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45화 (145/250)

#145. 시작은 화려하게 (5)

‘스튜디오 글로리’의 소회의실을 차지하고 있는 이시연과 곽선미는 활발히 의견을 나누며 대본 집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대단하지만 연출이 무려 제임스 로이건이었다. 처음엔 마냥 기뻤는데 생각해 보니 그의 경력과 비교하면 자신들은 초라했다.

이 작품으로 입봉하는 곽선미는 물론, SBC 자체 제작 드라마 집필을 맡았던 이시연 역시 시청률이 생각보다 나오지 않았던 탓에 경험이 한 번 있다 뿐, 곽선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들을 믿고 대본을 맡겨 줬으니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낮이고 밤이고 회의실에 틀어박혀 대본 집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특히 곽선미는 지금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꿈이라면 깨지 말았으면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송지현의 보조 작가로 일해 왔던 그녀는 처음 송지현이 ‘화진 픽쳐스’와 등을 돌렸을 때 누구보다 불안했다. 이대로 자신의 입봉 기회마저 날아가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안 되는 건 줄 알면서도 ‘유니언 스튜디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결국 송지현의 스케줄을 일러바치는 일까지 하고 말았다.

솔직히 그대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송지현은 그런 자신을 내치기보다 이해해 줬고 결국 이렇게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입봉까지 하게 해 줬다. 그러니 대본에 더 매달리며 집중할 수밖에.

다행히 두 사람이 대본을 쓰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노력을 들인 만큼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다.

이미 밤이 늦은 시각,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경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두 분 작가님들 아직 안 들어가셨습니까?”

“아, 작가님!”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요. 그만 퇴근하시죠. 드라마는 장기전인데 이런 식으로 하다간 체력이 안 남아나요. 아직 첫 촬영까지 시간도 남았고 방송까지 충분해요.”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 알겠는데 잘 자고 피곤이 풀려야 좋은 생각도 나오는 거죠. 몸이 피곤하면 생각도 더 안 나는 법입니다.”

경우의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 두 사람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늦게까지 고생하는 작가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뭐라도 먹여서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경우가 입을 열던 참이었다.

“저기-.”

“어? 저 동생이 이 앞에 데리러 왔다는데요.”

어느새 휴대폰을 들고 있던 이시연이 입을 열었다.

“동생이랑 사이가 좋은가 보네요?”

“좋기는요. 엄마가 시켰겠죠. 헉, 부재 중 전화도 와 있었네. 얼른 가 봐야겠어요. 동생이 전화 안 받아서 화가 많이 난 것 같아서요.”

“네, 어서 가 보세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이시연이 빛의 속도로 가 버리고 나자 둘만 남은 경우와 곽선미는 어색하게 서로만 보고 있었다.

“그럼 가실까요?”

경우의 말에 곽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버튼을 누르고 아래층으로 떨어지는 숫자를 보며 경우는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둘이서라도 뭘 먹으러 가야 하나, 밤이 늦었는데 집까지 바래다줘야 하나? 이시연까지 같이 있을 땐 별거 아닌 일들이 둘이 되니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도 않았고.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내일 봬요, 작가님.”

고개를 숙이며 꾸벅 인사하는 곽선미를 보며 아무래도 늦었는데 혼자 보내기가 뭐 할 것 같아 그녀를 붙잡았다.

“곽 작가님.”

“네?”

바로 그때.

“경우 씨!”

갑작스러운 부름에 돌아보니 강희주가 성큼성큼 걸어와 자연스레 경우의 팔짱을 끼었다. 얼떨떨해하는 그를 보며 싱긋 웃는 그녀.

“이 시간에 어떻게…….”

“어떻게 오긴요. 보고 싶어서 왔죠. 이 시간이면 아직 사무실에 있을 것 같았거든요. 다행히 딱 맞췄네요. 근데 이분은…….”

자신에게 향한 강희주의 시선에 곽선미가 서둘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곽선미라고 합니다.”

“우리 회사 소속 작가님이세요.”

