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51화 (151/250)

#151. 뷰티풀 라이프 (1)

경운 여고 역 3번 출구에 서 있던 임석주는 자꾸만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한 시간이 벌써 20분이 지나가는데 녀석의 머리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집에 가 버릴까 싶었던 그는 화를 가라앉히고 전화를 걸었다.

“야, 너 어디야?”

[다 왔어.]

“오긴 뭘 와?”

“다 왔다니까 그러네.”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임석주가 확 돌아봤다. 그러다 점점 미간에 생기는 주름.

“너, 꼴이 그게 뭐냐?”

“이게 요즘 유행하는 거래. 어떠냐? 이만하면 갓 제대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지?”

자신 있게 말한 심달윤이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발목이 보이도록 밑단을 말아 접은 청바지하며 하얀 남방, 그 위에 걸린 검은색 니트까지는 뭐 그렇다 치고.

“그 모자는 뭐냐?”

“요즘엔 이런 무늬가 유행이라고 하더라고. 그래도 모처럼 바깥 나들인데 그냥 나올 수 있어야지. 어떠냐? 이 형님의 코디, 완벽하지 않냐?”

“어디서 아는 척하지 마라. 나 간다.”

“어어, 야! 가긴 어딜 가?”

“호피 무늬가 유행? 꿈에 나올까 무섭다.”

“넌 패션을 몰라. 하긴, 사시사철 체크 남방만 입는 공대생하고 논할 이야기는 아니지.”

“크흠. 뭐 좋아. 본인의 미적 감각이 그렇다는 데 어쩌겠어. 근데 안 춥냐? 멋 부리다가 얼어 죽을 일 있어? 이 겨울에 그렇게 발목 다 드러내 놓고 다니면 뼈에 바람 들어가. 멋도 때를 봐 가면서 부려야지.”

“원래 멋쟁이들은 추울 때 춥게 입고 더울 때 덥게 입어야 하는 법 아니겠니?”

“됐고. 이리 따라와!”

결국 심달윤을 끌고 간 임석주는 근처 옷가게에서 슬림한 패딩 하나를 골라 입혔다. 물론 비니도 하나 추가했으니 부담스러운 호피무늬 캡모자는 심달윤의 가방 속에 처넣었다.

“이럼 옷발이 안 사는데.”

“옷발 같은 소리 한다. 넌 어떻게 해도 갓 제대한 티 나거든.”

“야, 뻥치지 마.”

“이 겨울에 하와이라도 다녀와서 얼굴이 그을렸다면 모를까, 넌 암만 봐도 갓 제대한 군인이야. 티 안 내려고 하는 게 더 티나, 인마. 특히 그 짧은 머리!”

“에이씨, 머리 빨리 자라는 약 같은 거 없나?”

“시간 지나면 어차피 자라는 머리, 뭘 그렇게 신경 쓰냐?”

“네 머린 길다 이거지? 집에서 출퇴근해서 그런가? 넌 왜 제대한 티도 안 나냐?”

“너 지금 나 공익이라고 무시하냐?”

“누가 그렇대? 부럽다는 거지. 어쨌든 옷 고맙다. 확실히 부자 친구라 이런 비싼 옷도 막 사 주는구먼.”

“뭐래. 나중에 갚아.”

“아, 형님! 우리 사이에.”

“얼굴이나 저리 치워!”

“넵!”

고등학교 졸업 후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느라 그때만큼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구들 중 가장 친한 사이였던 터라 심달윤의 제대를 기념해 두 사람은 오랜만에 뭉쳤다.

“근데 우리 오늘 뭐 먹어? 무슨 근사한 음식을 사 주려고 여기까지 나를 부른 건데?”

“부르기는. 밥 사 달라고 노래를 부른 놈이 누군데?”

“엎어치나 매치나. 어쨌든 목적지만 도착하면 장땡아냐?”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말 빼면 내가 또 시체 아니냐.”

“됐고. 입에 지퍼나 채우고 따라와.”

잔뜩 기대감에 부풀었던 심달윤은 임석주를 따라 어느 학교 앞 작은 식당 앞에 도착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야, 이왕이면 맛있는 거 사 주지 겨우 라면이냐?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때 빼고 광내고. 이씨!”

