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43화 (143/250)
  • #143. 시작은 화려하게 (3)

    국내 재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이었지만 재경 그룹 김 회장의 모친인 손주옥 여사가 집에서 지내는 모습은 소탈함 그 자체였다. 자식들을 다 출가시킨 뒤 손녀 강희주를 키웠던 그녀는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느 70대 할머니와 달리 나이답지 않은 건강함을 유지한 비결은 바로 운동이었다. 휴일임에도 일찌감치 일어난 그녀는 운동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전에는 나가서 운동을 했지만 이동하는 시간도 아깝고 해서 하나둘 운동 기구를 집안에 들이다 보니 거실이 어느새 헬스장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집으로 개인 트레이너를 부르는 게 낫다고 생각한 그녀는 트레이너가 오지 않는 휴일에도 열심히 운동을 한 덕에 또래들과 비교해도 눈에 띌 정도의 젊음과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거실 한쪽 벽면에 틀어 놓은 뉴스에 시선을 집중하며 마무리 운동을 하던 그녀는 TV화면 한가득 차지한 경우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딱히 뉴스에 나올 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니 십중팔구 안 좋은 일일 거란 짐작이었으나 다행히 걱정했던 일은 아니었다.

    마침 늦잠을 잔 손녀딸 강희주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은 곰돌이가 그려진 원피스 잠옷 차림에 손주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만 입으라 그렇게 말했지만 애착이 있어선지 버리려고 놔둔 것을 다시 주워 온 이후 더는 손댈 수 없었다.

    대신 그걸 입고 있는 손녀딸을 볼 때면 엄마가 없어서 저러나 싶은 마음에 조금 안쓰러워졌다.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은 그녀가 손녀에게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일찍 일어났네. 다 저녁 때나 돼서 일어날 줄 알았더니.”

    “나 조금 있다가 나가 봐야 돼.”

    “민 작가랑 데이트?”

    “할머니는. 내가 무슨 일만 있다고 하면 데이트래. 데이트 아냐. 오늘도 출근해서 서류 봐야 하는데.”

    “무슨 검사가 쉬는 날도 없이 그렇게 일만 해? 죽어라 공부해서 검사가 됐으면 좀 쉬엄쉬엄 일도 하고 그래야지.”

    “그러게. 사건이 조금이라도 덜 일어나면 좋겠는데 말이지. 일 많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많은 줄은 몰랐네.”

    “그럴 바에야 관둬.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고생이야. 네 외삼촌한테 말해서 차라리―.”

    “할머니. 그건 내가 안 하고 싶은데. 일이 힘들고 고되긴 해도 나 즐거워. 나쁜 놈 잡아서 죗값 받게 하는 게 얼마나 보람되는데.”

    손녀딸이 저렇게 나오니 손주옥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손녀딸을 옆에서 지켜봐 온 그녀였다. 손녀딸이 얼마나 검사가 되고 싶어했는지 알고 있으니 더는 권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맏이였던 강희주의 엄마는 자식들 중 누구보다 똑똑하고 예뻤다. 아들이 아닌 게 아까울 정도로 동생인 지금의 김 회장보다 경영 능력이 탁월한 자식이었다. 만약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재경 그룹은 지금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천방지축 같기는 해도 그런 엄마를 쏙 닮은 강희주였으니 그룹 일에는 가까이하지 않는 그녀가 손주옥은 못내 아쉽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나저나 아까 민 작가 뉴스에 나오던데.”

    “뉴스에? 아니, 왜?”

    “둘이 사귀는 사이 아냐? 무슨 일이 있는지 안부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몇 년을 만났는데 도대체 제대로 된 연애는 언제 할 건데?”

    “할머니, 요즘 작가님이나 나나 바쁘니까 연락이 좀 뜸했던 것뿐이지 우리도 만나서 데이트하고 남들 하는 거 다 해. 그만하면 연애지 제대로 된 연애는 또 뭔데?”

    “그거야 네 생각이고. 둘이 만난 지 하루 이틀이야? 몇 년 됐잖아. 그런데도 아직도 데면데면. 그래서 언제 결혼할 건데?”

    “결혼? 나 결혼 생각 없는데.”

    “뭐?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결혼 생각이 없어? 그럼 언제 결혼할 건데? 너 지금 결혼해도 노산이야.”

    “우리 할머니 자식 욕심 많은 건 하여간 알아줘야 해. 손자, 손녀들도 많으면서 그 속에서 증손자까지 보시려고? 죄송하지만 전 결혼 생각 아예 없어요. 지금 딱 좋은데 굳이 결혼까지 할 필요 뭐 있어?”