“아, 그러시구나. 강희주라고 해요. 근데 설마 지금 퇴근하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은근슬쩍 경우의 팔에 끼었던 팔짱을 풀고는 그를 살짝 흘겨봤다. 오해라는 듯 경우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퇴근하시라고 했어요.”

“네, 작가님이 쫓아내셔서 지금 집에 가려구요. 안 그랬으면 더 있었을 텐데…….”

당황해하는 두 사람을 보며 강희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아요, 알아. 장난 좀 친 건데 당황하시기는. 음, 그래도 지금 너무 늦었어요. 괜찮으시면 제가 바래다드리고 싶은데요?”

“네? 저요? 아니에요. 안 그러셔도 돼요. 버스 타면 금방인데요.”

“네, 버스 타면 금방이죠. 근데 제가 검사라…… 맨날 사건 기록만 보다 보니까 사회에 불신이 좀 많거든요. 안 늦었으면 모를까 지금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요. 제 맘 편하려고 그런 거니까 같이 가요, 네?”

딱 봐도 연인 사이, 굳이 끼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권하는 것임을 안 곽선미는 결국 강희주의 차에 올랐다.

빠르게 달린 차는 어느새 곽선미의 집 앞에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뭘요.”

“그럼 내일 봅시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며 사이드미러로 곽선미를 보던 강희주가 입을 열었다.

“근데, 방송 일 하는 사람들은 다 저렇게 예뻐요?”

“네?”

“아니…… 아까 회사 로비에서 처음 보는데 연예인인 줄 알았잖아요. 말하는 거 보니까 차분하고…… 나랑 다르게 여자답달까? 딱 우리 할머니가 말하는 참한 스타일인데…….”

자못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경우는 피식 웃었다. 평소엔 부르지도 않던 이름을 부르지 않나, 사람들 앞에서 팔짱을 끼지 않나, 질투하는 모습까지도 이젠 퍽 귀여워 보였으니.

“내 눈엔 검사님이 제일 예쁩니다.”

경우의 말에 당황한 강희주가 얼굴을 붉혔다.

“무슨 그런 말을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와요?”

“그럼 깜빡이 켜고 들어가죠. 희주 씨, 참 예쁩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보면 볼수록 예쁜 사람인 걸 새삼 깨닫습니다.”

경우의 말에 강희주가 배시시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이 여자에게 익숙해진 건지 길들여진 건지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가 점점 예쁘게 느껴졌다. 질투하는 모습도, 그러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곽선미를 걱정해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도 다.

어느새 경우의 왼손이 강희주의 오른손을 꽉 잡고 있었다.

* * *

S&Media의 대회의실, 아침부터 <열세 번째 달>의 대본 리딩 준비로 회의실이 시끌벅적했다. 일찌감치 회의실을 찾은 배우와 매니저들은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 드라마 대본 리딩 때보다 더 많은 카메라가 세팅되는 걸 보고 놀라고 있었다.

“근데 대본 리딩하는 것뿐인데 카메라가 지금 몇 대예요? 메이킹 찍는다고 해도 평소보단 좀 많은 거 아니에요?”

“아, 메이킹을 영상 클립이나 홍보용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용으로 찍을 건가 봐.”

“아, 저도 들었어요. 드라마 시작 전에 프롤로그로 만들어서 제작 과정을 보여 준다던데요. 아무래도 케이블이니까 지상파보다는 사람들의 관심을 적을 거 아녜요? 아까 배우들도 인터뷰 따는 것 같던데요?”

“그거야, 주연 배우들이나 그러겠지. 근데 미소 씨 오늘 긴장 많이 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첫 주연이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하긴. 그래도 용케 운이 좋았나 봐. 오디션으로 주인공 자리까지 꿰찬 거 보면 말이야.”

“그래도 다른 역도 아니고 송혜원 역인데 저는 조금 걱정은 되네요. 이영 역의 채윤 씨보다 솔직히 기대감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잖아요.”

“그거 너무 선배님 기준에서만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내 기준에서 생각했다니, 무슨 뜻이야?”

“채윤 씨야 걸그룹으로 막 데뷔했을 때부터 연기력에 비주얼로도 소문이 자자했으니 기대하시는 건 이해해요. 근데 저는 솔직히 미소 언니가 제일 기대됐거든요? <역전의 정수> 안 보셨어요? 그 드라마 포텐 터지기 시작한 게 미소 언니가 죽으면서부터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그 장면이 <역전의 정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장면일 걸요?”

