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41화 (141/250)
  • #141. 시작은 화려하게 (1)

    TV를 보는 구연하에게 엄마가 배를 포크로 찍어 건네줬다. 달큰한 배를 한입 가득 문 구연하가 감탄했다.

    “이 배는 참 맛있네. 요즘 배는 예전 같지 않던데.”

    “그치? 과일 가게 은수 엄마가 배 좋은 거 들어왔대서 한 박스 사 왔지. 우리 작가 선생님 배 좋아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구연하가 잠시 바라봤다.

    “왜? 엄마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냥…….”

    구연하는 배를 좋아했지만 다른 식구들은 사과를 좋아한 탓에 집에서 배를 먹어 본 지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 박스나 샀다니 놀랄 노자였다.

    “엄마, 내 블라우스 세탁소에서 안 찾아왔어?”

    방에서 구은희가 짜증을 내며 나왔다.

    “미안, 깜빡했네.”

    “아, 내일 입고 가려고 했는데. 야, 구연하 세탁소 갔다와.”

    “그럴 거면 네가 퇴근할 때 세탁소에 들르지 그랬어. 하루 종일 회사에서 글 쓰다 와서 피곤한 애한테 심부름은 왜 시켜?”

    “엄마!”

    “네 옷이지, 연하 옷이야? 운동 겸해서 지금 다녀오면 되겠네. 너 요즘 옆구리에 살쪘더라. 운동 삼아 얼른 갔다와.”

    잠시 엄마와 동생을 째려보던 구은희가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배를 포크로 찍어 구연하에게 쥐어 줬다.

    “많이 먹어. 잘 먹어야 글도 쓰지.”

    재작년 <다잉 메시지>가 첫방을 타자마자 엄마의 전화가 불이 나기 시작했다. 사돈의 팔촌은 물론이고 연락이 끊겼던 고교 동창까지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해 대는지 구 작가의 엄마는 태어나서 그런 유명세는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구 작가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로 달라졌다.

    공부 잘하고 그 어렵다는 사법 시험에 붙어 집안의 자랑이었던 첫째 딸 구은희가 동네 스타였다면 구연하는 전국구 스타였던 셈. 솔직히 모르는 사람도 <다잉 메시지>라고 하면 알 정도.

    한창 방송이 나갈 때는 <다잉 메시지>를 쓴 작가가 내 딸이라고 하면 보는 눈이 달라졌고 시장에선 덤도 더 얹어 줬다. 그러니 반 백수나 다름 없이 제 방에서 틀어박혀 있던 골칫덩이 딸이 다르게 보일 수밖에.

    한동안은 얘가 뭐가 되려고 그러나 걱정되는 마음에 용하다는 점집에 찾아갔는데 크게 될 거라고 했던 말에 말도 안된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상을 엎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재수 옴 붙을까 봐 대거리도 못 하고 돌아와 복채만 뜯겼다며 아까워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다 맞는 소리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둘째에게 더 잘해 줄걸. 그런 줄도 모르고 걱정되는 마음에 구박만 했던 게 엄마는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어쨌든 전세가 역전된 상황이라 고료 받으면 독립을 하겠다 마음 먹었던 구연하의 생각도 바뀌었다. 공주처럼 대접 받고 사는 게 이런 거였구나 싶은 게 굳이 돈 드는데 나가 살 필요 뭐 있나 했던 것이다. 눈앞에서 구은희가 당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이제야 내가 그동안 느꼈던 심정을 느끼겠지 싶은 그때, 엄마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우리 작가 선생님, 다음 드라마는 언제 나와? 시장 가면 아줌마들이 자꾸 물어. 다음 드라마 언제 나오냐고.”

    “음, 내년 초쯤?”

    “정말? 지난번엔 언제 나올지 모른다고 하더니.”

    “어, 우리 작가…… 아니, 대표님이 그러셨어. 지금 쓰고 있는 거 조금만 다듬으면 내년 초쯤 방송하면 좋을 거라고. 이번엔 공동 작업 아니고 단독이야.”

    “그래? 정말 잘됐다. 그럼 돈도 안 나눠 갖는 거지?”

