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37화 (137/250)
  • #137. 반격 (2)

    ‘유니언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드라마 <마르스>가 2012년 12월 SBC에서 첫방송을 시작했다. 굵직굵직한 작품만을 써온 김준원 작가의 작품답게 시작부터 화려한 액션 씬과 다른 드라마의 4화를 한 화에 녹여 낸 빠른 전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기다 몸을 아끼지 않는 주인공 차다원의 액션 또한 볼만했다.

    전작인 <비밀 요원>은 국정원 요원인 이수철이 북한과 관련된 거대 비밀 조직의 테러를 막는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차기 유력 대선 주자의 거리 유세에 테러를 계획할 것이란 걸 알아내 대비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계획이 새어 나갔음을 안 비밀 조직이 테러를 하는 대신 대선 주자의 딸을 납치한 탓이었다. 이수철은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 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을 돕는 정체 불명의 여인이 바로 차다원이 연기한 에스더였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애매한 포지션의 그녀는 주인공을 돕지만 뭔가 비밀을 감추고 있었으니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그녀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온갖 궁예질로 그녀의 정체를 추측하던 팬들은 <마르스>가 국정원 요원 이수철을 만나기 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자 열광했다.

    전편만 한 속편은 없다는 징크스가 있었지만 <비밀 요원>의 골수팬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전작을 능가하는 탄탄한 설계에 <마르스>는 빠르게 인기몰이 중이었다.

    <마르스>의 시청률이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2012년 최고의 화제작 <뫼비우스> 또한 회자되었다. 경우로서는 나쁘지 않은 게, <뫼비우스>는 이미 종영한 작품.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의 다시 보기 결제로 이어지고 있었으니 좋을 수밖에. 어쨌든 사람들은 <마르스>와 <뫼비우스> 두 작품 중 어느 작품이 최종 승자가 될 것인지 궁금해했다.

    경우도 <마르스>에 관심이 많았으니 드라마 작가이기 전에, 한 사람의 시청자로서 드라마를 보는 것만큼 그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퇴근 전, 이미 늦은 김에 회사에서 <마르스>를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경우가 방송 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던 차에 전화가 울렸다. 미국에 있는 서필진이었다.

    “아, 서 팀장님. 잘 지내고 계시죠?”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드린 건 아니죠?]

    “그럼요. 이제 저녁인데요.”

    [다행입니다. 몇 가지 전해야 할 소식이 있어서요.]

    서필진은 그동안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경우에게 소상히 알려 주었다.

    데니 역의 브라이언 애들러가 하차했음에도 다행히 <크리미널 리포트>의 네 번째 시즌이 인기리에 막을 내렸다는 소식이었다.

    <크리미널 리포트>의 새로운 캐릭터로 합류하게 된 준 리차드는 트러블을 일으키고 다니는 반항아 루카스 역을 완벽히 소화해 어색함 없이 팀에 녹아들었다고 덧붙였다.

    [확실히 준은 자기 매력을 잘 아는 것 같아요.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는다니까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무명이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요.]

    “그동안은 연이 없었던 거죠. 어쨌든 조금 걱정한 것도 있는데 잘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물론 오랜 팬들은 브라이언이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지만 적어도 준이 브라이언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전 생에 사라 웨버가 등장했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참, <뫼비우스>도 잘 봤습니다. 역시 웹플릭스에 입점하실 생각인 거죠?]

    “당연하죠.”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웹플릭스 들어간 우리 드라마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게…… 소소하게 반응이 있기는 한데 기대하실 정도는 아니네요. 아무래도 미국 사람들, 자막이 있는 드라마를 보는 걸 싫어하니까요. 근데 확실히 다른 아시아 지역의 드라마보다는 반응이 괜찮은 것 같아요.]

    “급할 거 뭐 있습니까? 첫술에 배부를 수 없잖아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죠. 천천히 기다려 보죠. 혹시 알아요? 언젠가 우리 드라마, 대박이 터질지도 모르잖아요.”

    [맞습니다.]

    “아,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빼먹을 뻔했네요.”

