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52화 (152/250)

#152. 뷰티풀 라이프 (2)

“저희 아버지는 평생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조각칼로 직접 제 장난감도 만들어 주셨죠.”

옛 생각을 하는 듯 그리운 표정으로 스티븐 맥코넬은 차분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도 본인이 직접 지을 만큼 자부심이 대단한 목수는 세월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알고 계시겠지만 미국의 의료비는 너무 비싸죠. 저희는 아버지를 병원에 모실 정도의 형편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대신 간병인을 구해 집에서 돌봐드렸죠. 다들 일을 하느라 아버지 간병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거든요.”

“그러셨군요.”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남은 여생 편하게 쉬셨으면 했어요. 그런데 평생 일만 하시던 분이라 그런 생활이 힘드셨던 모양입니다.”

기억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일만은 기억하고 있었던 스티븐의 아버지.

어느날 조각칼로 나무 조각을 파다가 그만 손을 다치고 말았다. 가뜩이나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스티븐은 아버지의 손에 깊게 난 상처에 놀라 속상한 나머지 소리치고 말았다.

‘제발 그만 좀 하시라구요! 가만히 좀 계세요, 좀!’

금방 후회하고 말았다.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 일로 아버지는 결국 가지고 있던 조각칼을 모두 버렸다. 상처가 나을 때까지 손을 붕대로 감고 있어야 하는 불편도 있었지만 자신 때문에 아들이 힘들어한다는 사실이 아버지는 더 괴로웠던 것이다.

다시는 쓸데없는 일 때문에 아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노인의 하루는 젊은 사람들의 하루와 다릅니다. 시간이 빠르죠. 아버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늙으셨고 기력도 많이 쇠약해지셨죠. 그리고 웃음도 사라졌습니다. 치매가 무서운 게 기억을 잃고 성격도 변하면서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거죠.”

“…….”

“근데 어느 날인가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콧노래를 부르고 계시더라구요. 아버지가 그렇게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무슨 일인가 보는데 나무조각을 하고 있더라구요.”

“나무조각이요? 조각칼은 다 버렸다고 하셨잖아요.”

“네. 근데 간병인하고 동네 공원에 산책 갔을 때 주워 온 건지 나무토막이랑 작은 돌멩이를 가지고 있더라구요. 그걸로 나무조각을 하는데 사실 그건 조각이 아니라 그냥 흉내만 낸 거죠.”

끝이 뭉툭한 돌멩이로 나무를 조각한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티븐의 어린 시절 아들의 장난감을 만들어 주던 기억이 떠오른 그의 아버지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신나 있었다고.

“그때 아버지가 건네준 나무조각은 모양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거였어요. 뭘 만들고 싶으신 건지도 모르게 형편없었죠. 그걸 받고 참 복잡미묘하더군요.”

너무 늙어 버린 아버지를 보며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아내가 웹플릭스에 재미있는 드라마가 있다고 추천해 주더군요. 그게 <뷰티풀 라이프>였습니다. 보는 내내 아버지 생각이 났죠. 다른 나라의 낯선 언어로 되어 있는 드라마였지만 진심을 느꼈고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마침 <뷰티풀 라이프>의 미국판 리메이크를 만들기 위해 제작진을 구한다는 소식에 스티븐은 주저 없이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의 커리어를 위해 다른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이 드라마를 선택한 것이다.

아주 가끔 돈 많은 동양인이 세상 물정 모른다고 그 동양인의 돈만 이용하려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혹시 그런 부류가 아닐까 생각했던 경우는 스티븐에게서 진심을 봤다. 이런 사람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경우는 결국 그에게 Executive producer를 맡기기로 했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뷰티풀 라이프> 리메이크 버전의 방향도 서서히 잡기 시작했다.

* * *

“조쉬? 조쉬?”

창밖을 보며 잠시 멍을 때리고 있던 조쉬 길리엄은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네, 엄마.”

“학교 가야지. 준비 다 했어? 늦은 거 아냐?”

“아니에요. 오늘은 무슨 행사가 있다고 조금 늦게 와도 된다고 했어요. 지금 나가면 돼요. 걱정 마세요. 아, 주방에 점심 준비해 뒀으니까 꼭 시간 맞춰 챙겨 드셔야 해요.”

“고마워, 조쉬. 사랑하는 내 아들. 오늘도 잘 다녀오렴.”

“네, 엄마.”

어머니의 볼에 입을 맞춘 조쉬는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사는 곳은 브로드웨이, 센트럴 파크로 유명한 뉴욕이었으나 화려한 번화가와는 달리 어쩐지 음울하고 온갖 사건들이 벌어질 것만 같은 뒷골목의 슬럼가였다. 하지만 이곳도 나름 사람 사는 곳이었고 생각했던 것만큼 나쁜 사람들만 사는 것도 아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조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려 했지만 그를 한눈에 알아본 사람들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쉬, 이제 가니?”

“이제 막 빵 구웠는데 좀 먹지 않을래?”

“그렇게 가다간 넘어진다, 조심해.”

괜히 아는 척 인사하는 그들이 조쉬는 부담스러웠다. 최대한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둘러 그 골목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학교가 아닌 브로드웨이.

거리 곳곳 공연을 하던 사람들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그가 다시 움직여 도착한 곳은 어느 햄버거 가게 앞이었다.

이제 겨우 열다섯이었으나 조쉬는 학교를 나가지 않은지 이미 오래였다. 어차피 다녀 봐야 인생이 더 나아질 것도 아니었기에 학교에 갈 시간에 차라리 돈을 버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은 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돈을 벌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햄버거 가게로 들어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는 순간 누군가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고개를 들어 본 그의 얼굴에 조쉬는 얼어 붙고 말았다.

