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뷰티풀 라이프 (3)
처음 부딪쳐 넘어졌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이 넓어 사람이 부딪칠 정도로 좁은 것도 아닌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소년과 부딪쳤다는 사실이 영 꺼림칙했다.
경우가 처음부터 그저 재벌집 아들이었다면 몰랐겠지만 이전 생의 고아원 시절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였다.
거기다 민경우의 비행 청소년 시절의 기억 또한 가지고 있었으니 이런 어린애 장난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소년의 얼굴이 심하게 겁에 질려 있다는 점이었다. 잡고 있는 손을 통해 소년의 심장 박동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냥 모른 척 돌아서는 게 가장 적당했으나 이대로 소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작가로서의 본능이 꿈틀대고 있었다.
“하여간 이놈의 오지랖!”
의아해하는 서필진을 뒤로 하고 경우는 소년에게 다시 물었다.
“우리, 진지하게 대화를 좀 나눠 볼까?”
“…….”
“그렇게 입 꾹 다물고 있으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나? 이대로 경찰서에 가는 수가 있어.”
하지만 경우가 아무리 말을 해도 소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 근처 햄버거 가게의 문이 열리더니 덩치가 큰 한 남자가 그들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쉬!”
“사, 사장님.”
“지금이 몇 시야!”
“사장님, 그게…….”
사장은 눈앞의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조쉬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벌써 이게 몇 번째야! 사정이 딱해서 봐줬더니 만날 그릇이나 깨 먹고 실수나 하고!”
“사장님, 죄송해요. 제가 금방―.”
“됐어, 너처럼 지각을 밥 먹듯 하는 놈과는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어! 넌 오늘부로 해고야!”
그러더니 가게 안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사장님, 사장님!”
그런데 문이 이내 열리더니 사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장님…….”
다시 기회가 왔다 생각하던 조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가게 안에 남아 있던 조쉬의 물건을 챙겨 온 그가 바닥에 던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건 아니었으니, 앞치마나 노트 몇 권, 수건, 그리고 일당인지 지폐 몇 장이 전부였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경우나 서필진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무척 당황스럽기만 했다.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것도 모자라 그 소매치기가 해고당하는 순간을 목격하다니…….
안 그래도 어린 소년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든 경우는 조쉬를 대신해 바닥에 떨어진 그의 물건을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펼쳐진 노트 속엔 정성스럽게 그린 악보가 눈에 띄었다.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악보를 살펴보던 그때, 놀란 조쉬가 노트를 낚아챘다.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경우를 째려보고 있었다.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야 하는지 모르겠구먼.”
“아까부터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예요?”
“됐어, 너 들으라고 한 소리 아니야. 근데 너, 소매치기 주제에 너무 당당한 거 아니냐?”
“안 훔쳤잖아요!”
“못 훔친 거지. 그런 걸 미수라고 해. 아예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라는 소리야. 모르면 제대로 알게 해 주면 되겠네.”
당장이라도 경찰서로 끌고 가려는 경우의 모습에 결국 조쉬는 빌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까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응, 안 돼!”
울먹이려는 조쉬의 얼굴에 경우의 마음이 살짝 약해지려던 순간, 서필진이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으니.
“여기 이 녀석의 집 주소가 나와 있는데요?”
햄버거 집에서 일을 하면서 신상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며 기록한 카드였는데, 하필이면 그걸 들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조쉬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런 그의 반응에 경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가죠. 자고로 어린 녀석들한테 부모님의 지도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던 경우가 이번엔 조쉬를 향해 말했다.
“다행인 줄 알아. 그래도 경찰서보다는 나을 거 아냐?”
하지만 어쩐지 경찰서라는 소리보다 조쉬의 안색이 더 안 좋아졌다. 그 탓에 가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 * *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한 뉴욕 뒷골목에 들어선 경우는 어쩐지 낯선 환경 덕분에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는 것 같았다. 역시 범죄물에는 이런 뒷골목이 제격이라 생각하던 그는 우울한 얼굴로 마지못해 따라오고 있는 조쉬의 모습에 표정을 갈무리해야 했다.
