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47화 (147/250)
  • #147. 날개 단 호랑이 (2)

    “형수님, 축하드립니다. 형도요.”

    “고마워요, 도련님.”

    “고맙다.”

    “저도 축하드려요.”

    “네, 아가씨. 고마워요.”

    “하하하, 다들 얼른 앉아. 새아가도 힘든데 어서 앉거라.”

    “네, 아버님.”

    갑작스러운 호출에 잔뜩 긴장했던 것과 달리 분위기는 모처럼 화기애애했다.

    첫째인 민정현 부부에게 아기가 생긴 것이었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는 가족의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기 위해 민 회장이 마련한 자리였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소식이었던 만큼 민 회장은 누구보다 기뻐했다.

    행복해하는 부부의 모습과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았지만 어쩐지 경우나 민지선은 살짝 미묘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식구가 늘어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가족을 중시하는 한국의 기성 세대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었으니 아무래도 여자이고 미혼인 민지선에게는 확실히 불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새 식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축복해 마땅한 일이었으니 다른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 마음껏 축하해 주기로 했다.

    “몇 개월이에요? 아니, 예정일이 언제예요?”

    “5개월이고, 11월에 태어날 거야.”

    “아니, 5개월이나 됐는데 왜 이제 말했어?”

    “아무래도 임신 초기에는 조심을 해야 하니까. 처음이다 보니까 모든 게 다 조심스러워서 말이지. 위험한 시기도 다 지났고, 아기도 쑥쑥 잘 크고 있다고 해서 이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

    “하여간 오빠 조심성 있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안 봐도 훤하네. 애 태어나면 또 얼마나 극성을 부릴 거야.”

    “극성이라니…… 당연한 거지.”

    벌써부터 자식 바보가 된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모처럼 행복한 모습이었으니 민지선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5개월이면 성별도 알 수 있지 않아요?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딸이에요. 이 이가 글쎄 딸이라는 소리 듣자마자 5살 정도 돼야 입을 수 있는 원피스를 사 온 거 있죠.”

    5살이라는 소리에 경우는 촬영장의 준서를 떠올렸다. 6살 준서가 맡은 배역이 5살 난 송혜원의 아들 최시윤이었으니. 딱 준서만 한 여자애가 집안을 돌아다니는 걸 생각하니 경우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전 생에 고아원에서 살았던 경우는 사실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보채고 울고 떼쓰는 아이들이 좋았을 리가 없지.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준서도 마냥 귀엽기만 한 게 조카가 태어나면 그것보다 훨씬 더 귀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좀 너무했네. 그건 아니지.”

    “아니, 점심 먹으러 잠깐 나갔다가 마침 유아 용품 파는 곳이 있길래 나도 모르게 들어갔는데, 여자애 원피스가 너무 예쁘더라고. 안 살 수가 없었어.”

    “5살 정도 되면 자기 생각이 있어서 취향 아니라고 고집부리고, 안 입고 그런다고. 괜히 미운 4살이니 7살이니 하는 말이 있는 게 아냐.”

    “그래? 근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결혼한 친구가 있어서…….”

    말을 하던 민지선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잘못 말한 것 같은 기분이 딱 들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화살은 곧장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제 큰애도 아이까지 생겼으니 지선이 너도 결혼해야지. 솔직히 이런 건 네 엄마가 나서서 해야 하지만…… 이제부터 나라도 챙겨야겠다. 말 나온 김에 선봐. 한 여사한테 기별 넣어 놓으라고 하마.”

    “아버지!”

    “너도 알겠지만 일만큼 가정도 중요한 법이야. 나이가 찼으면 가정을 꾸려야지. 가정이 네 뒤를 받쳐 줘야 회사에서도 일을 잘하는 법이다.”

    아무래도 민 회장이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민지선은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크헉, 켁, 칵, 흑, 컥, 커억!”

    민지선이 내놓은 폭탄선언에 놀란 경우가 사레가 들려 기침을 심하게 했다. 심하게 기침하는 경우의 모습에 민정현이 일어나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왕 결혼할 거라면 그 사람이랑 하고 싶어요.”

