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44화 (144/250)
  • #144. 시작은 화려하게 (4)

    SBC 드라마국 국장 최지연은 뉴스를 보다 신경질적으로 TV를 꺼 버렸다. 여기고 저기고 죄다 제임스 로이건에 대한 뉴스만 들려온 탓이었다.

    다른 지상파 드라마였다면 SBC뉴스에서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테지만 제임스 로이건이 연출을 맡은 드라마는 하필 케이블 드라마. 시청률이 애국가보다 나오지 않는 케이블 드라마를 경계할 필요가 있나 싶어 지상파 뉴스들은 앞다투어 제임스 로이건에 대한 소식을 전해 왔던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미국의 연출가가 한국의 드라마를 연출한다는 게 이례적이긴 했다.

    어쨌든 오디션이 열린다는 대학로 소극장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디션에 참가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소문을 듣고 단순히 구경 온 사람들도 있었기에 일대가 소란스러웠다.

    그런 현장의 소식과 함께 한국 드라마에 참여할 수 있어서 기쁘다며 한국 드라마의 독특한 매력과 뛰어난 부분을 이야기하는 제임스 로이건 본인 인터뷰까지 더하니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당연히 그가 만든 <크리미널 리포트>에 대한 관심은 미드 스트리밍 사이트 ‘올웨이즈’의 방문으로 이어져 최근 드라마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대한민국은 제임스 로이건의 열풍이 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올웨이즈’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크리미널 리포트>뿐 아니라 그가 과거 제작에 참여했던 드라마들까지 올려놓은 상태. 덕분에 광고 수입은 물론 정액제를 신청하는 사람도 늘어났으니 홍보를 제대로 한 셈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가장 배가 아픈 건 눈앞에서 <열세 번째 달>을 놓쳐 버린 최지연이었다. 그녀도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면에 나서진 않았지만 결국 ‘유니언 스튜디오’ 오진원을 이용해 전임 전효상 국장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한 그녀였다.

    당연히 ‘스튜디오 글로리’와 사이가 좋았던 전효상이 그대로 있었다면 제임스 로이건이 참여한 드라마는 SBC의 드라마가 되었을 일. 이러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사장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니 결국 SBC 설경태 사장은 그녀를 호출할 수밖에 없었다.

    입사 후 처음으로 설 사장과 독대하게 된 최지연은 자신을 향한 따가운 설 사장의 시선에 최대한 몸을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이 난관을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생각해 두었던 이야기를 거침없이 술술 내뱉고 있었다.

    “드라마 편성이 취소되었다고 해서 방송사를 인수한 건 아닐 겁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방송사를 인수할 준비를 해 왔다고 봅니다.”

    “하긴, 방송국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즉흥적으로 할 수는 없었겠지. 근데 듣기론 이번에 제임스 그 친구가 연출하기로 한 드라마가 우리 SBC와 하기로 약속되어 있던 드라마라던데?”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 SBC에서 그 드라마를 계속하기로 했다고 해서 제임스 로이건이 연출을 맡았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건 왜지?”

    “지난번 송지현 작가의 드라마가 케이블 쪽에서 기록을 세우긴 했지만 흥행한 지상파 드라마에 절반도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이 점을 민 작가가 모를 리 없습니다. 방송사를 인수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을 이벤트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게 제임스 로이건이다?”

    “두 사람의 친분이 두텁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민 작가가 일부러 부탁을 했겠죠.”

    “하긴. 그 정도나 됐으니 그런 사람이 그 작은 방송국의 드라마 연출을 맡겠다고 온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해선 안 돼. 케이블이라도 지상파만큼 성장할 수 있다는 거 송지현 드라마를 통해 확인했잖아.”

    “걱정 마십시오. 아무리 잘나가는 쇼러너라고 해도 한국에선 초보 연출가에 불과합니다. 미국하고 한국은 엄연히 환경이 다르잖습니까? 거기다 이미 대비는 해 둔 상태입니다.”

    “어떻게?”

    “지난해 가장 인기를 끌었던 <마르스>의 김준원 작가 세 번째 시리즈가 4분기에 나올 예정이거든요.”

    “아, 그랬지. 그렇다면 조금 안심해도 되겠어. 그렇다고 자네까지 안심하진 마.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차지연은 사장실을 나오며 한숨을 돌렸다.