    [뭔데요?]

    “전에도 말씀드렸죠. 미국 드라마 제작해 보고 싶다고요. 처음부터 오리지널 콘텐츠로 제작하는 것보다 리메이크를 해 보고 싶은데 시장조사를 좀 했으면 해요. 미국에서 먹힐 만한 걸로요. 꼭 우리가 제작한 게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한 번 알아보세요”

    [<마르스>도 괜찮습니까?]

    “물론이죠. 설마 이제 방송된 지 2주 지났는데 벌써 반응이 오는 겁니까? 그럼 조금 배 아플 것 같긴 한데요.”

    [미국 주류 사회보다 교포쪽에서요. 어쨌든 교포들 사이에선 한국 소식이 늘 화제가 되긴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조사해서 다음에 또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전화를 끊자 드라마는 어느새 시작하고 있었으니 경우는 줄여 놓았던 볼륨을 높이고 드라마에 몰입했다.

    * * *

    박현호는 지난번 김강철을 불러낸 청담동의 그 와인 바에 있었다.

    이번에 그의 옆 자리엔 아리따운 여자가 앉아 있었으니 이지적인 느낌의 단발은 물론 고급 브랜드의 투피스까지 모두 박현호의 취향이었다.

    ‘나이만 좀 어렸어도…….’

    관리를 잘한 덕분에 박현호 또래로 보일 정도였지만 사실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바로 <마르스>의 책임 프로듀서인 최지연이었다.

    드라마 작가의 80퍼센트가 여자일 정도로 여자 작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에 비해 연출은 90퍼센트가 남자들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비교적 어린 나이에 CP까지 올라간 걸 보면 능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다 그녀에겐 남보다 한발 멀리 보는 처세술이라는 무기가 있었으니, 어느 줄을 타야 출세가 능한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사실 그녀가 <마르스>의 책임 프로듀서를 맡게 된 데에는 작품을 보는 안목도 물론 있었지만 제작사가 ‘유니언 스튜디오’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힘이 약해졌다고 해도 업계 1위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종편을 위해 한동안 인재를 긁어모으다시피 한 덕분에 각 방송국 출신의 쟁쟁한 PD들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유니언 스튜디오’를 거쳐 갔으니 그것은 고스란히 인맥으로 남았고 그들 사이의 끈끈한 무언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인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작품 성공이 안 되면 무용지물. 당연히 <마르스>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은 그녀는 제작진으로 참여해 ‘유니언 스튜디오’, 특히 박현호와 손을 잡기로 결심했다. 거물처럼 보이려 애쓰는 눈앞의 애송이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을 거란 계산도 있었다. 이렇듯 그녀의 야심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다행히 그녀의 생각은 적중해 드라마가 흥행하는 중이었으니 지금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적당한 시기라 판단했다.

    박현호의 뒤를 캐 이미 그에 대한 파악이 끝난 그녀는 그의 가려운 곳을 살살 긁는 것으로 그를 길들이기로 했다.

    “좋은 드라마, 착한 드라마, 물론 좋죠. 근데 우리가 시청자들을 계몽할 것도 아니고 드라마까지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요? 예전보다 놀 거리가 더 많아진 지금,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시청자들을 어떻게든 끌고 와야죠.”

    “맞습니다.”

    “그래서 전 솔직히 SBC가 스튜디오 글로리와 한다는 그 프로젝트, 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듣기론 반응이 나쁘지 않다고 하던데요. 참견하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드라마 제작 현장이 어쩌고저쩌고 난리잖아요. 자기들이 하는 것도 아닌데 남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무슨 말이 그렇게들 많은지. 쪽대본이 나오든 생방을 하든 그건 관계자들이 알아서 할 일 아닌가요?”

    “내 말이요. 역시 전무님하고는 대화가 잘 통한다니까.”

    “다행입니다.”