“웃긴 놈이네, 이거. 내가 언제 시켰어? 지가 때 빼고 광내고 왔으면서 무슨.”

“돈도 많은 놈이 쪼잔하게 라면이 뭐야, 라면이.”

“싫으면 넌 그냥 가던가. 난 들어갈란다.”

임석주가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투덜대던 심달윤 역시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들어간 식당 안에는 요리를 하는 사람은 물론 서빙을 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남자.

가뜩이나 사내만 득시글거리는 군대에서 제대한 지 얼마나 됐다고 기껏 데리고 온 곳이 이 모양이었으니 심달윤은 친구가 자신을 놀리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왔네. 이쪽은 친구?”

“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그렇지. 근데 너네 보스 만나러 온 건 아니지? 듣자 하니 미국 갔다는 거 같던데?”

잘 아는 사이인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심달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라면 가게 사장님이 저렇게 잘생겼어? 완전 연예인 뺨치게 생겼네.’

“알고 있어요. 오늘은 이 녀석 제대 기념으로 왔거든요.”

“그래 보이네. 그럼 특선으로 해 줄게. 잠깐만 기다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으로 끓여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사장이 사라지고 나자 심달윤이 물었다.

“야, 너 여기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야?”

“우리 보스 친구. 아, 너네 두목님하고도 고등학교 친구라던데? 모델도 하고 있는데 너 몰랐냐?”

“아, 그래? 어쩐지 잘생겼다 했지. 근데 생각보다 가게가 잘 안 되나 봐?”

“그건 또 뭔 소리냐?”

“두목님 친구라며? 매상 올려 주려고 온 거 아냐? 아무래도 여기 위치가 좀 별로긴 해. 이런 음식 장사는 자고로 번화가에 있어야지. 유동 인구도 많고 그런 곳.”

“뭐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지랖은. 넌 어째 갈수록 너네 두목님 닮아가냐?”

“우리 두목님이 어디가 어때서?”

“그러니까! 왜 발끈하냐?”

“어?”

심달윤이 어리둥절해하는 완성돼 나오는 라면은 대게를 한 마리 통째로 넣은 라면이었으니. 라면이라고 하나, 요리에 가까웠다. 덕분에 심달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우와!!”

“맛있게 먹어.”

“잘먹겠습니다.”

먹음직스러운 자태에 국물 한 모금 떠먹으니 바다 향이 물씬 느껴졌다. 여기가 서울인지 울진인지 모를 만큼 감탄을 하던 그때, 어렴풋이 들리는 학교의 종소리.

두 사람이 잠시 라면 맛에 빠져 있는 사이, 학교 교문이 열리고 여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오더니 곧장 라면 가게로 직행했다.

라면 가게는 순식간에 여학생들로 가득 찼으니 심달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온통 여학생들뿐.

남중, 남고, 거기다 대학도 경영학과를 다닌 탓에 이렇게 많은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본 건 처음이었던 심달윤은 어색한 것도 잠시 곧 이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었다.

반면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에 심취한 임석주는 오로지 라면에 집중하고 있었으니 어쨌든 각자 다른 이유로 라면 맛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근데 너네 부모님은 아들이 엄청 부자인 거 알고 계시냐?”

라면을 먹던 임석주는 친구의 말에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다시 먹기 시작했다.

“곧 말씀드려야지.”

“졸업하고 정말로 회사 차릴 생각이야?”

“응. 이젠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알 것 같거든.”

“근데 너네 보스는 암 말 안 해?”

“보스는 전부터 항상 그런 얘기를 했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어쩌면 스타트업을 시작할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보스 덕이지.”

“처음 나타날 때만 해도 뭐 저런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 하여간 대단한 양반이야. 근데 미국은 뭐 하러 가셨는데?”

“드라마 제작사 대표가 뭐 하러 미국 갔겠냐? 드라마 만들러 갔겠지.”

“다들 잘나가네. 어쩐지 좀 부럽다.”

“부럽기는.”

“에휴, 제대하고 나니까 생각이 많아져. 아버지가 가라 해서 경영학과 가긴 했는데 선배들 보면 졸업해서 대기업 취직하는 게 인생의 목표 같달까? 근데 난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암만 봐도 대기업 취직은 못 할 것 같고 그럼 뭘 먹고 살아야 하나? 진작 기술이라도 배워 둘 걸 그랬나? 괜히 그런 생각만 든다, 요즘.”