    이렇게 된 이상 김준원의 세 번째 시리즈에 모든 걸 걸어야 했다.

    * * *

    새명 홈쇼핑이 있다고 하지만 S&Media의 진짜 주인이 경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스튜디오 글로리’를 길들이려 했던 드라마 제작사 협회의 입장도 난감해졌다.

    S&Media가 드라마와 관련이 없는 곳이라면 모를까 보유하고 있는 7개의 채널들 중에서 드라마가 방송되는 곳이 QVN과 XCN, 두 채널이나 되었다.

    특히 S&Media의 사장이 바뀐 뒤로 S&Media에서 드라마를 더 많이 만들겠다고 선언한 참이었으니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스튜디오 글로리’,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뒤에 있는 경우를 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랬다간 S&Media와 척을 지는 꼴이었으니 제 밥그릇을 엎는 행위밖에 더 되겠는가.

    경우는 이렇게 된 상황을 제임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었다.

    “한국에는 갑과 을이라는 게 있어.”

    “갑과 을?”

    “그래. 보통 계약을 할 때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갑이고 불리한 위치에 있으면 을이라고 해. 하지만 계약관계가 아니더라도 서로 간에 갑과 을이 자연스레 정해지지. 지금까지는 저쪽이 자신들을 갑이라 여겼겠지만 이번 일로 느끼게 될 거야. 자신들은 한번도 갑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걸.”

    미소 짓는 경우를 본 제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뭐가?”

    “난 경우가 천사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보니 악마였어. 그것도 대악마!”

    사실 경우가 제임스를 이용해 이번 오디션을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는 기존 드라마계의 기득권에게 날리는 일종의 출사표였으니 그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경우는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길을 갈 생각이었다.

    경우는 S&Media에 새로운 사장이 된 임장효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짐작했던 대로 임장효와는 생각이 비슷했다. 앞으로 S&Media가 나아갈 방향이 얼추 잡혔으니 당분간은 임장효의 장단에 굿이나 보며 떡이나 먹으면 될 일이었다.

    “그보다 한국 배우들은 어때?”

    “생각보다 감정 표현이 풍부하더군. 언어가 달라서 내가 연출을 잘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지. 말이 통하지 않아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할까? 확실히 색다른 경험이었어.”

    “그래? 마음에 드는 배우는 있고?”

    “그 강도열이라는 친구? 분위기가 괜찮던데?”

    ‘스튜디오 글로리’ 소속 배우였지만 연출을 맡은 제임스에게 캐스팅의 권한을 주기 위해 강도열 역시 특혜를 바라지 않고 오디션에 참가하도록 했다. 역시는 역시라고 제임스도 단번에 강도열의 매력을 알아봤으니.

    “작가들과도 더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하겠지만 내 생각에 최재욱 역에 그 강도열, 그 친구가 잘 어울릴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최재욱은 여자 주인공 송혜원의 현재 남편 역.

    “나와 생각이 비슷해서 다행이야. 나도 강도열 씨가 그 역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그것 정말 다행이군. 연출을 맡겠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걱정이 많았거든. 아무래도 다른 환경에서 지내 온 사람이니까 내가 괜찮다고 여기는 것들이 여기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네. 의견 조율을 하면 얼마든지 개선의 여지가 있는 거잖아.”

    경우의 말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이 났는지 경우에게 물었다.

    “근데 왜 제목이 야? 1년은 12개월이잖아.”

    “동양에는 윤달의 개념이 있거든.”

    “윤달?”

    “그래, 서양에선 오래전부터 해를 기준으로 날짜를 계산했지만 동양에선 달을 기준으로 날짜를 계산했어. 한 달이 29일, 30일 번갈아 가면서 있는데 이렇게 되면 1년이 354일이야.”

    “1년은 365일이잖아. 11일이나 차이가 나는데?”

    “그렇지. 태양력과 날짜 맞추는 것도 어렵고 계절도 안 맞고. 그래서 날짜와 계절이 맞지 않는 걸 해소하려고 윤달을 사용하는 거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충 알 거 같아.”

    “그러면 1년 12개월이지만 몇 년에 한 번씩은 13개월이 되는 셈이지. 옛날 사람들은 윤달이 썩은 달이라고 해서 어떤 불경스러운 일을 해도 벌받는 걸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평소 하지 않은 일을 윤달에 했다고 해. 가령 이장이나 뭐 죽음에 관한 것들?”

