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46화 (146/250)
  • #146. 날개 단 호랑이 (1)

    “원장님, 저 아무래도 이번 학기까지만 하고 다음 학기부터는 강의 못할 것 같아요.”

    오가진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드라마 아카데미 원장 이기숙은 깜짝 놀랐다.

    “오 작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아카데미에서 오 작가 평가가 얼마나 좋은데?”

    “솔직히 기초반이라면 모를까, 창작반을 지도하는 건 아무래도 제 실력엔 좀 무리인 것 같아요.”

    “무리는 무슨. 아무렴 내가 생각 없이 오 작가한테 강의 제안했겠어? 오 작가 정도면 자질이 출중하지.”

    드라마 아카데미는 기초반부터 시작해 연수반, 전문반, 창작반으로 교과 과정이 정해져 있었다.

    경우와 안청모가 그랬듯 면접을 통과한 학생들이 기초반 수업을 수료하면 그 중 성적에 따라 80퍼센트만이 연수반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위 단계로 넘어가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으니 기초반이 40명 정원에 10개반이었던 것에 비해 창작반은 20명 정원에 딱 1개반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 창작반에 들어갈 정도라면 실력은 어느 정도 검증된 셈.

    그 결과를 반영하듯 해마다 열리는 드라마 공모전 당선자들 중에 창작반 출신들이 빠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굳이 공모전이 아니더라도 창작반 정도면 다양한 루트를 통해 작가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 오가진으로서는 그런 학생들을 지도하기 버거웠던 것이다.

    “정 그러면 차라리 전문반이나 연수반은 어때?”

    “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그렇지만 실은 복귀를 해 볼까 생각 중이거든요.”

    “복귀? 그럼 글 다시 쓰려는 거야?”

    “네. 학생들 글 봐주다 보니 저도 가만히 못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한 번 써 보려고요.”

    “잘했네. 정말 잘 생각했어. 그렇게 말하니까 더는 못 붙잡겠다.”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 있어. 작가가 글을 쓴다는 데 환영할 일이지.”

    “정말 원장님 은혜는 못 잊을 거예요.”

    “은혜랄 게 뭐 있어. 오히려 내가 오 작가한테 고마워. 무리한 내 부탁 들어준 덕분에 우리 아카데미 출신들이 지금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한가지 걱정은 되네. 또 건강 해칠까 봐.”

    “이젠 그렇게는 안 해요.”

    “그거야 모르지. 오 작가, 집중하면 다른 건 생각 못 하잖아. 그래서 지금 아카데미도 그만둔다는 거 아냐?”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한 번 건강을 잃어 보니까 그게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왜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안 놓이지? 그렇다고 내가 옆에서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근데 벌써 시놉은 나온 거야? 혹시 PD들한테 돌렸어?”

    “아직 시놉시스 구성 단계예요. 솔직히 말하면 너무 오래 쉬어서 글이 잘 안 나오거든요. 그래서 아카데미도 그만두는 거구요. 자꾸 기댈 곳이 생기면 마음을 잡을 수가 없잖아요.”

    “지금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금방 원래 페이스 찾을 거야. 그래도 잘 생각했어. 오 작가 말대로 작가는 글을 써야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김종수 PD한테 연락해 보지 그래? 오 작가가 하겠다고 하면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하겠다고 나설 것 같은데. 그래도 오 작가 ‘스튜디오 글로리’ 개국 공신이잖아.”

    오가진 작가.

    ‘스튜디오 글로리’를 설립하고 처음 제작한 드라마가 바로 오가진 작가가 쓴 <스테이>였다. SF가 가미된 타임 슬립 소재의 드라마였으니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당시 방송국이나 드라마 제작사에서 모두 까인 작품이었다.

    재미있는 대본이 제작 현실만 따져 제작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한 김종수가 결국 제작사까지 설립하게 되었으니 이기숙의 말마따나 어떻게 보면 오가진은 ‘스튜디오 글로리’가 세워지게 된 원인 제공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에 집중하면 아무것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일에만 몰두하는 성격 탓에 결국 건강을 잃었고 작가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한 그녀에게 아카데미 원장인 이기숙이 강사를 제안했던 거였으니.

    “개국 공신이라니요. 저 아니었어도 김 PD님 제작사 차릴 계획이셨던데요, 뭘.”

    “그래도 오 작가 덕분에 그 계획이 빨리 실행된 건 사실이잖아. 오 작가만 좋다고 하면 그쪽에서도 오케이 할 것 같은데?”

    “네, 분명 그러실 거예요. 그래서 싫어요. 괜히 폐 끼치는 것 같잖아요.”