    “지금이야 좋지. 근데 조금만 더 늙어 봐. 남들은 다 결혼해서 남편에 자식에 손자까지 있는데 너 혼자면 얼마나 쓸쓸해. 젊어서야 그런 거 모르겠지. 그렇지만 영원히 젊을 것도 아니고 너도 금방 늙어.”

    “나이 들어도 혼자 사는 거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살아 보지도 않았으면서.”

    “할머니 있잖아. 나랑 같이 살기는 해도 만날 늦어서 할머니 얼굴도 못 볼 때가 더 많잖아. 다른 자식들 있어도 다들 자기 일 바쁘다고 기껏해야 전화가 전부고. 할머니처럼 다 큰 손녀딸이 얹혀살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경제력만 빵빵하면 혼자 늙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할머니 정도면 괜찮잖아?”

    “그거야―.”

    “할머니 말마따나 결혼 안 해 봤는데 행복할지 어떻게 알아. 지금이야 민 작가님 좋지만 솔직히 연애하고 결혼은 다르잖아. 민 작가님이나 나나 자기 일 바쁜데 지금처럼 가끔 만나서 데이트하고 그게 딱 좋아. 그러니까 괜히 민 작가님한테도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할머니.”

    한번 고집을 부리면 고래 힘줄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손주옥은 더 뭐라 하지 못했다. 혹여나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제 엄마의 결혼 생활을 아는 탓일까 싶어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희주가 해맑은 표정으로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작가님이 뉴스에 왜 나왔는데?”

    결혼은 싫다면서 다른 일에 관심이라곤 없는 손녀가 경우에게만큼은 관심을 보이는 모습에 손주옥은 그만 웃고 말았다.

    * * *

    뉴스에 나온 대로 <열세 번째 달>의 남자 주인공 오디션이 열리는 대학로가 북적였다.

    경우는 오디션을 위해 대학로에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소극장을 통째로 빌렸다. 아무래도 미국의 유명한 쇼러너 제임스 로이건이 처음으로 연출을 맡은 한국 드라마였으니 오디션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건 당연지사.

    진짜 배역을 얻기 위해 지원하는 배우들도 많았겠지만 호기심에, 혹은 제임스의 팬이라 그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지원한 사람들도 있을 게 분명했다.

    해서 경우는 1차와 2차 오디션까지 하기로 결정, 스튜디오 글로리 소속 직원들을 동원해 어느 정도 싹수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잘라 냈다. 그랬는데도 참가 인원이 많은 탓이었는지 최종 3차 오디션까지 살아남은 수도 상당했다.

    이미 이틀에 걸쳐 비중 있는 조연과 여자 주인공의 오디션을 치른 후라 그런지 오디션에 참여한 스탭진들은 첫날과 달리 조금은 지친 얼굴이었다.

    자신들도 이러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연기를 봐야 하는 제임스는 얼마나 힘들까 싶은 경우는 제임스가 걱정이 되었다.

    “컨디션 어때? 힘들지는 않아?”

    “힘들긴, 오히려 배우들의 기운을 팍팍 받아서 그런지 힘이 펄펄 나는데.”

    그의 말마따나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경우와 달리 제임스의 얼굴은 반짝이고 있었다. 이 일이 리프레쉬라는 그의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경우야말로 괜찮아? 얼굴이 장난 아닌데?”

    “이틀이나 오디션을 봤으니까.”

    “No, No. 그게 아니야. 내가 봤을 땐 경우는 workaholic 중에서도 극강이야. 본인 스스로가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이번 일만 해도 그래. 드라마 하나에만 집중해도 힘든데 미국 드라마 리메이크까지 준비하고 있잖아.”

    “그거야-.”

    “그거 중독이야. 그러다 큰일 난다고.”

    “아, 제임스가 술 마시는 것처럼?”

    “Oh, shit!”

    되받아치는 경우에게 제임스는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농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지만 제임스의 말마따나 경우는 일중독이었다.

    1, 2차 오디션이 진행되는 동안 경우는 드라마 리메이크 문제로 서필진을 비롯한 스튜디오 식구들을 불러 놓고 릴레이 회의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어제 서필진이 미국으로 돌아갔으니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이제 곧 미국에서 드라마를 제작할 계획이었다. 준비 기간을 생각해도 이번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곧장 미국으로 날아가야 할 판이었다.

    결국 일하느라 올 한 해도 정신없이 지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싫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즐거워지는 게 확실히 중독이지 싶었다.