    재차 이어진 말에 경우의 기침은 멈추지 않았으니.

    “경우가 많이 놀랐구나. 나도 놀라긴 했는데……. 아니, 그보다 뭐 하는 사람인데? 어느 집 자식인데?”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어느 집 자식이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경우가 소개해 줬어.”

    “케헥, 컥!”

    ‘이 누나가 나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경우의 등을 두드리던 민정현의 손이 멈췄으니 다들 대답을 바라는 듯 경우를 쳐다봤다.

    이대로 자신에게 폭탄을 던져 놓고 태연하게 밥을 먹는 민지선의 모습에 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으나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에 오죽했으면 저랬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되면 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테니까.

    그보다 누나가 안청모를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 경우 역시 짐작하지 못했다. 새삼 두 사람의 사이가 그 정도인가 싶었던 그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참에 해결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봐. 상대가 누군데?”

    “드라마 만드는 사람이에요. 제가 일부러 소개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어요. 저도 두 사람이 그런 사이까지 발전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어요. 좋은 사람이에요.”

    “양친은? 다들 안녕하시고?”

    “벌써부터 호구조사 하시는 거예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 아직 결혼 생각 없어요.”

    “없다니? 조금 전에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맞아. 근데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되면 그 사람이랑 하고 싶다는 거지, 지금 당장 하겠다는 말은 아냐.”

    “경우, 네가 한번 말해 봐. 어떤 놈이야?”

    딸 가진 아버지 마음이 저런 걸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혼을 해야 한다, 어쩐다 하면서 막상 딸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에 민 회장의 시선은 싸늘해져 있었다.

    안 그래도 민지선과 함께 있는 안청모의 모습이 호랑이 앞의 토끼 같았는데 이러다 맹수들 사이에 둘러싸인 사냥감이 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좋은 사람이에요.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자부심도 있는 사람이에요. 솔직히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누나한테 과분할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래도 좋게 이야기해 주는 경우의 모습에 민지선의 입가에도 살짝 미소가 어렸다.

    “어쨌든 알았다. 난 그만 일어날 테니 앉아들 있어.”

    그렇게 민 회장이 자리를 벗어났다. 아직 밥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입맛을 잃은 것 같았다. 그렇게 민 회장이 자리를 뜨자 나머지 식구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탄 민정현의 아내 배예원은 다른 식구들이 없자 투덜대기 시작했다.

    “아니, 아가씨 뭐야? 갑자기 그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할 게 뭐냐고?”

    “왜? 속상했어?”

    “당연하지. 오늘 그 자리는 우리가 주인공이었다고! 근데 이게 뭐야? 완전 들러리 선 사람처럼.”

    “너무 속상해하지 마. 당신도 알다시피 지선이 나이가 적지 않잖아. 당신보다도 많으니까 아마 아버지 입장에선 걱정이 많으실 거야.”

    “뭐야, 당신? 지금 내 앞에서 아가씨 편드는 거야?”

    “지선이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아버지 생각을 하는 거지. 아, 당신은 몰라. 지금 아버지 심정이 어떨지. 나도 우리 딸이 사귀는 놈이 있다고 하면 진짜!”

    주먹까지 쥐고 부들부들 떠는 남편의 모습에 배예원은 어이가 없었다. 아빠들이 유독 딸을 아낀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제 남편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의외의 모습 덕분에 속상했던 마음까지 달아나 버렸다.

    “아가야, 이 엄마는 벌써부터 걱정이다. 부디 아빠가 이런 사람이라고 엄마 원망은 하지 마렴.”

    “당신,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야?”

    “적당히 해 두라는 거지, 적당히.”

    그날, 서로의 속내를 다 털어놓았던 두 사람은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특히 자신을 대하는 아내 배예원의 말투와 태도들이 다 변했으니 민정현은 이제야 온전히 내 가족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이 가족을 위해서라도 새명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 아버지가 그러시던데? 새명 홈쇼핑 주식 대부분이 경우 도련님 소유라고. 그렇다는 건 이번 S&Media 인수가 도련님 작품이라는 거지? 아가씨한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

    “당신도 느꼈잖아. 경우는 지선이 편인거. 하지만 걱정 마. 우리 쪽에서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 안 해. 대신 혼자 끙끙 앓는 건 하지 마.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이제 안 그런다니까 그러네. 그러니까 당신도 태교에만 전념해. 우리 꼬물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서로를 보며 다정하게 웃던 두 사람이 탄 차가 출발했다.