    “집단 창작? 글쎄요, 꼭 공장에서 찍어 내는 것 같잖아요. 애초에 미국이랑 제작 환경 자체가 다른데 미국 게 좋다고 따라할 필요 있나요? 장점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결국 평준화가 될 테고, 그럼 비슷비슷한 이야기에 시청자들만 이탈할 거예요. 지금이야 초반이니까 반짝하는 것뿐이죠.”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이 신인 작가 프로젝트지, 솔직히 이번 <뫼비우스>에 신인 작가가 어디 있어요? 그 신도현이라는 작가도 미니시리즈 경험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그랬던가요?”

    신도현을 스카우트하려 했으면서도 박현호는 최지연이 뭐라 할지 몰라 신도현에 대해선 짐짓 모른다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최지연이었으니 그녀는 고삐를 마저 당겼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더니…… 신도현을 신인이라고 퉁치기엔 너무 양심 없다 생각되지 않아요? 아, 그 연출 맡았다는 감독님도 대본에 참여했다던데 드라마는 처음이라 신인이라는 건가? 정말 어이없지 않아요?”

    “제 말이요. 원래 민경우 작가가 그래요. 재벌집 아들이라 아무것도 모르죠. 고무줄 같은 자기 기준에 만족하면 그만인 사람입니다.”

    “아, 민 작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군요?”

    “뭐, 잘 알긴요.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수준입니다. 오다가다 듣는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방송국에서는 민 작가 띄워 주는 모양이지만 저는 그 사람들과 다른 생각이에요. 순수하게 민 작가가 대단하다고 할 수 없는 게 솔직히 돈의 힘도 무시할 수 없잖아요. 집안 내세워서 PPL로 확실히 뒤받쳐 주고 제품 팔 듯이 마케팅으로 홍보하는데 누가 안 보겠어요? 안 그래요?”

    “그렇죠. 근데 여기서 우리끼리 이렇게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방법이 있다면요?”

    “네?”

    “그 프로젝트 못 하게 만들어 버리면 되잖아요.”

    눈 앞에 당근을 놓고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으니 홀린 듯 결국 박현호는 최지연의 페이스에 말리고 말았다.

    “듣자하니 그 프로젝트가 전효상 국장과 민 작가 두 사람 사이에 체결된 계약이라고 하더라고요. 조건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라도 성립이 안 되면 계약이 파기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럼 당연히 프로젝트도 무산되겠죠.”

    “그런 간단한 방법이……. 하지만 계약을 한 당사자도 아닌 이상 조건이 뭔지 우리가 알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어렵게 생각할 거 뭐 있나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한 가지 조건이 있잖아요.”

    “네?”

    “자리요. 전효상 국장이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 아니겠어요? 방송국 차원에서 한 계약이라면 모를까 두 사람 사이의 밀약이잖아요, 이건.”

    “아, 그렇군요.”

    “자리에 맞지 않은 사람이 너무 오래 앉아 있었어요. 강원도에서 끝났어야 할 사람이 국장이라니. 안 그래요?”

    박현호가 그녀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누가 내 욕 하나? 요즘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드라마가 끝이 나자 이제 집에 들어가 쉬어야겠다 생각한 경우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운동복 차림의 송지현이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송 작가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다행히 아직 안 들어갔네요.”

    “설마 작업실에서 여기까지 뛰어오신 건 아니죠?”

    “왜 아니에요? 작가는 체력이 힘이라구요. 뛰는 거 좋아해요. 그래서 가끔 하프 마라톤에 참가하기도 하죠. 민 작가도 건강 생각해서 해 보지 그래요?”

    운동이라고는 담을 쌓고 사는 그였으니 송지현의 말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한테 그 말씀 하시려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닐 테고…… 무슨 일 있으십니까?”

    “몸이 찌뿌둥해서 운동 좀 할까 하다가 나왔는데 뛰다 보니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뭐예요. 그래서 지금쯤이면 민 작가가 퇴근 안 했을 것 같아서 오게 된 거예요.”

    “좋은 생각이라니요, 뭔데요?”

    “다음 SBC와 하는 프로젝트, 나도 같이 해 보고 싶어서요.”

    “예?”

    분명 이전까지만 해도 집단 창작에 회의적인 그녀였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런 생각을 한 건지 경우는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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