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반격 (5)
전효상이 떠난 국장 자리를 최지연이 차지한 후 혼란스러웠던 SBC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그녀는 편성 문제로 갈등을 겪었던 경우를 불렀다.
전효상을 밀어낼 구실로 그를 이용했을 뿐 사실 방송국 입장에서 ‘스튜디오 글로리’는 괜찮은 파트너였다. 매번 시청률도 평타 이상이었고 광고 수익도 확실히 보장해 줬으니까.
물론 다른 제작사들의 입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방송국은 갑이고 제작사는 을이니 방송국이 결정하면 따라야 하는 게 그들이었다.
아무튼 최지연은 이용할 만큼 이용해 필요한 걸 얻었으니 스튜디오 글로리와의 관계를 다시 원상복귀하는데 집중했다.
다행히 대표로 있는 김종수가 SBC출신이기도 했고 경우가 작가로 일한 지 몇 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살살 달랜다면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최지연은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경우를 대했다.
“새로 국장에 취임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듣자 하니 아주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SBC와 여러 편 작업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얼굴 마주하긴 처음이네요.”
“연이 없었나 보죠.”
“우선 전임 전효상 국장의 일방적인 편성 취소에 관해서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그 문제는 저희 SBC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누가 들으면 다 된 밥상 전효상이 엎은 줄 알겠네.
이미 정명도에게 전후 사정을 들은 경우는 일단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제가 듣기론 전효상 국장이 지방으로 발령나면서 편성도 취소된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습니까?”
“그럴리가요. 사실 전효상 국장이 너무 무리를 했어요. 시청자들이 <마르스> 후속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보니 올해 안에 편성을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마침 김준원 작가로부터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고 남은 편성은 스튜디오 글로리에게 약속한 4분기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저희 쪽과의 약속을 취소했다 이 말씀이죠?”
“네. 전임 국장이 그만둔다고 해서 그가 진행했던 일까지 중단되는 건 아니니까요. 구두 약속도 엄연한 약속인데 이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취소할 리 없잖아요.”
“그렇죠.”
“전효상 국장이 같은 시간대에 이중으로 편성을 잡은 게 결국 드러나면서 문제가 불거졌고 책임지는 차원에 지방 발령을 받았던 겁니다.”
“아…… 그렇게 된 거였군요.”
“어쨌든 이렇게 돼서 유감입니다. 오해가 풀렸길 바랍니다.”
“오해랄 게 뭐 있겠습니까? 편성 취소야 비일비재한 일인데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저희가 고맙네요. 그래서 말씀인데 편성이 취소되긴 했지만 스튜디오 글로리만 괜찮다면 편성을 다시 잡았으면 하는데요. 내년 1분기가 딱 좋을 것 같은데…….”
은근히 기대하는 낯이었지만 경우는 그 기대감을 산산이 부셔버릴 생각이었다. 물론 한껏 미안해하는 얼굴로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아, 이걸 어쩌죠? 이미 다른 방송국이랑 편성을 약속했는데요.”
“네? 벌써요?”
“네, 아시다시피 저희 쪽에서 내놓은 작품마다 항상 화제는 물론이고 시청률에 광고 수익까지 짭짤하다 보니 편성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에 가만 놔두질 않더군요.”
“하하. 그러시겠죠.”
분명 웃는 낯이었으나 입꼬리가 살짝 떨리는 걸 경우는 분명히 보았다.
거절당할 거라 생각 못했는데 거절당해서 당황했겠지. 방송국은 항상 갑이었고 제작사는 편성에 목매는 편이었으니까. 지금 당장 아쉽지만 제작사는 많고 이번이 아니라도 언제든 다시 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경우는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간접적이라면 몰라도 앞으로 그가 직접적으로 SBC와 일할 생각은 없었다. 기회를 차 버린 건 그들이었으니 이번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도록 해 주고 싶었다. 마침 하늘이 돕는지 시기도 적당해 이참에 회귀자의 능력을 제대로 써 볼 생각이었다.
* * *
우선 <열세 번째 달>의 작가진을 불러 모은 경우는 지금의 현 상황을 작가들에게 설명했다. 특히 집필을 맡은 이시연, 곽선미 작가의 낯빛이 어두웠다. 당연히 자신들 탓에 편성이 취소되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괜한 오해부터 풀어야 했다.