    * * *

    <블랙리스트>의 대본 리딩 당일.

    일찌감치 SBC에 도착한 정윤석과 그의 매니저 김 실장은 차 안에서 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여유롭게 앉아 있는 정윤석과 달리 그의 매니저 김 실장은 긴장되는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는 것도 모자라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아, 형! 다리 좀 그만 떨어. 정신 사나워 죽겠네.”

    “지금 네가 그런 거 신경 쓸 때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경거망동은 금물이야. 아니다, 아예 입을 닫아.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전에 연습한 거 있지? 그대로 해. 알았어?”

    “형, 그렇게까지 해야 해?”

    “그러게 시키는 대로 하지. 이게 다 네가 고집을 부려서 이 지경이 된 거잖아!”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귀에 딱지 앉게 생겼어.”

    “아니, 이번 드라마 대박 나기 전엔 절대 그만 못 둬. 전에 사장님이 그러셨어. 넌 옛날부터 가진 재능에 비해 욕심이 너무 많다고. 그 욕심이 네 발목을 잡을 거라고. 그러게 깜냥도 안 되는 놈이 해외 진출 욕심은 부려서, 네가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잖아!”

    “나도 그 인간이 그럴 줄 알았나? 이게 다 그 첸샤오건가 뭔가 하는 놈 때문이잖아?”

    SBC 기대작 <블랙리스트>에 출연하게 된 정윤석은 경우의 데뷔작 <셀룰러 메모리>의 주인공을 맡기로 한 배우였다. 하지만 그때 미국의 한 방송사와 세계적인 감독 첸샤오거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한 탓에 <셀룰러 메모리> 주연 자리를 차 버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

    불행히도 첸샤오거가 소송에 휘말리며 프로젝트는 없던 일이 되어 버렸고 빈손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빠진 <셀룰러 메모리>의 흥행을 지켜보며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은 연이어 온다고 했던가?

    그해 연말 출연하게 된 MBS의 드라마가 시청률 부진을 겪고 잇따라 출연한 드라마들이 모두 흥행에 실패하면서 일각에선 정윤석이 슬럼프가 아니냔 말까지 흘러나왔다. 그러니 이번 기회가 그에겐 더욱 중요한 자리일 수밖에.

    정윤석이 소속된 아트 엔터테인먼트는 이번 <블랙리스트>로 제2의 전성기를 만들 계획이었다.

    “이왕이면 주인공으로 해주지. 악역이 뭐야, 악역이!”

    “지금 네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야? 아무렴 그쪽에서 너 보고 캐스팅 했겠냐? 너 하나 출연시켜 보겠다고 대표님이 마신 술이 못해도 한 트럭은 될 거다. 이 드라마 들어오고 싶어하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데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어!”

    “아이, 알았어. 그래, 다 내 탓이다. 됐지? 걱정 말라니까! 형, 나 몰라? 나 정윤석이야. 연기로 누구한테 밀리지 않아. 내가 이번 드라마 찍고 CF 왕창 찍어서 대표님이랑 형 비행기 태워 준다, 내가!”

    “에휴, 말이나 못하면.”

    정윤석의 호언장담에도 김 실장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사실상 아트 엔터테인먼트의 주력 배우였던 탓에 정윤석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니 김준원 작가와 친분을 이용해 정윤석을 겨우 출연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도 전작인 <비밀 요원>과 <마르스>가 잘되면서 출연했던 우재환이나 차다원이 날개를 단 것처럼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아트 엔터에선 정윤석이 아니라 <블랙리스트> 작가인 김준원만 믿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악역이긴 하지만 매력적인 악역이 주인공보다 승승장구하는 경우도 많았으니 김 실장은 부디 이번 기회를 정윤석이 놓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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