    “당연하지. 근데 지난번에도 그렇게 적게 받은 거 아냐. 우리 대표님이 직원들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데.”

    “그럼, 그러니까 그렇게 큰 회사도 하고 그런거지. 근데 어디서 나와? 지난번처럼 SBC? 아니면 MBS?”

    “음…… 이번엔 지상파는 아니고 케이블이야. XCN.”

    “XCN? 거긴 어디야?”

    “어…… 아, 전에 엄마 잘 본 드라마 있잖아, <뷰티풀 라이프>. 거기랑 같은 회사야. 영화 전문 채널이긴 한데 장르 드라마도 영화처럼 만들어서 장르 드라마랑 영화 전문 채널로 바꾼다고 하더라고.”

    “드라마 만드는 회사에서 그렇게 방송국도 쥐락펴락하는 거야? 너네 회사 대단하다.”

    “그런가?”

    “그래. 그러고 보니까 그때 그 드라마 참 재미있게 봤는데. 그래, 맞다! 뉴스 보니 그 드라마 미국에서 뭐 한다고 하던데…… 뭐더라?”

    “엄마는 어떻게 내가 모르는 것까지 다 알고 있어?”

    “밖에만 나가면 아줌마들이 작가 선생님 엄마라고 얼마나 물어보는데. 그래서 내가 일부러 공부까지 하잖아.”

    “공부? 무슨 공부?”

    “너네 회사 블로그 있는 거 몰랐어? 거기 회사 소식 자세히 나와 있던데?”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에 구연하는 눈이 휘둥그레졌으니 곧바로 엄마가 말한 블로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한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소개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일정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덕분에 엄마가 말한 공부라는 게 뭔지 구연하는 알 수 있었다.

    특히 <뷰티풀 라이프>에 대한 소식에 눈이 뒤집어 졌다.

    “뭐? 미국에서 리메이크 된다고?”

    * * *

    특별한 것 없이 말이 초원을 달리는 게 거의 전부인 다큐멘터리의 시청률이 대박이 났다는 해외 토픽에 전세계 방송 관계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든 자극적인 요소들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려 했던 그들은 이미 그런 자극에 시청자들이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사람들이 원한 건 정말 휴식을 취하고 힐링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 사람들이 선호했던 한국 드라마가 <뷰티풀 라이프>였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다른 드라마를 제치고 리메이크 할 드라마로 <뷰티풀 라이프>가 결정되었다. 외국 드라마를 보면 서양 쪽은 거동이 불편해질 정도가 되면 요양원 같은 시설에 많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라고 그런 생활에 만족할까?

    어쩌면 치매 환자들과 공존을 택한 <뷰티풀 라이프>가 미국 사람들에게도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이 많았으니 큰 틀은 그대로 진행하되 세세한 부분은 조금 더 미국 현실에 맞는 각색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서필진이 한국을 찾았다. 그가 오랜만에 한국을 간다는 소식에 동행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제임스 로이건.

    <크리미널 리포트> 제작으로 바쁜 줄 알았던 그가 예고도 없이 등장한 그 탓에 경우가 놀란 건 당연지사였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친구를 만나러 오는데 굳이 연락할 필요가 뭐 있어. 될 수 있으면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고. 뭐, 다행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군.”

    “잘왔어, 제임스. 이제 술은 완전히 끊었나 봐. 얼굴이 아주 좋아졌는데?”

    “드라마 반응이 좋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미스터 서한테 들었는데 직접 미국 드라마를 제작한다면서?”

    “왜? 불안해? <크리미널 리포트>보다 더 인기 있는 드라마를 만들기라도 할까 봐?”

    “그럴 리가. 경우가 능력 있는 작가라는 건 인정해. 하지만 미국은 엄연히 한국과 다른데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거야.”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여유있는 미소에 제임스는 머리를 짚었다.

    “그래, 경우 말이 맞아.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해. 어쨌거나 지난번 일도 그렇고 매번 도와줘서 고마워. 경우 덕분에 좋은 배우를 알게 돼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어.”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 거지.”

    “인연?”

    “음,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말하는 건데 동양 사상을 덧붙이자면 제임스와 준은 언젠가는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다는 거지. 그렇게 정해진 운명을 내가 살짝 도운 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은데.”

