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42화 (142/250)
  • #142. 시작은 화려하게 (2)

    송일 그룹의 송미디어가 새명 홈쇼핑에 완전히 매각된 뒤 S&Media로 이름을 바꿨다. S&Media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중 대표적인 게 임장효 전무가 사장으로 전격 취임한 것이었다.

    오너가 바뀐 이상 재벌 일가가 경영 전반에 나서며 요직을 차지하지 않을까, 새명의 스피커가 되어 새명의 입맛에 맞는 방송으로 변질되지 않을까 했던 우려는 임장효 사장 취임 후 빠르게 사라졌다. 그런 걱정을 할 시간도 없었던 게, 그가 취임한 후 방송은 물론 회사 내부 전반의 개편을 단행한 탓이었다.

    무엇보다 성과를 중시한 임장효 사장은 연공서열 문화를 없애고, 말단 PD라도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프로그램 제작에 적극 반영하도록 시스템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 덕에 좋은 프로그램들이 계획되기 시작했고 QVN을 비롯한 S&Media의 전반적인 기업 이미지도 향상되었다.

    특히나 이런 변화는 S&Media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으니 노력만 하면 임장효 사장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된 셈이었다.

    그런 와중에 ‘스튜디오 글로리’ 소속이었던 안청모 PD가 S&Media로 자리를 옮겼다.

    S&Media의 제작기획국 국장 최태영이 스카우트 형식으로 직접 요청한 것이었다. 사실 안청모가 같은 연차의 다른 PD들에 비해 연출의 경험이 부족했지만 얼마 전 <뷰티풀 라이프>를 제작하며 함께 일해 본 최태영 국장은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송지현 작가가 <뷰티풀 라이프>를 쓰면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해 조금이라도 더 기획 의도에 맞게 연출을 하려 노력하는 게 그의 눈에 보였다.

    MBS에 입사 후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워 올라온 그였다. ‘스튜디오 글로리’로 넘어와선 기획, 제작에도 참여했으니 예능 PD 출신인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꿔 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거기다 남들은 꺼리는 사고 경험도 최태영에게는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돌발 변수에 대처할 수 있는 경험치로 보였다.

    물론 무시할 수 없는 문제도 하나 남아 있었으니, 바로 경우. 지금은 나서지 않으며 몸을 사리고 있지만 어쨌든 새명에서 S&Media를 인수한 것도 어떻게 보면 경우 때문이었다. 그런 경우와 친밀한 안청모를 가까이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나쁠 건 없다는 계산도 작용했다.

    사실 그 점은 경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S&Media 내부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 둬야 회사 내부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까. 해서 의견을 물어오는 안청모에게 경우는 이직을 적극 권장했다.

    물론 그런 여러 이유 때문에 자신이 S&Media에 왔다는 사실을 안청모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새로 옮긴 자리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지난번 드라마 <뷰티풀 라이프>를 통해 같이 일을 한 이들이 있어서 적응하는 데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걱정했던 텃세도 없었고, 사장이 바뀐 뒤로 회사 분위기가 바뀐 건지 원래 분위기가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았다.

    새롭게 자리를 옮기느라 정신없는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소식 들었다. 지 앞가림도 못하는 코찔찔이가 제작 총괄 프로듀서? 회사 옮기더니 너무 승승장구하는 거 아니냐?]

    “선배님, 설마 지금 부러워하시는 겁니까?”

    [그래, 엄청 부럽다. 요즘 시청률 터지는 드라마는 죄다 SBC에서 하고 있잖아. 우리 쪽 완전 초상집이라 분위기도 영 안 좋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회사 나가는 건데.]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십시오. <뫼비우스>나 <마르스> 같은 대작이 없어서 그렇지 평타는 쳤잖아요. 그리고 제가 한 말 뭘로 들으셨습니까? 국장까지 꿰차셔야 한다니까요. 그래야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하는 드라마 편성을 받죠.”

    [뭐야? 너네 방송국 새명 밑으로 들어간 거라며. 그럼 앞으로 스튜디오 글로리가 S&Media 드라마 전담해서 제작하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일 몰아준다고 문제 삼을 걸요? 형평성 문제도 있으니까 아마 전담해서 제작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선배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민 작가 인재 욕심이 많아서 스카우트한 작가들 꽤 돼요. 그 작가들 놀고먹게 할 사람입니까, 민 작가가?”