“쥐새끼처럼 도망치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비쩍 마른 조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몸집은 두 배나 되는 알렉스 포트가 조쉬의 뒷덜미를 잡으며 웃었다. 이내 웃음기를 지운 그가 조쉬를 뒷골목으로 끌고 갔다. 그 사이 벗겨진 후드 속 조쉬의 얼굴엔 이미 멍자국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멍자국을 가리기 위해 후드를 썼건만 애써 감춘 보람이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뒷골목에 온 알렉스는 조쉬를 향해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해 댔으니 조쉬는 그의 주먹을 피할 길이 없었다.

“너, 내가 돈 가지고 오라고 했어, 안 했어!”

“그, 그래서 일하러 왔잖아. 돈을 벌어야 주지.”

“그거야 네 사정이고. 너 때문에 버린 내 옷, 내 시간은 어떻게 보상할 건데? 지금 당장 가져와 당장!”

“아무리 그래도 돈이 없는데 어디서 돈을 가지고 오라는 거야?”

“어쭈, 너 제법 말이 늘었다. 감히 내 앞에서!”

알렉스의 작은 몸짓에도 조쉬는 움찔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알렉스가 비웃었다.

“그건 너 알아서 해야지. 아, 너네 가게 금고통에 돈 있잖아. 그거 가지고 오면 되겠네.”

불 같은 성격의 사장을 떠올린 조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내가 방법까지 알려 줘야 해? 됐으니까 당장 가지고 와. 그러지 않으면 너네 집으로 쳐들어가는 수밖에.”

알렉스의 협박에 조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자신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 걸 엄마가 알게 되기라도 하면 끝이었다. 조쉬는 다른 것보다도 자신 때문에 엄마가 속상해하는 걸 볼 용기가 없었다.

결국 알렉스에게 등 떠밀려 조쉬는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시각, 브로드웨이의 공연장을 어슬렁거리는 동양인 두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경우와 서필진이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시차 적응도 안 되신 걸로 아는데요?”

“어차피 지금 들어가서 자면 밤에 또 못 잡니다. 잠은 밤에 자아죠.”

“그럼 좀 쉬시지 짬이 난다고 공연을 보시겠다니요. 저 같으면 공연이 눈에 안 들어올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한데. 제가 오다가 비행기에서 좋은 꿈을 꿨거든요.”

“꿈요?”

“네.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요.”

“좋은 일이 공연장에서 생긴다는 계시라도 받으셨습니까?”

어리둥절해하는 서필진의 모습에 경우가 웃으며 말했다.

“로이드 최 변호사님께 못 들으셨어요? 전에 뉴욕에 왔을 때 우연히 간 브로드웨이 공연장에서 누굴 만났는지요. 두 분 친구분이시라면서요?”

“아, 그거요. 당연히 들었죠. 우연히 들어간 공연장에서 준 리차드 씨를 만나셨다고요. 그 친구 주인공은 놔두고 엉뚱한 사람한테 꽃을 줬다고 세상 신기해하던데 결국 작가님 선택이 옳았네요. 그나저나 준 리차드 씨는 전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 드라마 카메오 출연도 하게 됐고 제임스의 연출까지 이어졌으니 남는 장사 아닙니까? 그러니 여기로 다시 올 수밖에요.”

“근데 그런 인연이 또 생길까요? 준 리차드는 무명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 대체 불가의 배우잖아요? 그런 사람이 또 있을까요?”

“어쨌든 브로드웨이에 배우들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요. 또 혹시 압니까? 우리 <뷰티풀 라이프>에 꼭 맞는 배우를 찾아낼지요.”

“그렇다고 하기엔 작가님 지금 머리만 기대면 주무실 것 같은 얼굴인데요?”

“이거 들켰네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커피라도 한잔 마시야지. 역시 한국 사람들은 혈관 속에 피 대신 커피가 흐른다고 하잖아요.”

“예? 그런 말이 있어요?”

“미국 생활 너무 오래 하신 모양이네. 물 마시듯 커피 마시는 건 한국 직장인들 국룰 아닙니까?”

웃는 경우의 모습에 서필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침 그 앞에 카페가 있었으니.

“서 실장님도 한잔하시겠어요?”

“아니요. 저는 됐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미국 커피 맛은 어떤지 좀 봐야겠습니다.”

카페로 들어가기 위해 경우가 막 돌아서려던 차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뛰어든 한 소년과 쾅 부딪쳐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작가님! 괜찮으세요?”

놀란 서필진이 서둘러 경우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다친 건 아니죠?”

“네. 괜찮습니다. 그냥 넘어진 것 뿐이에요.”

허리가 살짝 뻐근하긴 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인가 싶어 보는데 어떤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자신 때문에 넘어진 경우를 보며 그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제가 잘 못 본 바람에 그만.”

미안하다는 듯 고개도 들지 못한 소년이 연신 인사를 하는 통에 경우는 오히려 난감해지고 말았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소년의 인사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아, 죄송해요. 여기 먼지가 묻었어요.”

급기야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겠다며 나서자 경우는 미묘해지고 말았으니.

“괜찮아요. 괜찮다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그만하면 됐어요.”

“그럼.”

한참 옷을 털어 주던 소년이 막 돌아서려던 찰나, 경우가 소년의 손목을 낚아챘으니 소년의 손엔 어느새 경우의 지갑이 들려 있었다.

“이래서 그렇게 죄송하다고 했나? 그런데 어쩌지? 죄송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경우의 말에 소년의 얼굴이 더욱 흙빛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마침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알렉스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젠장할!”

혹시나 조쉬가 털어놓지 않을까 싶었던 알렉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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