    “오, 그게 바로 동양의 사상인가? 알겠어.”

    “근데 정말 한국엔 어쩐 일이야? 드라마 제작하느라 바쁜 거 아냐?”

    “지금은 휴식 기간. 경우도 알다시피 지금껏 쉼 없이 일만 했잖아. 리프레쉬가 필요했어. 마침 미스터 서가 한국을 간다고 해서 따라왔지. 한국만큼 리프레쉬가 적당한 장소는 없을 것 같아서. 지난번 경우가 내게 보여 준 드라마들 내겐 충격이었지. 그래서 이왕이면 어떻게 제작하는지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

    “물론. 제임스도 대본 회의를 보여 줬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것 없지.”

    경우는 그 길로 ‘스튜디오 글로리’ 식구들에게 제임스 로이건을 소개했다.

    ‘올웨이즈’ 덕분에 그가 만든 <크리미널 리포트>를 봐 왔던 사람들은 마치 연예인을 보는 듯 제임스를 반겼다. 함께 사진도 찍어 주며 제임스 역시 팬 서비스를 확실히 하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른 송지현 역시 여고생으로 돌아간 듯 제임스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아, 한국 사람들은 다들 열정이 넘치는군.”

    “이 정도로 제임스 인기가 좋은 줄 몰랐네. 영화배우가 내한한 줄 알았다고.”

    “놀리는 것도 정도껏 해. 이러단 정말로 다음 시즌에 내가 출연할지도 몰라.”

    환영 인사는 그 정도로 하고 경우와 제임스는 회의에 참석했다. 세부 회차 플롯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 안 끝났으니 그 부분에 대한 회의를 거쳐야 했다.

    소수 정예로만 이뤄진 회의에 외부 사람이 참가한 탓에 평소보다 더 신경이 쓰였을 법도 하건만 그 사람이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한 덕에 부담감을 살짝 덜었다.

    덕분에 작가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의견을 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경우가 통역을 해 줘야 한다는 불편이 있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메시지가 뭔데?”

    “혹시 과거에 해결하지 못한 그래서 내내 후회되는 일을 바로 고칠 기회가 온다면 어떻게 하겠어?”

    “바로잡아야지. 당연한 거 아냐? 다들 그렇게 하지 않아?”

    “근데 그렇게 하면 현실에서 얻은 행복이 사라질 수 있어. 그래도 바로잡을 거야?”

    “현실의 행복?”

    “생각해 봐. 과거가 바뀌었는데 현재가 그대로일까? 과거가 조금만 달라져도 현재는 엄청나게 많이 바뀌지. 나비효과라고 하잖아. 자, 다시 물어볼게. 제임스는 어떻게 할 거야?”

    “확실히 고민이 되네. 그럼 난 과거를 바꾸지 않을래. 과거에 얽매이는 것보다 나한텐 현재가 중요하니까.”

    “그럴 줄 알았어.”

    “그럼 경우는?”

    “글쎄. 작가의 입장에서 결정하는 거라면 어렵지 않지만 한 인간으로서 하는 결정이라면 쉽게 내리진 못하겠어.”

    <열세 번째 달>.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었다.

    두 사람은 12월 31일 한 해가 마무리되는 날 두 사람만의 특별한 결혼을 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날 불행히도 사고로 남자가 죽었다.

    떠난 남자를 그리워하며 여자는 슬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옅어지는 법.

    오랜 시간이 지나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났고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마음속 한 켠에 남자를 향한 그리움이 있었으니.

    남자가 죽은 지 8년이 지난 후, 지구 가까이 소행성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8년 전 죽은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다.

    어쩌면 남자를 살릴 수 있는 기적 같은 시간.

    하지만 남자를 살리면 아무것도 모르는 과거의 자신은 남자와 그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될 테고 그럼 지금의 이 가정은 사라진다.

    내 목숨보다 소중한 내 아들이 사라질 수도 있는 일.

    이 드라마는 묻는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거냐고?

    회의가 끝이 난 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무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제임스가 씩씩대며 경우에게 달려들었다.

    “근데 경우, 도대체 대만 드라마는 또 언제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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