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날개 단 호랑이 (4)
11월의 늦은 어느 수요일 밤.
10시 45분이 넘어가는 시간임에도 퇴근하지 못한 최지연은 주조정실에 못 박은 듯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강렬한 눈빛에 그 누구도 그녀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으니.
결국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를 보던 말단 하나가 앉으라 의자를 가지고 왔지만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꼿꼿하게 서서 <블랙리스트> 첫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라마국에서 사활을 걸고 있는 드라마였던 탓에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지난 주말 QVN에서 <열세 번째 달>이 첫 방송된 직후였다.
열풍이 불다시피 했던 제임스 로이건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첫 방 최고 시청률은 7퍼센트.
SBC 드라마국 식구들은 기대치에 못 미치는 수치에 안심했다. 안 그래도 사람들이 은근히 대결 구도를 만들어 가는 통에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는데 생각보다 높지 않았으니 다소 안도할 수밖에.
하지만 최지연은 다르게 생각했다.
케이블 드라마가 흥행한 건 지금까지 송지현 작가의 <뷰티풀 라이프>가 전부. 그나마 그 드라마도 시청률 3퍼센트에 시작했으니 그의 두 배는 되는 <열세 번째 달>은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뷰티풀 라이프>이후 케이블에서도 다양한 드라마를 제작하긴 했지만 그 기록을 깨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드라마의 시청률은 대기록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상대가 지상파였다면 체감상 20퍼센트에 육박할 것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설경태 사장에게 안심하지 말란 말까지 들은 상황이니 더욱 긴장될 수밖에.
해서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차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실시간으로 들어오고 있는 시청률 팩스를 보고 있던 <블랙리스트>의 CP가 흥분하면서 입을 열었다.
“최고 찍었습니다. 2, 24퍼센트입니다!”
정점을 찍은 그래프가 조금 내려가긴 했지만 어느 선에서 유지하고 있었으니 좋은 신호였다. 아직 드라마가 끝난 게 아니라 환호성까지는 아니었어도 그곳에서 가슴 조리며 지켜보고 있던 관계자들은 서로서로 악수를 나누며 수고했다고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물론 최지연만은 팔짱을 낀 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좋은 소식에도 표정 변화 없는 그녀를 보던 다른 사람들도 결국 눈치가 보여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드라마가 끝났다.
평균 시청률 통계가 나와야 더 정확히 알 테지만 최저 시청률도 무려 19퍼센트, 대박이었다. 한시름 놓은 최지연은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남기고 주조정실을 빠져나왔다.
최지연이 나가고 나자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얼음마녀라고 하더니 진짜 그 별명이 딱이네요.”
“왜 아니래? 아우, 기계 돌아가는 것 때문에 히터 안 틀어도 따뜻한데 얼어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저 정도는 돼야 드라마국 국장을 하는 거겠죠? 여자가 드라마국 국장이 된 건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 말이. 거기다 최연소라잖아?”
“진짜요? 그건 몰랐네요. 솔직히 포스에 지리잖아요.”
“어휴, 난 하라고 해도 안 할란다. 첫 방 시청률 24퍼센트면 진짜 잘 나온 건데 눈 하나 깜짝도 안 하더라니까. 난 무슨 동상 가져다 놓은 줄 알았어.”
“에이,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죠.”
“뭐야?”
그렇게 농담 반 진담 반 떠들어 대는 사이 최지연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딸깍 문을 잠그고 창문 블라인드가 다 내려간 걸 확인한 그녀가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앗싸! 그래, 이거지!”
환호성을 지르지는 못했지만 대신 속으로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체면이 있어서 좋아도 좋다는 표현조차 못해서 얼마나 답답하던지.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던 그녀는 소파에 앉아 시름을 덜어 냈다.
사실 그동안 얼마나 걱정이 많았던가.
그놈의 제임스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다 못해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그의 연출력이 기존 한국 드라마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건 아니라 다소 안심이 되었다.