    “그 윤달이 언젠데?”

    “작년.”

    “가만, 작년이었다면 지난 연말이 말 그대로 열세 번째 달이었다는 거잖아?”

    “그런 셈이지.”

    그렇게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 한 후 두 사람은 오디션에 참석한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사실은 스타 엔터에서 밀어 넣으려 했던 걸그룹 ‘에바’의 하주 역시 오디션을 보러 왔다는 점이었다. 공교롭게도 대사 한 줄 듣자마자 제임스가 됐다고 나가라 했으니 확실히 언어의 장벽은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날의 대화를 토대로 다음날 출근을 하자마자 경우와 제임스는 작가들은 물론 스탭들과 함께 배역에 대해 의논했다. 합격한 배우들에게 오디션 결과를 통보하자 이제 드라마 촬영 전 남은 일이라고는 대본 리딩이 전부였다.

    대본까지 받은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대본이 닳도록 연습에 매진했다. 그건 강도열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는 무슨. 여기가 무슨 민속촌이냐?”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강도열이 투덜대며 문을 열었다. 그러다 당황하고 말았으니.

    “어? 실장님?”

    문 앞에는 강도열의 절친한 친구인 우재환뿐 아니라 그의 소속사 실장인 하도섭도 함께였다.

    “재환이가 여기 온다고 해서 나도 따라왔습니다. 실례가 아닐지 모르겠네요.”

    “실례는요. 들어오세요.”

    “홀아비 냄새 나는 방에 뭐 하러. 여기 테라스 좋은데, 뭘. 실장님도 이쪽으로 오세요.”

    마치 자신의 집인 양 우재환은 테라스 한쪽에 펼쳐진 파라솔 아래로 하도섭까지 이끌고는 자연스레 앉았다.

    “갑자기 어쩐 일이야? 그리고 뭘 또 이렇게 많이 사 왔어?”

    “집들이 왔는데 빈손으로 올 수 있어야지.”

    “집들이? 나 그런 거 하겠다고 한 적 없는데?”

    “이사를 했으면 당연히 집들이를 해야지.”

    “스케줄 봐서 부르려고 했지. 너가 좀 바쁜 놈이야?”

    “그래서 내가 온 거야. 그리고 어차피 형이 한 요리라면 안 먹어. 그래서 먹을 것도 우리가 사 왔어. 잘했지?”

    “그래, 잘했다.”

    “근데 이사했다고 하더니 또 옥탑방이야?”

    “옥탑방이 어디가 어때서?”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낭만이 있잖아, 낭만이.”

    “그렇죠. 배우들에겐 옥탑방도 나쁘지 않죠. 옆에 사람이 없으니 대본 연습하기도 좋고. 또 지금 아니면 언제 옥탑방 살아 보겠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은근히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의 모습에 우재환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소식 들었어. 형, 그 드라마 캐스팅됐다며? 이러다가 해외 진출하고 그러는 거 아냐?”

    “해외 진출은 뭐 아무나 하냐?”

    “왜? 듣자 하니 캐스팅에는 제임스 그분 의견이 많이 반영됐다고 하던데? 그분 눈에 들었으면 해외 진출도 할 수 있지. 안 그래?”

    “맞습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입니다.”

    “그런 거라면 지금 이 정도도 만족합니다. 당장 내일 일이 없어서 뭘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뭘 우울하던 시절 이야기까지 하고 그래. 그때 이야기라면 나도 할 말 많아. 하지만,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갔으니까 이제 앞으로의 일만 이야기하자고.”

    “그래, 그러자.”

    “그럼 형 대본도 받아 오고 그랬겠네? 어떤 내용이야? 뉴스에선 제임스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 드라마 이야기는 통 안 하더라고.”

    “그건 나도 비밀. 나중에 드라마 나오면 그때 봐.”

    “우와, 치사해.”

    “치사하고 자시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근데 너야말로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어, 나 이번에 사극 들어가잖아.”

    “사극? 김준원 작가님 작품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실장님 의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번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어.”

    “아니, 왜?”

    의아해하는 강도열을 향해 우재환과 하도섭은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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