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39화 (139/250)
  • #139. 반격 (4)

    아이돌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던 경우조차 알 만큼 훗날 유명해지는 이가 바로 하주였다. 본명 임하주, 꾸준히 드라마에 출연하며 늘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 주는 그녀는 연기가…… 발연기였다.

    쟁쟁한 배우와 가수들이 포진해 있는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대형 소속사 스타 엔터. 그런 소속사에서 어떻게 저런 걸그룹이 나왔나 싶게 이름까지 ‘에바’라고 놀림당할 정도로 가창력도 댄스 실력도 어중간한 걸그룹이었다. 오죽했으면 에바의 멤버 중 하나가 사장의 딸이 아니냐 하는 이야기까지 돌았을 정도.

    어쨌든 에바의 서브 보컬을 담당하는 하주는 제작사의 푸쉬로 꾸준히 드라마에 출연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그녀의 연기는 한결같았으니 처음 그 상태 그대로 전혀 늘지 않았던 것.

    레슨까지 받으며 노력하는 걸 보면 연기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포기할 줄도 아는 마음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생각해 보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이미 하주의 실력을 잘 알고 있던 경우는 그것이 서도희의 출연을 완강히 반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계약을 위해 스타 엔터에 갔던 모기범은 그런 사실을 몰랐으니.

    “죄송합니다. 제가 잘 대처하지 못한 탓이에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모 PD님은 잘못한 게 없어요.”

    “아니에요. 이세길 부장님이 계셨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확실히 이세길이 있었다면 그쪽에서 하는 어이없는 주장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 리 없었다. 그 부분이 조금 아쉽긴 해도 어쩌랴, 이미 사람은 떠나고 없는데.

    어쨌든 상대가 저런 식인데 억지로 같이 일할 생각은 없었다. 서도희를 캐스팅하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지만 배우는 많았고 찾아보면 서도희보다 주인공에 더 딱 맞는 배우가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인은 늘 그렇게 혜성처럼 등장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송지현이 길길이 날뛰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추천한 일이 이런 식으로 되자 열 받은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민 작가. 스타 엔터 쪽에서 그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어요.”

    “그럴 수도 있죠.”

    “나참, 열 받아서. 내가 도희 씨한테 직접 전화했잖아.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내가 집필한 게 아니니까 조건이 다르다고 없었던 일로 하자는데 아니, 싫으면 싫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내가 오죽했으면 그 하준가 뭔가 하는 애 다른 드라마 오디션 본 것까지 구해다 봤다니까요?”

    “보니까 어떠셨어요?”

    “단어 하나가 떠오르더라구요.”

    “?”

    “가관이다.”

    송지현의 촌철살인에 경우는 웃고 말았다. 그래, 드라마 만들다 보면 별의별 일도 다 생기는데 웃고 넘겨야지 별 수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 일이 인터넷 뉴스에 대문짝만 하게 실린 것이었다.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 글로리 갑질, 배우 캐스팅 일방적으로 취소 통보]

    분명 거절을 에둘러 표한 건 스타 엔터였다. 오히려 배우를 끼워팔기 하려 했던 스타 엔터가 갑질을 한 건데 전후 사정은 사라진 채 다 된 캐스팅을 스튜디오 글로리가 거절한 것처럼 되어 있었다. 거기다 하필이면 그 대상이 인기 배우 서도희였으니 파급력은 생각보다 컸다.

    그 탓에 비상이 걸린 홍보팀에서는 기사를 정정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한 번 이미지에 흠이 가는 이런 기사가 나면 아무리 정정 기사를 낸다고 해도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우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드라마 제작사가 많다고는 하지만 배우 소속사에서 이런 식으로 드라마 제작사와 트러블을 일으키는 데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확신을 주려는 듯 ‘스튜디오 글로리’를 때리는 기사가 몇 개 더 달렸다.

    SBC와 ‘스튜디오 글로리’가 협업한 프로젝트에 대해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 다른 제작사도 많은데 굳이 특정 제작사와만 프로젝트를 한다는 건 아무리 좋은 취지라 해도 좋게 볼 수만은 없다는 게 기사의 주된 내용이었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 갈 무렵 결정타가 터졌으니 SBC에서 <열세 번째 달>의 편성을 취소한 거였다. 구두 계약이라고 해도 엄연히 계약이었는데 갑자기 이러니 경우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SBC 드라마국 국장실을 찾아간 경우는 말을 잃고 말았다. 참담한 표정으로 짐을 정리하고 있는 전효상이 자신보다 더 딱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편성 취소야 원래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잖습니까? 어차피 민 작가 정도 되면 다른 방송사의 편성 금방 잡을 수 있잖아요. 그동안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한 드라마 시청률만 따지고 봐도 다들 두 팔 벌려 환영할 겁니다.”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었으나 지금 누가 위로를 받아야 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만두시는 겁니까?”

    “가르쳐야 하는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 그만둘 수야 없죠. 한 번을 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하겠습니까?”

    “그럼 이번에도 지방 발령입니까? 이번엔 어디로 가시는데요?”

    “제주도요. 뭐, 제작을 통솔하는 기획 관리라는데 그래도 다시 강원도로 가는 것보다는 낫겠죠. 아침에 제주도 관광이나 실컷 할 생각입니다.”

    한 달 사이 그는 10년도 더 늙은 듯 보였다.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힘도 없는 그에게 경우는 더 할 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작가님,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이요?”

    지금 이 시점에 누가 찾아왔나 싶어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보니 내일 프로덕션 정명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이런 일은 처음일 것 같아서 어떻게 있나 구경하러 왔습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러 오신 거군요.”

    “그런 것치고는 멀쩡하신 것 같아 조금 실망입니다.”