“그동안 제가 너무 밉보인 모양입니다. 이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두 분 작가님은 우선 대본 집필에 집중해 주셨으면 해요. 8부까지는 세부 시놉이 나왔으니까 일단 1화 대본을 쓰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너무 간단하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듣자 하니 협회에서 작정하고 버릇 들이려는 것 같던데.”
걱정되는 마음에 입도 벙긋 못하는 다른 작가들을 대신해 송지현이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이 바닥에서 일한 지가 몇 년인데요? 가만히 있어도 들리는 소리들이 있죠. 어쨌든 지금 같이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선 다른 방송국에서 편성 잡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점에 있어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앞으론 이런 문제가 없도록 특단의 조치를 취할 생각이거든요. 빠르면 예정대로 연말쯤, 늦어도 내년 초에 편성 될 테니까 그대로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도대체 무슨 속인지 모르겠지만 민 작가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알겠어요. 우리 민 작가 뜻대로 합시다.”
작가들과의 문제를 일단락한 경우는 그 길로 누나 민지선을 찾아갔다. 역시 이런 일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게 제일이었다.
“자, 여기. 누나가 그렇게 원하는 쇼핑몰 스토리텔링.”
“아무리 동생이라도 안 봐줘, 알지? 일에 있어서 철저한 거. 영 아니다 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거야.”
“당연하지. 근데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괜찮게 나왔거든.”
“그래? 어떤 내용인지 기대되는데.”
“그보다 누나한테 부탁할 게 있는데 말이야.”
“뭔데?”
“누나 송미디어 알지?”
“알지. 송일 그룹이 가지고 있는 케이블 방송사잖아. 아, 지난번에 너네가 제작한 드라마 방송한 케이블도 송미디어 채널이잖아. 안 그래?”
“맞아. 다행히 잘 알고 있네.”
“갑자기 송미디어는 왜?”
“거길 인수하고 싶어서.”
“뭐?”
커피를 마시던 민지선은 순간 사레가 들려 기침을 마구 해 댔다. 한심하다는 얼굴로 경우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줬다.
송미디어, 영화는 물론 애니메이션, 음악 채널까지 채널 수만도 7개에 해당하는 대형 케이블 회사였다. 송미디어의 케이블 채널 시청률이 전체의 20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케이블 쪽에선 꽤 영향력이 있는 회사였다. 지난 번 송지현 작가의 <뷰티풀 라이프>를 방송한 QVN도 송미디어의 채널.
이전 생의 송미디어를 결국 경음 그룹이 인수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이후 송미디어가 지상파를 위협하는 신흥강자로 떠올랐으니 경우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애도 아니고 무슨 그런 일에 놀라?”
“당연히 놀랄 일이지. 이게 지금 의류 공장 인수하는 것하고 같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전상율 회장하고 윤혜림 사장이 처음부터 얼마나 정성을 들인 사업인데? 네가 그룹일에 아에 손을 떼서 몰라서 그러는데, 인수? 팔 사람이 생각도 없는데 무슨 인수?”
“아니, 지금 쯤이면 팔 마음이 생겼을 걸. 비싼 골칫덩이가 되어 버렸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세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변하잖아. 방송이라는 게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뀌는 사람들 취향에 맞춰야 하는데 그걸 감당하기 버거울 걸? 아마 지금쯤이면 미디어 사업을 접고 싶어할 거야. 거기에 신경 쓸 바에야 다른 사업을 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본 것처럼 말한다.”
당연히 이전 생에 기사를 봐서 알고 있었다. 매각설을 부인하던 송일 그룹이 결국 영화 쪽 사업에서 철수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음 그룹에 송미디어를 매각한다. 이후 경음 그룹에 터를 잡은 송미디어는 지상파를 위협하는 미디어 제왕이 되었으니.
“속고만 살았나. 어쨌든 그쪽 의견을 좀 물어보란 말이야. 내가 있으니까 핑계 대기 딱 좋잖아. 동생이 드라마 제작사를 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미디어 사업도 해 봤으면 좋았을 거라고.”
“너 지금 나 대본 써 주니? 어쨌든 저쪽에서 매각 의사가 있을 테니까 그걸 확인해 보라 이거지.”
“이왕이면 인수까지도. 부탁 좀 하자.”