“누가 뭐래? 주인공 한 번 해 본 적 없어서 좀 걱정된다는 말을 굳이-.”

“연기가 되는데 걱정될 게 뭐 있어요?”

“그러다 싸우겠네. 그만들 해!”

선배의 일갈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사람들의 말마따나 첫 주연을 맡은 전미소는 긴장되는 마음에 자꾸만 손에 차는 땀을 닦기 위해 바지를 쓸어내렸다.

이번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역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송혜원은 20대의 풋풋한 모습부터 삶에 지친 30대의 모습까지 8년이라는 시간을 자연스레 뛰어넘을 정도의 연기력을 필요로 했다.

송지현이 서도희를 추천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30대 후반임에도 20대 못지 않은 동안 외모와 나이 어린 배우들에게서 볼 수 없는 원숙함이 있었으니 처음부터 서도희를 생각하고 캐릭터를 만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싱크로율이 잘 맞았다.

하지만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

결국 오디션을 통해 수많은 배우들 중 선택된 사람이 전미소였다.

사실 그녀는 남들보다 데뷔가 늦은 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연기란 꿈을 가졌던 것. 그 탓에 사람들은 그녀가 무명 시간이 길었다고 여겼지만 사실 데뷔에 비하면 주인공까지 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탓에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나 때문에 드라마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경험을 쌓고자 참가한 오디션에 덜컥 뽑히고 나니 그때부터 걱정이 휘몰아쳤다. 하필 자신이 맡은 송혜원 역에 서도희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 서도희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부족한 점만 더욱 깨닫고 말았다.

꿈이었음에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왜 불안해지는 건지, 세팅되어 있는 카메라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였다. 여기서 이겨 내야 다음이 있다는 생각에 긴장을 풀어 보려 하지만 쉽지 않은 일.

바로 그러던 차에 띠링 하고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너무 긴장한 탓에 진동으로 해 두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었던 그녀는 휴대폰을 끄려다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걱정 말아요. 이미 배우님은 충분히 잘해 오고 있어요. 못 믿겠으면 나를 믿어요.’

다름 아닌 경우가 보낸 메시지였다. 오늘 대본 리딩엔 드라마를 집필한 이시연, 곽선미 두 작가만 참여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곳에 온 게 아닐까 싶은 마음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경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보지 않고도 그가 이미 자신의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다.

<역전의 정수> 때만 해도 그랬다.

날아오는 화살비 속에서 동생 꺽쇠를 살리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정이.

꽤 어려운 씬이었지만 상황상 여러 번 찍을 여력이 안 됐었다. NG를 내지 않고 단번에 가야 한단 생각에 더욱 부담을 느낀 그녀에게 경우는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다며 자신을 믿으라 했었다. 그 덕에 결국 좋은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전미소는 경우가 하는 말은 무조건 믿기로 했다.

메시지 덕분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그녀는 경우에게 감사하다는 답 문자를 보낸 뒤 비로소 대본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후 곧바로 시작된 대본 연습.

그녀는 사람들의 우려에 보란 듯이 송혜원에 완전히 녹아들어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드라마 특성상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오가야 하는 데도 그녀의 연기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랑의 열병에 빠진 철없는 20대의 모습부터 일에, 생활에 지친 30대의 모습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 그녀의 연기를 감탄한 듯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

메이킹을 위해 찍고 있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경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자신이 참석하면 집필하느라 고생한 이시연, 곽선미 작가가 들러리가 될까 봐 방송국까지 왔음에도 그는 대회의실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되는 마음에 대본 리딩을 지켜봤는데 그것만으로도 벌써 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졌다. 그는 혹시 다른 사람과 마주칠까 싶어 대본 리딩이 끝나기 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대본 리딩이 완전히 끝나자 촬영장 못지않은 열연을 끝낸 배우들은 물론이고 제임스와 두 작가 모두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 확신했다.

이 드라마, 대박 날 것이 분명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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