    어쨌든 모든 준비가 끝나고 첫 번째 참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긴장한 채 꾸벅 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을 시작으로 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고도 장장 사흘에 걸친 오디션을 더 본 후에야 모든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 * *

    “그래서 여기가 유명한 맛집이라 이거지?”

    긴 시간 이어진 오디션 일정을 마친 경우는 제임스에게 한국의 맛을 전해 주기 위해 인사동을 찾았다. 생각보다 빡빡한 일정에 그동안 제대로 된 저녁을 대접하지 못했다.

    마침 날씨도 꼭 비가 올 것 같아 이런 날에는 막걸리에 파전이 제격이란 생각에 그를 인사동으로 이끌었다. 특히 인사동에서 먹는 파전 맛은 남다를 테니.

    “한국식 와인 맛이 좋은 곳이지. 나도 지인한테 추천받아 가끔 오는 곳이거든. 술 맛도 음식 맛도 분위기도 아주 좋아.”

    한국에 온 뒤로 현대적인 것들만 봐 온 제임스의 눈에 식당 분위기는 확실히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이리저리 돌아보며 주변을 살펴보던 제임스는 ‘원더풀’, ‘뷰티풀’을 외치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곳에 그를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무렵 경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으니.

    “누나? 거기다 형님? 도대체 이 조합, 뭐지?”

    식당 구석진 곳에 익숙한 두 얼굴이 있는 탓이었다. 바로 누나인 민지선과 안청모였으니.

    “두 사람 여기서 뭐 해?”

    “저, 민 작가…… 그게,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눈에 띄게 당황하는 안청모의 모습에 경우는 그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순식간에 빨개진 얼굴, 평소와 다르게 더듬는 말투, 방황하는 눈빛,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았다. 거기다 평소라면 포커페이스의 누나마저도 당황한 눈치였으니 대답을 재촉하는 경우의 눈빛에 결국 민지선이 입을 열었다.

    “다 눈치챘으면서 뭘?”

    “그래서? 두 사람 언제부터 사귄 건데? 혹시 이전부터 나 몰래 둘이-.”

    “아니야! 그건 아니야. 지난번에 민 작가가 같이 저녁 먹다가 가 버리는 바람에 이야기를 해 보니까 생각보다 얘기가 잘 통하고. 어, 또…….”

    “뭘 그렇게 변명하듯이 그래요. 우리가 뭐 죄졌어요? 이봐, 동생! 상황 파악 끝났으면 자리 좀 비켜 주지? 보니까 손님도 기다리는 눈친데?”

    당황한 것도 잠시, 원래의 페이스를 되찾은 민지선에게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하는 수 없이 뒤에서 무슨 일인지 멀뚱멀뚱 보고 있는 제임스를 데리고 될 수 있는 한 누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을 가르쳐 준 것도 안청모였다.

    이전 생을 떠올리면 안청모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일에만 몰두했고, 정략 결혼을 했던 민지선은 결국 이혼을 선택했으니 이로써 두 사람의 운명이 조금은, 그것도 괜찮게 바뀌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아…… 아무리 그래도 형이 아까운데…….”

    “저 두 사람, 사랑하는 사인가?”

    혼자 중얼거리던 경우는 제임스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보여?”

    “어, 아주 잘 어울려. 여자 포스가 장난 아니라 남자가 끌려다닐 것 같긴 하지만 그래서 더 잘 맞을 것 같아.”

    외국 사람 눈에도 누나가 기가 센 게 느껴지나 싶은 경우는 혀를 내둘렀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은 외국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보다 방송국을 인수했다면서?”

    “한국 온 지 얼마나 됐나고 그런 것까지 다 아는 거야?”

    “경우는 모를 테지만 내가 생각보다 호기심이 많거든. 듣자 하니 뒷이야기도 쏠쏠하던데?”

    결과만 아는 게 아니라 그게 어째서 일어났는지까지 제임스는 알고 있었다. 확실히 그의 통역으로 붙여 준 다니엘 핸더슨의 역할이 컸다.

    통역은 아무래도 말하는 걸 힘들게 느끼지 않아야 할 것 같아 전에 번역을 맡겼던 여러 미국 유학생들 중에 그를 선택한 거였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그 뒤에 경우가 어떻게 할 건지 그것도 궁금한데 말이야.”

    마치 먹잇감을 앞둔 맹수처럼 재밌는 이야기라면 그게 뭐가 됐든 달려드는 제임스의 모습에 경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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