    “폐라니, 그런 말이 어딨어? 사람 아픈 게 무슨 죄야?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자기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런 소리 마. 김 PD 섭섭해하겠어.”

    “원장님 말씀대로 김 PD님 충분히 그러시고도 남을 분이세요. 근데 제가 건강 관리를 잘 못해서 아팠던 것도 사실이잖아요. 제 탓이 맞아요. 그래서 갑작스럽게 작가 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거, 저 아직도 김 PD님께 죄송하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만나시면 아무 말씀 마세요.”

    “하여간 쓸데없는 걱정은.”

    “나중에…… 시놉 완성되면 기회 봐서 제가 직접 찾아가 볼게요.”

    “알았어. 내가 괜히 중간에서 끼면 오 작가만 곤란해질 테지.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오 작가는 자기 생각만 해. 알았지?”

    “감사해요, 원장님. 덕분에 다시 복귀할 생각도 할 수 있었어요.”

    “내가 한 게 뭘 있다고. 그나저나 오 작가가 가 버리면 오 작가 자리를 누구로 대신 채워야 하나? 혹시 추천할 만한 작가 없어?”

    “제가 아는 작가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스튜디오 글로리에도 없어? 그래도 같이 있던 작가들 아직 있을 거 아냐?”

    “제 성격 아시잖아요? 글 쓸 땐 한창 예민해서 누구랑 교류도 안 하는 거요.”

    “까칠 대마왕이라고 소문났었지?”

    “그 정도까진 아닌데요. 어쨌든 그때 작가들이 지금까지 있겠어요?”

    “하긴, 그때 생각하면 ‘스튜디오 글로리’도 참 많이 변했어. 저렇게 커질 줄 누가 알았겠어? 솔직히 김종수 PD 능력이라기보다 그 공동 대표라는 민경우 작가 솜씨겠지?”

    “네. 김종수 PD님은…… 사람이 참 좋은 분이시죠.”

    짧은 말 속에 참 많은 뜻이 담겨있는 탓에 이기숙은 그만 웃고 말았다.

    “하여간 오 작가 웃기는 센스는 알아줘야 해. 그래, 우리가 김 PD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근데 생각해 보니까 너무 아깝네.”

    “뭐가요?”

    “그 민 작가 말이야. 사실 우리 아카데미 기초반 다녔었거든. 수료는 못 했지만. 수업 한 한 달 들어왔나? 그리곤 바로 입봉해서 말이야.”

    “그래요? 어떻게 기초반에서 바로…… 그럴 수 있죠?”

    “그러니까. 그런 걸 두고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는 거겠지? 상급반 학생들 지원하라고 공모전 열었는데 기초반 주제에 떡하니 대본 제출하고, 하필이면 그걸 본 박종연 감독이 수정해서 영화로 만들었잖아.”

    “설마 지난번 칸에 간 그 영화가…….”

    “그래, 그렇게 실력이 있는 줄 알았으면 기초반이라도 수료를 하게 했음 얼마나 좋아. 수업을 오래 들은 것도 아니고 수료를 한 것도 아니니 우리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홍보할 수 없잖아.”

    “원장님도 참.”

    “그렇게 쿨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니까. 지금 ‘스튜디오 글로리’가 한 일을 봐. 어제 저녁 뉴스에도 나오더라고. 미국에서도 제임스 로이건이 한국 드라마 연출을 맡게 됐다고 어떤 드라만지 미국 사람들도 궁금해한대. 진짜 아까워 죽겠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이기숙의 모습에 오가진은 웃었지만 사실 그만큼 이기숙은 진심이었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친분을 쌓아둘 걸 그랬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아쉬운 마음 때문인지 이기숙은 계속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 * *

    <열세 번째 달>의 촬영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촬영 현장.

    오랜만에 간식차와 함께 현장을 찾은 경우는 간간이 촬영 진행 상황도 보고 배우들의 떨어진 당을 보충해 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투덜대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여기에 나는 왜 부른 거냐? 돈도 많으면서 간식차만 부를 게 아니라 전문가들도 같이 불러야지.”

    “내가 직접 해 주면 사람들이 더 좋아하잖아.”

    “너야 그렇겠지. 근데 나는 아니잖아?”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건 당연한 거 아냐? 도련님 가는데 비서가 당연히 따라와야지.”

    “칫! 이럴 때만 도련님이래.”

    “김 비서, 인사고과가 어떻게 되나? 대리 단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승진은 하고 싶지 않은가 봐?”

    “아유, 도련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성심성의껏 보필하겠습니다요, 네.”

    김강철의 너스레에 결국 경우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보고할 일이 뭔데?”