어쩐지 씁쓸해하는 친구의 모습을 슬쩍 본 임석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정 취직할 데 없으면 우리 회사로 오든가.”

“무슨 있지도 않은 회사 타령이야, 벌써부터. 너 잘났다고 자랑하냐?”

“그러게, 누가 지금 당장 오래? 복학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했는데 갈 데 없으면 오라는 거지. 하여간 걱정을 해 줘도 지랄이야, 지랄이.”

“네가 차릴 회사는 어차피 IT쪽일 텐데 난 프로그래밍 같은 거 전혀 모르니까 그렇지.”

“회사에 프로그래머만 있으면 어떻게 돌아가냐? 그 외의 일을 할 사람도 필요한 거지. 그러니까 졸업하기 전에 자격증 딸 거 있으면 따고, 이제부터 공부 좀 열심히 해. 알았냐?”

“진심이었어? 석쭈, 완전 감동. 아들 키운 보람있네.”

“뭐래, 키우긴 뭘 키웠다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친구의 밝아진 얼굴에 임석주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게 경우 덕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치기 어린 마음에 세상을 우습게 알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경우를 만나고 그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 덕에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고 결국 원하는 일을 찾을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와 어떻게 이런 인연을 맺게 된 것인지 그는 신기하기만 했다.

임석주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말에 누구보다 기뻐해 준 경우를 떠올렸다. 지금쯤 미국에 도착은 했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각, 13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뉴욕의 어느 호텔 방에 들어간 경우는 깊은 밤이 되었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사실에 설렌 것도 한몫했다.

<열세 번째 달>의 방송이 끝난 건 아니었지만 경우는 과감하게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이미 드라마 촬영은 모두 끝난 상태. 거기다 지상파 시청률 1위를 달성한 이후 시청률은 더욱 상승하고 있었으니 종영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이변이 벌어지지 않는 한 지금 이 상태가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열세 번째 달>의 흥행으로 QVN의 다른 프로그램들까지 시청률이 동반 상승하고 있었으니 어쨌든 목표는 이룬 셈. 뒷일은 남은 이들에게 맡겨 두고 경우는 새로운 일을 위해 이곳까지 왔다.

경우는 처음 미국에 와 제임스를 만났던 그때 묵었던 그 호텔을 다시 찾았다. 새해를 맞아 가뜩이나 호텔방 잡기 힘들어 겨우 구한 허름한 숙소였지만 그때를 생각하며 일부러 이곳을 예약했다.

새해를 맞아 터지는 폭죽을 보며 생각했던 일들이 모두 현실이 되었다. 덕분에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경우는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처럼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일정을 생각하면 어서 자야 했지만 쉽게 잠들 수 없었던 경우는 하는 수 없이 호텔방에 진열되어 있던 위스키를 꺼내 마시고는 겨우 잠을 청했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민경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스티븐 맥코넬이라고 합니다.”

‘스튜디오 글로리’ 뉴욕 지사.

경우는 그곳에서 눈빛이 강렬한 남자와 인사를 나눴다. 그가 다름 아닌 <뷰티풀 라이프>의 미국 리메이크 판을 각색을 맡은 스티븐 맥코넬이었으니 경우는 다시 한번 서필진의 능력에 감탄했다.

각색할 작가들이 필요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티븐 맥코넬을 데려올 줄이야.

그는 훗날 에미상의 드라마 각본상을 받을 정도로 실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이 드라마의 각색을 맡는다는 사실에 경우는 흥분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 여러 드라마의 인턴 작가를 시작으로 스토리 에디터를 거친 그에겐 이번이 Executive producer로서의 첫 번째 드라마였다. 경우로서는 마냥 좋아하며 넘어갈 수만은 없었다. 해서 평소와는 다르게 제법 날카로운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우리 드라마가 한국 드라마의 리메이크라는 건 잘 알고 계신 거죠?”

“물론입니다.”

“듣자하니 Executive producer로는 처음이신데 다른 드라마도 아니고 한국 드라마의 리메이크 버전을 하겠다고 나선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경우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스티븐 맥코넬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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