“근데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냐? 드라마만 쓰고 싶다며? 제작사까지는 그렇다 쳐도 방송국까지 인수하면 경영은 누가 해?”
“전문 경영인이 왜 있는 건데? 주주로 권리만 행사하고 경영은 전문가에게 맡기면 될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리고 방송국이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 만들어서 방송하면 되는 거지, 어려울 거 뭐 있어? 사람들 취향에 맞춰 드라마 만드는 우리한테는 아예 관련 없는 일도 아냐.”
“그러니까 결국엔 너네 직원들 안정적으로 드라마 내보낼 방송국이 필요했던 거네? 직원들 생각하는 마음도 있고……. 이러다 새명 그룹 후계자 네가 차지하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수고 좀 해줘.”
“잠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빠졌는데?”
“아, 돈 걱정은 마. 한 3500억에서 4000억은 할 거야. 4000억은 안 넘도록 해.”
“얘가 무슨 대파 한 단 사는 것처럼 말하고 있네.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는데? 내가 너 주머니 사정 뻔히 아는데-.”
“그게 언제적이야? 그 돈이 지금 몇 배가 됐는데? 전에 내가 말했잖아. 투자할 데 있다고. 거기다 미국 드라마에도 투자해서 짭짤하게 벌었지.”
“뭐? 도대체 무슨 투잔데…… 그 정도의 뻥튀기가 가능해?”
“왜? 생각 있어? 가르쳐 줘? 아마 지금 넣어 둬도 앞으로도 몇백 배는 오를 텐데?”
“몇백 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투자는 신중해야 한다고.”
“에휴, 말을 말어야지. 됐어, 누나는 그냥 하던 대로 살아.”
할 이야기를 끝낸 경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나한테 떠넘긴 건 미안하게 생각했지만 누나도 자신에게 득이 될 것 같으니 결국 나설 거란 생각이 들었다. 후계자 경쟁을 하고 있는 지금, 없는 능력도 보여 줘야 할 판이었으니 민지선이 이 일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게 틀림없었다.
경우의 생각대로 이 일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민지선은 경제계 모임에 일부러 찾아가 송일 그룹 윤혜림 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어차피 자신에게 맡긴 이상 경우가 전면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
어쨌거나 경우의 말대로 매각 의사가 있음에 놀란 그녀는 곧바로 TF팀을 꾸려 인수 작업에 돌입했다.
민지선이 새명 유통의 대표로 취임한 이후 적자를 메꾸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 중 하나가 홈쇼핑이었다. 민지선이 보유한 새명 홈쇼핑의 주식을 경우에게 넘기는 것으로 자금을 마련, 새명 홈쇼핑이 송미디어를 3627억에 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민지선이 속한 새명 유통의 계열사가 되긴 했지만 경우가 최대 주주 였으니 서로 나쁠 건 없었다.
“처음에 네가 말하는 거 들을 때만 해도 가능한 소린가 싶었는데 정말 방송국을 인수했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내가 뭘 아나요. 대표님이 잘 경영해 주시면 되는 거죠.”
“설마 경영까지 나한테 떠넘기는 건 아니겠지?”
“누나가 원한다면 직접 해도 좋지만 그것까지 부담스럽다면 임장효 전무를 사장으로 승진시켜 일을 맡겨 보는 게 어때? 듣기론 방송 PD 출신이라 프로그램 제작에 대해 잘 알고 경영 능력도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윤혜림 사장이랑 조금 갈등에 있었다고 하더라고. 정 누나가 부담스럽다면 계열 분리해서 내가 가지고 가는 것도 방법이고.”
“참 쉽게 말한다.”
“방송국이야 좋은 프로그램 만들고 그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만들면 그만 아냐?”
“하긴.”
의외로 간단히 답하는 경우의 모습에 민지선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경우는 민지선에게 모든 것을 떠맡길 생각은 아니었다. 방송국을 인수하기로 마음먹은 그때부터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할지 정리가 된 상태였다.
일단 전생의 기억을 통해 알고 있는 능력 있는 예능 PD들을 스카우트해 지상파 채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채널로 만들 계획이었다.
거기다 장르 드라마 전문 채널은 물론 ‘올웨이즈’에서 서비스 중인 미드도 내보낼 생각이었다. 경우의 머릿속엔 벌써부터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은 <열세 번째 달>의 제작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