    “이 또한 지나갈 테니까요.”

    “민 작가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으면 저쪽에서 배 아파할 것 같은데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경우는 그가 뭔가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뭔가 알고 계시는 군요.”

    “작가님, 드라마 제작사 협회가 있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 드라마 제작사들이 모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밀어주고 끌어당겨 주면서 이권을 챙기는 친목 도모 단체를 말하는 거라면 잘 알고 있었다.

    드라마 제작 환경을 더 낫게 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협회였으나 경우는 이런 협회가 오히려 드라마 제작 환경을 개선하는 데 일조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특히 김종수 대표가 이런 협회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탓에 제작사를 설립했음에도 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경우와 뜻이 맞았다.

    그런데 정명도의 입에서 다른 곳도 아니고 협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의아했다.

    “드라마 제작사 협회는 제작사 대표들이 보통 가입을 하죠. 그럼 제작사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보다는 대표의 입김, 그들의 요구가 더 먹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일반 시청자들은 ‘스튜디오 글로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다른 제작사 사이에서 ‘스튜디오 글로리’는 평판은 좋지 않습니다.”

    “왜요? 저희가 뭐 책잡힐 일이라도 했습니까?”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걸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으니까요?”

    정명도는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하고 있는 주 52시간 근무를 꼽았다.

    사실 드라마 제작은 시간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었다. 촬영이 하루 늘어날수록 드라마 비용이 어머어마하게 들었다. 당연히 제작사 입장에서는 제작 일수를 줄여 제작에 드는 비용을 줄이고 싶어했다.

    그 탓에 온갖 잡일을 해야 하는 제일 말단 스탭들만 죽어 나갔다.

    하지만 제작사들은 야간 촬영이라든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지금의 환경을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돈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스튜디오 글로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주 52시간 근무를 시행하고 있으니 다른 제작사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밖에.

    “제작사 측에서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주 52시간 근무를 막아 왔습니다. 오히려 그 편이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면서요. 하지만 스튜디오 글로리가 계속해서 자신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으니 가만둘 수 없었던 거죠.”

    “자기들이 못한다고 나까지 못하게 하는 건 좀 치사하네요.”

    “그것도 그거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다른 이유라면……?”

    “스튜디오 글로리, 지금까지 제작한 드라마나 영화, 흥행에 실패한 게 없잖아요. 실패를 예상하고 만드는 사람은 없어요. 다들 성공할 거라고 믿고 하는 거죠. 그런데도 시청률이 바닥을 치고 손익분기점을 넘기기가 에베레스트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들죠. 그런데 스튜디오 글로리는 매번 성공만 해 왔잖아요. 배가 아팠을 만도 하죠.”

    “참 속 좁은 사람들이네요.”

    “애들만 유치하란 법 있습니까? 다 큰 어른들도 생각보다 유치합니다. 아마 그들 눈에는 아니꼬워 보였겠죠. 자기들은 죽기 살기로 한다고 하는데 민 작가는 신선놀음 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섭섭하게…… 취미 아닌데요. 저도 죽기 살기로 합니다.”

    “원래 남의 상처보다도 내 손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입니다.”

    “결국 제가 돈 많은 재벌 아들이기 때문에 더 미운 털이 박혔다는 거죠?”

    “협회에서 정한 규율 같은 거 신경 쓰지 않고 마이웨이로 나가는 민 작가가 부러웠던 거죠.”

    정명도는 좋게 말했지만 경우는 그들의 진의를 알아차렸다.

    사실 10년의 시간 동안 드라마를 쓰면서 알게 모르게 이 바닥에 일어나는 일을 듣고 봐 왔던 그였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엔 드라마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면서 돈 좀 있다고 어느 날 갑자기 드라마 제작에 뛰어든 그런 놈으로 보였겠지.

    솔직히 간과했다.

    그동안 드라마를 만들면서 어려웠던 일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사실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런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면 이유도 모른 채 당하고 있을 뻔했네요.”

    “그쪽에서 하는 행태는 저도 달갑지 않으니까요. 그럼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아까 들어오면서 보니까 편성 취소돼서 그것도 시끄러운 것 같은데.”

    “방송국이 SBC 하나만 있나요? 편성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긴, 손해날 짓은 그쪽이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 언 발에 오줌 눠 봤자 금방 얼 테니까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정명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좋은 소식 있으면 찾아 주세요.”

    “그러죠.”

    돌아서던 정명도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이번 SBC 편성 취소된 자리 어떤 드라마가 들어가는지 알고 있습니까?”

    생각해 보니 이유도 없이 편성을 취소할 리가 없을 텐데 정신이 없어 전효상에게 그것도 묻지 않았다.

    “벌써 그 시간에 들어가기로 한 작품이 있나요?”

    “드라마는 잘 모르겠고 제작사는 좀 알죠. ‘유니언 스튜디오’ 작품이 들어간다고 하던데요. 이번에 <마르스> 덕분에 재미 좀 봤잖아요.”

    “…….”

    “참고가 될지 모르겠지만 협회에서 가장 파워가 센 것도 ‘유니언 스튜디오’죠.”

    “그럼 이번 일도 그쪽에서 꾸몄다고 볼 수 있을까요?”

    “꼭 그런 것 만은 아닐 겁니다. 불을 지핀 건 그쪽이 맞겠죠. 하지만 벌떼처럼 달려든 건 각자의 이익에 따른 거 아니겠습니까?”

    정명도의 말에 열 받았던 머리가 빠르게 식은 경우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까 그러셨죠. 협회의 규율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마이웨이로 가는 저를 부러워한다고요.”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게 있기는 한데 마침 그걸 시도해 볼 적절한 때인 것 같네요.”

    경우의 미소에 정명도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자못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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