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날개 단 호랑이 (3)
경우는 솔직히 이게 잘하는 짓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누나 모르게 자신만 부른 아버지의 뜻을 모를 리 없기에 그는 결국 안청모를 부르고 말았다.
물 잔을 드는 안청모의 손이 달달달 떨리는 게 보였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래도 첫 만남에 따귀부터 맞은 자신보다는 나을 테니까.
“경우는 그만 가 봐.”
그래도 지은 죄가 있어 옆에서 쉴드라도 쳐 줄 생각이었건만 그런 마음마저 민 회장은 읽어 버린 모양이었다. 자신을 향해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는 안청모를 애써 외면한 채 경우는 결국 두 사람만 남겨 두고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우가 나가고 나자 민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낮이긴 하지만 반주 한잔, 괜찮지?”
“네, 네. 좋습니다.”
보면 볼수록 제 딸에게는 부족한 사내였다. 사내가 사내다운 맛이 있어야지. 강단도 패기도 다른 장점도 찾을 수 없었으니 하필이면 하나뿐인 딸이 이런 놈과 만나는 건지 민 회장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내와 비교하면 딸인 지선이 훨씬 듬직했다. 자신 앞에서 주눅 든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안 될 것 같은 일에도 매달려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아이였다. 그래서 최근엔 지선이 딸이라는 사실이 부쩍 아쉬웠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딸의 짝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딸이 안 되면 이놈을 포기시키면 될 거란 게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그래, 경우가 소개해 줬다고?”
“꼬, 꼭 그런 건 아, 아닙니다.”
“원래 말을 더듬는 건가?”
“아, 아니, 원래 말 더듬지 아, 않는데요…….”
“쯧.”
민 회장이 혀를 차는 소리에 안청모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으니.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나. 사람이 타고난 그릇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자네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걸 누굴 탓하겠나.”
딸의 짝으론 자신이 맞지 않는다는 완곡한 거절의 뜻이 담겨 있음을 안청모도 알 수 있었다.
그래, 나 같은 놈이 무슨.
민지선과 만나면서 그도 이쩌면 이것이 그의 인생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한여름 밤의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방문이 열리고 준비된 음식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24첩 임금님 밥상 부럽지 않은 상차림이 펼쳐졌지만 안청모의 눈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 한잔 들게.”
술 주전자를 들고 있는 민 회장의 모습에 안청모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민 회장의 잔에 술을 따라 주려 했지만 민 회장 스스로 따르는 모습에 민망한 두 손을 거둬야 했다.
처음부터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언감생심 지선의 짝으로 자신은 말도 안 된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엔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잘 보이고 싶었던 거겠지. 하지만 어떻게 해도 자신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머릿속이 정리되면서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의도한 건 아니었을 테지만 경우를 통해서 내 딸을 만난 거라면 내 딸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만났나? 혹시 배경을 보고 일부러 접근한 건가? 내 딸만 후릴 수 있다면 새명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기는 걸 테니.”
“한번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표님이 후릴 수 있다고 후려지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흠…….”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에선 새명……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부담스럽다?”
“네. 새명이 뒤에 있다면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드라마를 만드는 제 실력이 늘어나는 건 아니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제겐 대표님보다 드라마가 더 중요합니다.”
자기 딸보다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안청모의 말에 민 회장은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그런 걸 알 리 없었던 안청모는 하고 싶은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잘 통했고, 만나면 즐거우니까 만나는 거니 대표님께 제가 원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가끔 만나 이야기하고 밥 먹고, 아마 앞으로도 그게 전부일 겁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딸은 결혼을 하면 그와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놈은 그런 마음조차 없다니……. 보잘것없는 놈에게 딸이 겨우 그 정도였다니 민 회장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네가 얻는 건 뭐지?”
“글쎄요. 하지만 사람이 단지 뭔가를 얻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대표님이 저와 함께 있을 때 긴장감 없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안청모의 말에 민 회장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딸이 웃는 모습이라……. 딸이 웃는 걸 언제 봤더라?
어렸을 땐 소리 내면서 자주 웃었던 것 같은데 조금씩 자라면서 그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최근 들어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할 때 분위기가 좋으면 간혹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자신에게 말할 때 회사 일 보고하듯이 딱딱한 말투를 떠올린 민 회장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는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 같은 사람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비는 언젠간 그치겠죠. 그러니 그때까지 모른 척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것은 딸이 만나길 원하는 동안만 만나겠다는 안청모식 표현이었다. 그걸 알아차린 민 회장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별말 없이 식사를 이어 나갔다.
얼추 식사가 끝나자 민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뜻 알겠네. 더 머물고 싶지만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네.”
“살펴 가세요.”
그렇게 민 회장이 떠나자 긴장이 풀린 안청모는 널브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인기척이 들리자 놀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경우였다.
“아직 안 갔어?”
“형님만 두고 어떻게 갑니까? 무슨 일 생기면 구급차 부르려고 대기 타고 있었죠.”
“고맙네.”
“근데 형님, 생각보다 강단 있던데요.”
“혹시 들었냐?”
“바로 옆방에 있었거든요.”
“하아…… 쪽팔려.”
“무슨 그런 말씀을. 솔직히 나, 형님이 한 얘기 듣고 느낀 게 많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누나한테 형님은 너무 과분한 것 같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전요, 형님이 그냥 형님이 아니라 정말 제 형님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괜한 소리 말아라. 아까 회장님 얼굴 직접 안 봐서 그래. 뭐, 어쨌든 드라마에서 보던 돈 봉투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고 현실은 좀 다르네?”