    [하긴,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우리 쪽 드라마 제작하면 좋지. 이왕이면 민 작가가 쓴 드라마를 제작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SBC하고 프로젝트를 한다고 해서 국장님이 얼마나 아쉬워하고 있는데?]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SBC랑 틀어져서 당분간은 그쪽하고 일 안 할 것 같던데요.”

    [그래? 확실하지?]

    “네. 근데 그렇다고 바로 들이대지는 마세요. 지금 민 작가 새 드라마 들어간다고 정신없으니까.”

    [나도 그만한 눈치는 있거든? 너는 나를 너무 띄엄띄엄 봐. 그래도 네가 있어서 소식 전해 들으니 그거 하나는 좋다. 잘 지내지?]

    “지금 통화한 지가 언젠데 이제야 묻는 겁니까? 지금은 저도 정신 없으니까 나중에 자리 잡히면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오냐, 대신에 그놈의 껍데기집 좀 그만 가자. 보니까 연봉도 많이 받더만. 이왕이면 소고기로 쏴라. 알았냐?]

    “네,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뒤 안청모는 최태영의 호출에 그의 방으로 불려 갔다. 회사 옮기자마자 일이라고 QVN은 물론 XCN의 드라마 편성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었으니 생각보다 안청모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다.

    * * *

    세상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게 제임스의 얼굴은 황당 그 자체였다.

    “듣기론 한국은 16부작 드라마를 거의 작가 한 사람이 다 쓴다며?”

    “거의 대부분이. 혼자서 쓰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일일 연속극은 넷까지 같이 쓰는 건 봤어. 보조 작가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혼자 쓰는 편이지.”

    “작년에도 드라마 썼다며? 근데 올 초 방송된 대만 드라마까지 참여했으면 도대체 언제 쉬는 거야?”

    제임스의 말에 생각해 보니 거의 쉰 날이 없었다.

    박종연과 영화를 찍을 당시 술에 취해 비 맞으며 시장에서 잠들었다가 입원했던 며칠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일요일도 없이 계속 일을 해 왔던 셈.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그렇게 일하라고 하면 엄두가 나지 않을 텐데, 좋아하는 일이고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에 힘든 줄도 모르고 일을 해 왔다.

    “한국 사람들은 ‘eager beaver’라고 하더니 진짜 그런 줄 몰랐어.”

    제임스의 말에 어쩐지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비버가 떠오른 경우는 살짝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야. 그렇게 일하다가는 아이디어도 바닥나고 결국 번아웃이 돼서 일을 못 하게 될 거야. 나라고 그런 경험이 없는 줄 알아? 그러니까 쉴 줄도 알아야지.”

    “고마워. 새겨들을게.”

    “근데 진짜로 대만 드라마는 언제 한 거야?”

    “내가 말했잖아. 아시아에서 한국 드라마는 제법 인기가 높다고 말이야. 그쪽에서 먼저 의뢰가 들어왔어. 예전에 써 둔 대본이 있어서 현지에 맞게 조금 수정을 했지.”

    “그 드라마는 무슨 내용인데?”

    <귀월鬼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흥미롭게 듣고 있던 제임스가 낮게 투덜거렸다.

    “도대체 이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기에 그런 드라마가 술술 나오는 거지?”

    “미안한데, 아무리 궁금해도 열어 보겠다는 끔찍한 생각은 하지 말아 줘.”

    경우의 말에 제임스가 크게 웃었다.

    회의가 끝난 뒤라, 경우의 안내로 ‘스튜디오 글로리’ 이곳저곳을 살펴본 제임스는 역시 편집실에 큰 관심을 보였다.

    작가가 연출에 관여하지 않는 한국의 특성을 고려해 경우는 크리에이터라는 표현을 썼지만 미국에선 쇼러너라는 말이 더 일반적이었다. 프로그램 제작 전반에 총 책임을 지는 ‘Executive Producers’로 대본 집필은 물론 연출, 제작까지 총괄하는 사람을 일렀으니 제임스가 쇼러너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크리미널 리포트>의 대본 집필은 물론 시즌1의 연출까지 맡았던 그는 작가일 뿐 아니라 실력 있는 연출가였으니 편집실에 관심을 두는 건 당연했다.