    “린이췐 씨한테 연락이 왔어. <귀월鬼月> 종영했다고 하더라. 다행히 그쪽에서 시청률 1위로 끝났다고 고맙다고 전해 달래.”

    “그런 거면 직접 연락하지. 확실히 일주일에 하나씩 방송하니까 되게 오래 전에 시작한 것 같은데 이제 끝났네.”

    경우가 쓴 대만 드라마 <귀월鬼月>은 생각했던 것보다 첫 방송이 늦어졌다. 드라마 특성상 CG가 들어가야 하는 부분이 많은 탓이었다. 완성도 높은 CG를 구현하기 위해 CG작업은 한국에서 진행했던 것.

    경우가 직접 섭외한 CG팀에게 의뢰해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으니 그 탓에 방송이 늦어지긴 했어도 대만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볼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다행히 시청률도 화제성도 좋은 결과를 얻은 덕분에 경우는 미국 드라마 제작하는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그쪽에서도 알고 있더라고. 제임스 일 말이야. 그래서 지금 자기가 연락하면 괜한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더라고.”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러게. 계속 보다 보니까 사람이 참 좋아.”

    “그리고 또?”

    “응?”

    “할 말 더 있잖아.”

    “하여간 눈치는 빨라. 넌 별로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해 줘야겠지? SBC에서 이 작품 밀어내고 들어가는 거 말이야.”

    “아, 김준원 작가 작품?”

    “응. 벌써 홍보하던데?”

    “벌써? 첫방이 4분기라고 하지 않았어? 홍보하기엔 너무 이른 거 아냐?”

    “그만큼 SBC에서 힘을 주고 있는 거겠지.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지금 너한테 화제를 다 뺏겼으니 어떻게든 되찾아 가려고 저러는 거지.”

    “그래도 아직 2분긴데 4분기에 할 드라마를 벌써 홍보하는 건 아니지. 기대감만 높여 놨다가 기대에 못 미치게 만들면 그거 고스란히 자기들 데미지로 가는 거잖아.”

    “남 걱정을 네가 왜 해?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너도 홍보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우리랑 저쪽이랑 같냐?”

    “다를 건 뭔데?”

    “우린 홍보한 게 딱 두 가지야. QVN하고 제임스 로이건.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비밀에 부쳤지.”

    “아, 제임스에 대한 호기심이 드라마로 연결되게?”

    “그래. 하지만 저쪽 드라마는 <비밀 요원>부터 시작해서 <마르스>에 거기다 이번 드라마까지―.”

    “<블랙리스트>.”

    “뭐?”

    “이번 드라마 제목 <블랙리스트>라고.”

    “그래? 어쨌든 이 정도면 솔직히 피로도 높지 않겠어? 거기다 이런 시리즈는 생각하지 못한 높은 장벽이 있지.”

    “높은 장벽? 그게 뭔데?”

    “왜 전편 만한 속편이 없다고 하는데? 다행히 <마르스>는 기존 팬들 기대감을 충족시켜서 <비밀 요원>보다 인기를 더 끌었지만 눈높이가 높아진 기존 팬들 취향에 맞추는 건 생각보다 힘들어. 팬이 안티로 돌아서는 건 한순간이거든.”

    그게 또 그런가 하며 골똘히 생각하던 그때 6살 난 아이가 간식차로 다가오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간 경우가 몸을 낮춰 물었다.

    “우리 준서 촬영 다 했어요?”

    “네!”

    “그럼 아저씨가 맛있는 와플 줄까요?”

    와플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침을 꼴깍 삼키는 준서의 모습에 다들 눈이 휘어졌다.

    준서는 송혜원이 자기 목숨보다 더 아끼는 아들 최시윤 역을 맡았으니 어린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연기력은 물론 귀여운 말과 행동 덕분에 촬영장의 마스코트로 통했다.

    경우는 뜨겁지 않은 와플을 골라 준서의 손에 쥐어 줬다. 한입 베어 물며 행복해하는 준서의 얼굴에 경우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들마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경우는 한쪽으로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

    “누나가 이 시간에 어쩐일이야.”

    [아버지가 저녁 같이하자고 하셔서. 시간 되지? 안 돼도 돼야 할 거야.]

    “누나 설마…… 결혼해?”

    [그래, 그렇게 계속 기어올라라. 후환이 두렵지 않으면 말이야.]

    전화를 통해 전해지는 한기에 경우는 꼬리를 말았다.

    “알았어, 누나. 그럼 그때 봐.”

    다들 바빠 명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모이지 않는 지금 아버지의 호출이 경우는 의아하기만 했다.

    “야, 지선 누나 결혼해?”

    언제 왔는지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김강철의 모습에 경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넌 가서 와플이나 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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