어린 소년이 학교 갈 시간에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는데, 역시나 형편이 그리 나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세 사람은 카드에 적힌 대로 조쉬의 집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좁고 어둡고 창문도 작아 환기도 잘되지 않아 보이는 건물의 계단을 한참 오른 후 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조쉬가 경우의 손목을 잡았다.
“?”
“저희 엄마, 저 학교 안 다니는 거 모르세요. 그러니까 그런 말씀은 마세요.”
아무리 봐도 그런 짓을 할 만한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에 떠는 걸 보니 나쁜 짓을 할 배짱도 없는 듯 보였다. 경우는 뭔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좋아.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문 좀 열어 줄래?”
경우가 비켜 주자 한숨을 내쉰 조쉬가 문을 열었다. 마침내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한 중년 여인이 더듬거리며 거실 소파에서 일어났다.
“누구? 조쉬니?”
“네, 엄마.”
“이 시간에 집에 웬일이야? 학교에 있어야지?”
“그, 그게…….”
“근데 혼자가 아니구나. 그렇지?”
조쉬를 따라 들어간 집안에서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 경우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조쉬의 어머니는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니 아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를 수밖에.
잔뜩 걱정한 채 서 있는 조쉬의 어머니를 향해 경우가 천천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드라마요?”
“네, 새로 드라마를 시작하는데 배우들을 찾고 있던 중이거든요. 마침 아역 배우 하나가 필요하던 차에 조쉬 군이 적합한 이미지라 제안을 했는데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요.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드라마라니…… 우리 애한테 배우를 시키고 싶다, 이 말씀이신가요?”
“뭐, 그렇게 거창한 수준은 아닙니다. 드라마에 음악 하는 친구가 잠깐 나오는데, 조쉬가 그 이미지에 맞을 것 같아서요.”
갑작스러운 경우의 말에 놀란 건 조쉬였으니.
오히려 어머니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조쉬,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죠. 제 사고만 아니었으면…….”
“엄마!”
“이런, 내가 또 주책없이 굴었나 보구나. 미안하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신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조쉬의 음악적 재능을 확인하고 싶은데 혹시 괜찮을까요?”
다른 것도 아니고 직접 적은 악보를 소중하게 여기는 걸 보면 음악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대충 둘러댄 말이었는데 이렇게 맞아떨어질 줄은 몰랐다.
어쨌든 자식의 잘난 모습을 자랑하고 싶은 부모 마음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조쉬는 어머니의 권유에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 안쪽에 고이 모셔 둔 기타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꽤 낡은 기타였으나 손질을 잘한 덕분인지 새것처럼 반질반질 윤이 나 있었다. 가정 형편을 보아하니 팔아 버렸을 법도 한데,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소중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조쉬는 기타를 조율하더니 이내 목을 가다듬고 기타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맑고 깨끗한 목소리, 거기에 수준급 기타 연주.
아들을 칭찬하려 괜히 한 말이 아니었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하나 없는 경우나 서필진이 듣기에도 꽤 수준급이었다. 연주와 노래를 마치자 경우는 물론 서필진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집까지 찾아온 이 동양 남자 때문에 가슴을 졸이고 있던 조쉬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었으나 나쁘지 않았다.
조쉬의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집을 나온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조쉬 역시 따라나섰다.
“말했던 대로 너만 괜찮다고 하면 보수를 주고 우리 드라마에 출연하도록 도울 순 있어.”
“아저씨, 진짜 드라마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당연하지. 넌 그럼 내가 사기꾼인 줄 알았니? 솔직히 너네 집에 사기 칠 게 뭐 있다고?”
“…….”
“그리고 엄연히 따지고 보면 먼저 접근한 건 너였잖아? 내 지갑 훔치려고.”
“그러다 누가 들어요!”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다만 어쨌든 식당에서 짤린 걸 봤는데 그냥 넘어가는 것도 그래서 너한테 기회를 주려는 거야. 너, 일자리 필요하잖아. 그 식당도 겨우 얻은 거 아냐? 그러니까 내가 하는 제안 괜찮은 것 같은데?”
“진짜 돈 주실 거예요?”