    “생각보다 시설이 아주 좋은데? 한국 처음 와서 느낀 거지만 미국보다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어떤 면에선 미국보다 앞섰다는 느낌이 들어.”

    “좋게 봐 주니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뭔데?”

    경우의 물음에 마침내 결심을 했다는 듯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의 연출을 내가 맡을 순 없을까?”

    “뭐?”

    “아까 경우가 설명해 준 걸 들어 보니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어. 아직 연출을 맡을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것 같은데 괜찮다면 내가 해 보고 싶어. 어떻게 안 될까?”

    “제임스, 이거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야. 몇 달을 한국에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된다면 <크리미널 리포트>는? 혹시 대본 작업 다 끝났어? 연출은 이제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쉼 없이 일했다고. 그래서 올 1년을 좀 쉬기로 했어. 경우도 말했다시피 일 시작하면 몇 달은 금방 사라지잖아.”

    “그럼 쉬어야지. 왜 여기까지 와서 일을 하려고 하는 건데? 리프레쉬가 필요하다며?”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이런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게 바로 리프레쉬지.”

    처음 제임스 로이건을 만났을 때 어쩌면 이런 날을 예상했는지 몰랐다. 다만 그날이 더 빨리 왔음을 경우는 실감했다.

    “어쩔 거야? 여기 보스는 경우니까 무조건 경우 말을 따르겠어. 정 안 된다고 하면 울면서 뉴욕으로 돌아갈 수밖에.”

    “그럼 가는 길 비행기표는 내가 끊어 주겠어.”

    그게 거부의 표현이라 생각한 제임스는 살짝 실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일단 비자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거겠지? 워킹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나? 내가 그쪽엔 아는 게 없어서 말이야. 아참, 드라마 끝날 때까지는 뉴욕에 못 가. 가고 싶다고 울어도 소용없으니 각오 단단히 해.”

    “당연하지.”

    맥이 탁 풀린 듯 제임스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 진짜. 뭐야? 난 또 비행기표 말하길래 돌아가라는 건 줄 알았잖아.”

    “언젠간 가겠지. 일 끝나면 말이야.”

    “하하,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나야말로 고맙지. 안 그래도 연출을 누구에게 맡길까 고민했었거든. 제임스 로이건이 우리 드라마 연출을 맡아 주겠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딨어? 거절 안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경우의 대답에 제임스는 무척 좋아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열세 번째 달>로 이끌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우는 연출자까지 정해졌으니 그 이후를 생각하고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휴식이 중요하다고 했던 제임스가 연출을 맡은 탓에 경우의 일이 더욱 많아지고 말았다.

    제일 먼저 제임스의 귀와 입이 되어 줄 통역사를 구해야 했다. 경우는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문화적 차이를 겪을 제임스에게 그런 것들을 제대로 설명해 줄 사람이 나을 것 같았다. 해서 한국에 유학을 온 미국 학생들 중 지난번 한국 드라마 번역을 도왔던 이에게 통역을 의뢰했고, 다행히 성사가 되었다.

    거기다 연출을 맡는 건 그였지만 여기는 미국이 아닌 한국. 미국에 있는 그의 연출진을 데리고 올 상황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연출 이하의 스탭들은 방송이 될 QVN과 스튜디오 글로리의 스탭들로 구성해야 했으니 제임스의 의견을 들어 가며 연출진을 구성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번 드라마가 S&Media를 인수하고 시작하는 첫 번째였으니만큼 경우는 화려하게 시작하고 싶었다. 마침 제임스 로이건과 함께 일하게 되었으니 경우는 제임스의 의사를 물은 후 이번 일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로 했다.

    며칠 뒤 <크리미널 리포트>로 유명한 제임스 로이건이 QVN의 새로운 드라마 <열세 번째 달>을 연출한다는 보도가 나가자마자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대부분이 비슷했다.

    미쳤다!

    그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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