 가르치는 교육생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 자신이 연출해 입봉하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 아카데미로선 PD 강사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오 작가는 아카데미에서 만났을 때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

    “뭘요, 저도 많이 늙었어요.”

    “그래도. 자기 작품 까는 이야기에도 또랑또랑하게 할 말 다 했잖아.”

    “지금 저 까시는 거죠?”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오 작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니까 시놉, 내 메일로 보내. 부담스러우면 봐 주기라도 할 테니까. 아무리 오 작가라도 내 눈에 안 차면 가차 없는 거 알지?”

    “알죠. 평소엔 안 그러시면서 작품 대할 땐 독설가가 따로 없으시잖아요. 알겠어요. 보낼게요. 참, 그 공동대표라는 그 작가는 어떤 사람이에요? 민경우라고 했죠?”

    “참, 오 작가는 본 적 없지? 오 작가 떠난 뒤에 민 작가가 왔으니까.”

    오가진에게 경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던 김종수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웃고 말았다.

    “왜요?”

    “아니, 오 작가한테 말해 주려 하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처음엔 단순 투자자였거든. 그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솔직히 오 작가도 알다시피 드라마 하나 만들려면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야? 어떻게 편성은 잡아도 방송국에선 제작비를 자꾸 삭감하려 하고.”

    “PPL로 메꾸는 것밖엔 없는데 시청자들은 몰입이 떨어진다고 싫어하죠. 덕분에 PPL 티 안 내려고 그것만 전문적으로 쓰는 보조 작가 고용하기도 하잖아요.”

    “내 말이. 이러려고 회사 차린 건 아니었는데 싶기도 하고, 그러던 차에 민 작가가 집안 사정 때문에 공동대표를 제안하더라고. 자기는 바지 사장 같은 걸 원한다는데, 속으론 웬 떡이냐 싶었지. 솔직히 내가 하기엔 좀 버거웠거든.”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그때 술 엄청 많이 마셨잖아요.”

    “그러니까. 재벌 아들이니 나보다 낫겠지 싶어 반강제로 떠넘기려 했는데 곧 죽어도 단독 대표는 안 한다잖아.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뺄 순 없다고 이름이라도 올려놓으라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 난 진짜 그 말 믿었다고. 근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어떻게 됐는데요?”

    “나를 아주 부려 먹어. 작가로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방송국 사정은 어떻게 그렇게 빠삭한지 내가 도망칠 틈이 없다니까. 대신에 돈 문제 같은 건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확실히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별로 없어. 그렇게 시청률에도 크게 연연해하지 않고.”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까지 제작한 드라마 시청률이 모두 다 좋은데요?”

    “그런가? 하하.”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자리에 없는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였지만 오가진은 어쩐지 경우가 아는 동생인 것마냥 친근하게 느껴졌다.

    구연하 작가의 신작이 XCN 상반기를 시작으로 QVN은 물론 지상파와 종편 드라마까지 소속 작가들의 드라마가 줄을 잇고 있었다. 그 탓에 김종수도 바빴으니 마침 미국에 간 경우를 대신해 그의 일까지 도맡아 하느라 정신없었던 김종수는 모처럼 시름을 벗고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

    어디를 가나 약육강식의 법칙은 존재하는 법.

    약자를 알아보고 짓밟는 강자들은 지구 반대편 이곳에서도 존재했으니,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조쉬에게서 한국의 흔한 왕따에 대해 들으니 경우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니까 그놈이 너를 작정하고 괴롭힌 거네?”

    “네.”

    “좋아, 내가 해결해 줄게.”

    “정말요?”

    “속고만 살았나. 난 한 번 내뱉은 말은 무슨 수를 써서든 지켜. 알았냐?”

    영 미덥지 않았지만 두고 보면 알 일.

    “다시는 그놈이 널 괴롭히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넌 학교 갈 준비나 해.”

    “네? 학교요?”

    “네 부탁을 들어줬으니 내 부탁도 들어줘야지. 그런 게 거래라고 했잖아. 난 네가 학교에 가길 원해. 서류상 절차 같은 건 내가 다 해결해 놓을 테니까 다음 주부터 다시 학교에 나가면 될 거야.”

    “그게 아저씨가 원하는 부탁이라고요? 아무리 봐도 아저씨한테 이득은 아닌 것 같은데요?”

    “왜 아냐? 말했잖아. 우리 드라마에 널 출연시켜 주겠다고. 근데 당연히 받아야 할 교육조차 받지 못한 아이를 데려다 썼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그런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경우보단 자신을 위한 게 아닌가 싶었다. 덕분에 영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 입을 열려던 차 경우가 선수 쳤다.

    “그리고 기타 연습 많이해. 카메라가 여러 대 동시에 돌아도 손 떨지 않게 연습하란 말이야. 알았어?”

    “기타 연습이요?”

    “왜 이래? 처음 듣는 사람처럼. 말했잖아,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부분이 들어갈 거라고. 그러니까 미리 연습해 둬야지. 알겠니?”

    “네.”