드라마는 누가 뭐래도 결국 작가 놀음. 드라마를 쓰는 작가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법.
아무리 민경우나 송지현이 달려 든다고 해도 정작 드라마를 집필하는 건 애송이 작가 둘이었다.
반면 이쪽은 첩보물의 대가 김준원이었으니 상대가 안 되는 건 당연했다.
“미국 감독도 별거 아니네.”
물론 이걸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 오른 시청률이야 내일 떨어질 수도 있는 일. 그러니 그런 상황에 대한 대비는 해 둬야 했다.
특히 이번 드라마엔 이수철도, 에스더도 나오지 않는다.
시청자들이 원했던 대로 두 사람이 나와 약간의 로맨스가 가미된 첩보물이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두 사람 다 출연 불가를 외쳤으니 결국 구상한 기존 캐릭터를 새 캐릭터로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최지연은 그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시작이 좋아도 갈수록 무너졌던 드라마가 얼마나 많았던가. 최지연은 적어도 그런 전례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첫방 시청률이 잘 나왔다고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해서 그녀는 일단 <블랙리스트> 홈페이지에 들어가 실시간으로 남겨지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일일이 확인했다.
다행히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만족할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 * *
“작가님, 드디어 삼촌 되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얼마 전 첫방을 시작한 드라마보다 신문에 대서특필된 민정현의 딸이 화제의 중심이었으니 경우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받아야 했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보다 제 조카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네요. 차라리 드라마 이야기 좀 해 주지.”
김종수의 등장에 경우가 투덜대며 말했다.
“다 같이 모여서 시사회 했잖아요. 그거 보고 다들 걱정하지 않은 거겠죠. 거기다 케이블 첫방에 7퍼센트면 꽤 잘 나온 거예요. 지난번 <뷰티풀 라이프>도 3퍼센트로 시작한 거 잊으셨어요? 7퍼센트면 기록이에요, 기록!”
“기록까지는 아니죠. 지난번 오연옥 작가님 <핏빛 와인잔>의 8퍼센트가 아직 그대로 남았어요. 아, 8퍼센트 넘었어야 했는데…….”
“가만 보면 작가님 참 욕심도 많으세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전혀 그런 티 안 내시면서 뒤로는 엄청 신경 쓰잖아요.”
“그거야 이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그리고 이번엔 제임스 이름값이 있으니까 전 기록 세울 줄 알았거든요. 한 9퍼센트?”
“처음부터 욕심이 과하면 체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우리 드라마는 이제 시작이잖아요.”
김종수의 말에 경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세 번째 달>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못했으니까.
부잣집 딸인 송혜원과 가난한 미술학도 박경준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두 사람은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는데.
작은 교회에서 친구들의 도움으로 소박한 결혼식을 준비하던 박경준은 송혜원 모르게 친구에게 부탁한 부케를 받으러 가던 길에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으로 급히 이송된다.
뒤늦게 도착한 송혜원은 추운 겨울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덜덜 떨면서 박경준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최재욱을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송혜원.
불같은 사랑은 아니지만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남편을 사랑하고 두 사람을 닮은 아들 시윤을 키우며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의 상처는 꽤 오래 남아 그녀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으니.
어느날 소행성이 지구 가까이에 다가온다는 뉴스를 무심히 보던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벌써 8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잊지 못한 016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에 손을 덜덜 떨던 송혜원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그때 들리는 건 기억 속 그리워했던 박경준의 목소리.
[혜원아. 오고 있어?]
“경준 씨?”
[웨딩드레스 입은 혜원이 빨리 보고 싶다. 얼른 와.]
“경준 씨…….”
[혜원아, 실은 너 오면 말해 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입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어. 말해야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 싶은 그녀는 누군가 악의적인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분명 꿈에서라도 듣고 싶었던 박경준의 목소리가 확실했으니.
그때 TV화면을 통해 보이는 지구를 향해 달려오는 소행성.