“물론. 일 시키면서 돈 주는 건 당연한 거지. 네가 원하면 근로 계약서 같은 것도 쓸 수 있어. 대신 어디 가서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이보다 더 나빠질 것 같진 않겠단 생각에 조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은 다시 번화가의 한 카페로 자리를 잡았다.
그사이 아무래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서필진이 한국말로 경우에게 은밀히 말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작가님이라 그러신지 거짓말이 수준급이시네요.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뭐, 완전 거짓말은 아니니까요. 이런 거 한 번쯤은 상상해 봤거든요. 길거리 캐스팅!”
“정말 저 꼬맹이를 출연시킬 생각이셨습니까? 전 그냥 핑계 대는 말인 줄 알았는데요.”
“얼굴에 멍이 좀 있어서 그렇지, 보니까 꽤 준수하게 생겼잖아요.”
확실히 잘 다듬어 놓으면 카메라발 좀 받을 얼굴이기는 했다. 그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드라마 작가들은 다르단 생각이 들었다. 늘 캐릭터를 염두에 두고 있는 탓이었는지 확실히 보통 사람들보단 이런 캐치를 더 잘하는 듯도 싶었다.
“아까 들으셨던 것처럼 음악적 재능도 좀 있는 것 같고. 긁지 않은 복권이라고 해 두죠.”
“긁지 않은 복권이요?”
“모르잖아요. 머지않은 미래에 조쉬가 유명한 가수나 배우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렇게 생각해서 놓쳤다가 나중에 배 아파서 땅을 치고 후회하고 싶진 않네요.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일부러도 좋은 일 하는데 그냥 좋은 일 한번 한 셈 치죠. 딱해 보이잖아요.”
“뭐, 그런 생각이시라면 저도 말릴 생각 없습니다.”
“좋아요. 글로벌 오지랖이라 생각하세요.”
경우의 말에 서필진이 피식 웃자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조쉬가 흠칫 놀랐다.
“그렇게 경계할 거 없어. 정 내가 의심스럽다면 어떻게든 내 신원을 보증할게. 아, 혹시 <크리미널 리포트>라는 드라마 아니? 그 드라마 투자잔데.”
“<크리미널 리포트>요?”
모를 수가 없었다. 대박을 친 드라마였으니.
“그래서 진짜 절 드라마에 출연시킬 생각이세요? 어떤 드라만데요?”
“그전에 먼저 네 얘길 듣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넌 남의 지갑에 손을 댈 그런 나쁜 아이는 아닌 것 같거든.”
“아, 동정이 하고 싶으셨던 거였어요? 사정 들어 보고 딱하면 돈이라도 주시게요? 그런 거라면 됐어요. 내 이야기를 팔 만큼 그렇게 바닥은 아니니까!”
“왜 발끈하지? 동정했다고 누가 그래? 그리고 동정을 좀 받으면 어때서? 남의 지갑에 손을 대는 건 괜찮고, 동정받는 건 자존심 상해?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어딨어?”
“…….”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아까 말 안 했나? 드라마 만들기도 하지만 드라마를 쓰기도 한다고. 작가들은 말이야, 원래 호기심이라는 게 끝이 없거든. 이야기가 된다 싶으면 집요하게 파고들어. 특히나 넌 사연이 한가득 있는 것 같고 말이야.”
“아저씨의 장난에 놀아 드릴 생각 없어요.”
“왜 남의 노력을 장난이라 폄하하지? 너나 나나 결국 똑같은 거야. 넌 돈이 필요한 거고, 난 이야기가 필요한 거고. 서로 조건이 맞아서 주고받을 수 있는 건데 동정이니 뭐니가 왜 나와? 이런 건 거래라고 하는 거야, 동정이 아니라.”
“거래요?”
“그래, 거래. 어때? 이제 이야기를 할 마음이 생겨?”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솔직히 눈앞의 남자가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나쁘게 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조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거래합시다.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요?”
“너한테 소매치기를 시킨 놈 있지? 그놈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게 궁금해.”
가정사를 묻는 줄 알았더니 엉뚱한 곳으로 이야기가 튀자 조쉬는 당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