    마침내 이야기를 마치고 카페 밖으로 나오자 그때까지 입 꾹 다물고 있던 서필진이 입을 열었다.

    “저 학생이 참 마음에 드셨던 모양입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걸 보면 말이죠.”

    “그렇기도 했지만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생각이요?”

    서필진이 되물었지만 경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알아챈 서필진은 더는 묻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있을 테니까. 알려지지 않은 사연이 있겠거니 했다.

    사실 조쉬의 인생을 구원하겠다는 거창한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조금 돕는다면 그의 인생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 역시 해장국집 사장님 덕분에 꿈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달라진 자신이 조쉬를 도와준 것처럼 조쉬 역시 나중에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때의 자신처럼 꿈을 가진 소년이 되길. 어쨌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물론 조쉬의 기타 연주 소리가 꽤 마음에 든 것도 사실이었다. 듣자마자 아이디어가 솟아났으니까.

    그로부터 일주일 뒤, 모든 게 해결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조쉬는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어떻게 말을 해 놓은 건지 친구들은 조쉬가 먼 여행을 다녀온 걸로 알고 있었다. 얼결에 장단을 맞춰야 해서 어리둥절해하는 그때 마침내 알렉스와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해야 하나 동공이 떨리던 그때 슬쩍 자신을 피하는 알렉스의 모습에 조쉬는 두 눈이 커졌다. 해결해 주겠다던 경우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다른 아이들도 그를 괴롭히려 하지 않았다. 조쉬는 아무 문제 없이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거기다 뉴욕시에서 하는 복지 서비스는 물론, 비영리 단체에서 하는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비영리 단체가 있다는 사실을 조쉬는 처음 알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처음 느낄 수 있었다. 차갑게만 느껴졌던 세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어쨌든 경우가 약속을 지켰으니 이번엔 그의 차례. 조쉬는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도 했고, 매일 밤마다 기타 연습도 빠뜨리지 않았다. 덕분에 엄마가 즐거워하는 모습에 조쉬도 행복해졌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조쉬는 마침내 경우로부터 사무실로 오라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간 ‘스튜디오 글로리 뉴욕 지사’.

    진짜 이런 회사가 있구나 하고 감탄하던 그때, 그를 알아본 경우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이게 다 뭐예요?”

    넓은 회의실에 여러 대의 카메라가 세팅되어 있었으니 가뜩이나 낯선 사람들 속에 잔뜩 주눅이 든 조쉬가 물었다.

    “뭐긴, 카메라 테스트.”

    “카메라 테스트요?”

    “지금 대본 작업을 하는 중이거든. 네 얘길 했더니 다른 작가분들도 네 연주를 듣고 싶어 하더라고. 그래서 네가 연주하는 장면을 찍어 보려고. 카메라 테스트 겸해서, 괜찮지?”

    “……네.”

    “자, 자리는 저쪽에 마련되어 있으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연주하면 돼.”

    “하고 싶은 대로요?”

    “응, 자유롭게.”

    경우가 가리킨 의자로 가 앉은 조쉬는 챙겨 온 기타를 꺼내 조율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집중된 카메라도 사람들의 시선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항상 엄마 앞에서만 연주했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해 보긴 처음. 자꾸만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긴장돼? 실수해도 괜찮으니까 일단 시작해 볼까?”

    “네.”

    손에 찬 땀을 닦은 조쉬는 일단 연주를 시작했다.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 세차게 뛰었지만 기타에 집중하자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일이란 생각에 별 관심 없던 다른 사람들도 조쉬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연주가 클라이막스를 지나 끝이 나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한참 집중해 있었던 조쉬는 갑자기 들리는 박수 소리에 어리둥절했지만 진심 어린 사람들의 표정에 웃을 수 있었다.

    “이번엔 노래도 부르면서 해 볼래? 지난번에 불러 줬던 그 노래 좋던데, 어때? 괜찮겠어?”

    고개를 끄덕인 조쉬가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연주와 함께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쉬의 노래를 들으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경우가 서필진에게 말했다.

    “우리만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솔직히 그렇네요.”

    “자고로 좋은 건 다 같이 봐야죠.”

    그로부터 몇 주일 후,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한 소년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요양 병원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동영상이었다. 처음엔 어린 학생의 평범한 봉사 활동이라 여겼다. 하지만 수준급의 기타 실력과 노래 솜씨는 금세 화제가 되었다. 덕분에 동영상 조회수는 빠르게 늘어났다.

    소년의 연주가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은 혹시 다른 연주 영상이 있어 채널을 찾아봤지만 그 채널엔 한국 드라마 하이라이트가 편집된 영상만 있었으니, 어째서 이런 영상들 사이에 연주 영상이 있는 건지 의아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번째 영상이 올라왔다.

    전 세대의 사랑을 받는 노배우 안드레 클라크와 연주하는 소년이 함께 있는 장면이었다. 소년의 연주에 맞춰 안드레 클라크가 춤을 추는 장면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이것이 드라마 촬영 현장임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드레 클라크가 출연하는 드라마라는 사실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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