[천웅이 알지? 플로리스트한다는 내 친구. 걔한테 너 부케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 사진으로 봤는데 너무 예쁘더라. 네가 그거 들면 정말 예쁠 것 같아. 거의 다 도착했다고 하거든? 마중 나가려고.]
“경준 씨, 안 돼!”
[어?]
“가면 안 돼! 가면 안 된다고!”
앞뒤 생각할 것 없이 그녀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마침 그녀의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
그런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흔드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아들 시윤.
“엄마, 울어요?”
송혜원은 잠시 흔들린다.
어쩌면 이건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경준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더 이상은 가슴 아플 일도 때때로 멍한 듯 정신을 놓는 일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아들 시윤이는?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두 가지 모두를 선택한다. 경준을 살리는 대신 그와 이별을 하기로.
<열세 번째 달>은 윤달이 낀 음력의 마지막 달을 뜻하기도 했으나 두 사람에게는 영원히 오지 않을 시간을 의미했다. 결국 이별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이 미래의 송혜원이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털어놓는 이야기에 박경준은 충격을 받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송혜원이 말한 그대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 결국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그.
넋이 나간 그의 모습에 친구들은 무슨 일 있냐며 걱정한다.
마침 준비를 끝내고 나타난 웨딩드레스 차림의 송혜원.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곧이어 등장하는 천웅과 그의 손에 들린 부케. 부케를 받아 들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송혜원을 보며 박경준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래, 저 모습이 보고 싶어 부케를 빨리 가지러 가려 했는데…….’
행복해하는 송혜원을 보던 박경준이 물었다.
“전화는?”
“아, 배터리가 다 됐나? 꺼졌는데, 왜?”
“아니.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응. 참, 경준 씨!”
드레스 자락을 잡은 송혜원이 총총총 다가와 경준의 볼에 입을 맞췄다.
“부케 고마워, 사랑해!”
그제야 웃을 수 있었던 박경준은 한쪽으로 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정확히는 미래의 송혜원에게.
전화가 꺼졌다고 하더니 신호음이 울리고 얼마 뒤 전화를 받는 미래의 송혜원.
박경준은 그녀에게 묻는다.
“행복하니?”
[……응.]
“그럼 됐어. 앞으로도 행복해야 해.”
[경준 씨…… 미안해.]
“…….”
[정말 미안해.]
전화를 끊은 박경준은 송혜원이 기다리던 예배당 안으로 들어간다.
비록 친한 친구 몇 명만 초대한 소박한 결혼식이었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한 기억을 송혜원에게 남겨 주고 싶었던 그는 그렇게 결혼식을 감행한다.
축복의 인사를 받으며 친구에게 빌린 웨딩카에 올라 탄 두 사람.
“경준 씨, 우리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는 거야?”
“가 보면 알아.”
미소 짓던 그는 이내 차를 출발시킨다. 그리고 도착한 곳.
“여긴 우리 집이잖아.”
“혜원아.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
“…….”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안 맞는 거 같아.”
“경준 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린 여기까지야. 우린 너무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어. 지금은 사랑으로 모든 걸 다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를 원망하게 될 거야.”
“아냐, 그렇지 않아!”
“지금이야 뭐든 다 괜찮겠지. 하지만 아냐! 넌 못 해! 그러니까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딘데?”
“내가 없는 곳!”
“경준 씨!”
그때 딸칵 차 문이 열렸다. 박경준이 미리 연락을 한 건지 송혜원의 어머니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박경준을 원망스럽게 보던 송혜원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차에서 내렸다.
떠나는 차를 보며 현실을 믿지 못하는 송혜원.
웨딩카에 매달린 깡통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같은 시각, 달라진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온 2012년의 송혜원은 결국 허물어지고 말았다.
“엄마, 왜 울어요? 울지 마요.”
눈물로 얼룩진 송헤원의 얼굴을 아들인 시윤이 닦아 주고 있었다. 송혜원은 아들을 꼭 안았다.
3~4부 시청률은 전주보다 5퍼센트 오른 12퍼센트로 마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