“혹시 돈 봉투 줬으면 받으실 생각이셨습니까?”
“내가 미쳤냐?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마. 그럴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비록 말소리만 들었을 뿐이지만 경우는 아버지가 처음보다는 많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정말 즐거워서 웃는 누나의 모습을 경우도 본 지 오래됐으니까.
누나를 웃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 * *
<열세 번째 달>은 경우를 비롯해 송지현, 김해영, 이시연, 곽선미 이렇게 다섯 명의 작가들이 함께하는 작업이라 속도가 빨랐다. 덕분에 10부 대본까지 나온 상태에서 첫 촬영을 시작했던 것에 반해 <블랙리스트>엔 그런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속편이 빨리 보고 싶다는 팬들의 성화도 있었지만 SBC 국장 최지연의 요구도 있었으니 결국 4분기 방송을 맞추기 위해 누구보다 가장 힘든 건 작가인 김준원이었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김준원은 5부 대본 집필을 끝내자마자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엔 세 명의 보조 작가가 6부에 쓸 구성을 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준원을 짧게 혀를 찼다.
부디 이번엔 구성이 잘 빠져야 할 거라며 김준원은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었다.
“6부 구성 짜는 거야?”
“네.”
“후우, 이번엔 제발 잘 좀 하자. 단번에 오케이 할 수 있게. 매번 뺀찌 놓는 나도 힘들다, 나도.”
김준원의 말에 보조 작가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말마따나 셋이서 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고 짜낸 구성을 매번 김준원이 이런 이유로 안 되고, 저런 이유로 안 된다고 거절한 탓이었다.
큰 그림까지 다 짜 줬는데 세부 구성도 제대로 하지 못한 보조 작가들이 김준원은 탐탁지 않았다.
“5부 대본 나왔으니까 오타 확인하고 보내 줘.”
“네, 선생님.”
“참, 촬영 시작했다지?”
“네. 안 그래도 촬영 시작했다고 연락 왔었는데, 선생님 집필하시느라 집중하시는 거 같아서 이제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잘했네. 샌드위치 맛있게 하는 집 알아봐. 그래도 촬영하느라 고생하는데 작가가 입 씻고 있으면 안 되지. 제작부 한 PD한테 물어서 촬영 인원 맞춰서 넉넉하게 샌드위치랑 커피랑 보내.”
“알겠습니다.”
“부족하면 큰일난다. 무조건 넉넉하게야. 나도 죽을 둥 살 둥 글을 써도 자기들은 밖에서 고생하고 나는 안에서 편하게 일한다고 현장 애들 은근히 우리한테 불만이 많아. 그러니까 구색만 맞추지 말고 눈 돌아가게 무조건 맛있게 잘하는 집으로 찾아야 한다고. 알았냐?”
“걱정 마십시오. 뒷말 안 나오게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좀 자야겠다. 며칠째 날밤 새웠더니 머리가 안 돌아가. 3시간은 죽은 듯이 잘 테니까 웬만한 전화는 제껴, 알았지?”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보조 작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으니 5부 대본까지 끝낸 마당에 3시간 안에 6부 구성을 끝내 놓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니 머리를 맞대고 없는 생각이라도 짜내야 했다.
보통 4부 대본을 가지고 편성이 결정되고, 6부에서 8부까지 대본을 뽑은 상태에서 촬영이 들어가는 게 일반적인 추세였다. 하지만 이번 <블랙리스트>는 전작의 시청률 대박으로 편성이 당겨진 상태. 그러니 시간이 전체적으로 촉박할 수밖에 없었다.
대본이 4부밖에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간 탓에 말 그대로 쫓기듯 대본을 뽑아내야 했다. 이보다 살짝 덜한 상태만 있을 뿐 거의 대부분의 드라마가 이런 살인적인 스케줄로 제작되고 있었다.
그러니 쪽대본이 난무하는 거고.
확실히 80퍼센트 이상 사전 제작 후 방송한다는 목표를 가진 <열세 번째 달>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그 탓에 촬영 시기의 차이가 났음에도 두 드라마의 방송 시간은 거의 엇비슷했으니 <뫼비우스>와 <마르스>에 이어 <열세 번째 달>과 <블랙리스트> 또한 원치 않는 대결 구도가 생겨 버리고 말았다.
신경 쓰지 않으면 좋았으련만 은근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열세 번째 달>은 무슨 내용이래?”
“송지현 작가님이 있으니까 그래도 로맨스나 멜로 아닐까요?”
“야, 지난번 드라마 못 봤냐? 로맨스, 멜로, 1도 없었잖아.”
“모르긴 몰라도 민경우 작가님도 있으니 확실히 평범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신경 쓰지 마. 우리는 그냥 우리 하던 일 하면 돼.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 다른 거 신경 쓸 거 없이 드라마만 열심히 쓰면 된다고.”
“근데 선생님도 신경 아예 안 쓰시는 걸까요? 솔직히 ‘스튜디오 글로리’가 제작한 드라마 중에 쪽박 난 거 없었잖아요. 그래서 은근히 더 신경 쓰여요. 저쪽은 못해도 중박은 치겠다 싶은 게 부담스러운 거 있죠.”
“네가 그런 걸 왜 신경 써? 그리고 너나 우리들은 몰라도 선생님이 그런 거 신경 쓰시겠냐? 됐으니까 그냥 이거나 마저 해. 알지, 3시간?”
3시간이라는 소리에 절로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보조 작가들은 다시 의견을 내며 구성에 열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 게 있었으니 죽은 듯이 자겠다는 김준원은 피곤한 몸과 달리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