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36화 (136/250)
  • #136. 반격 (1)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딨습니까? 예?”

    평소와 달리 다소 흥분한 경우의 모습에 SBC 드라마국 국장 전효상은 그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미안하다고 끝낼 일이 아니잖아요? 분명 편성까지 문제없다 못 박아 놓고 이제 와 이렇게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리시면-.”

    “나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민 작가가 알다시피 나, 바지 사장이나 다름없어요. 뭐, 바지 국장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시청률 잘 나오는 대박 드라마만 있으면 이 자리, 오래 버틸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민 작가한테 무리한 요구도 했구요.”

    “다 아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애초 내 자리가 아니었던 걸 어떡합니까? 나도 압니다. 민 작가 덕분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는 거요.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오래 지키고 싶었습니다. 근데,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이 자린 이미 정해진 사람이 있었어요.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순진했던 거죠.”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요?”

    “민 작가도 알고 있잖아요. 우리의 계약은 우리 두 사람 간의 약속이고 내가 국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만 효력이 있다는 거요.”

    “…….”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줘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 그만 가 주시죠. 저도 방을 비워 줘야 해서요.”

    참담한 전효상의 표정에 경우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편성을 취소해 버리면 드라마 준비를 위해 들인 수고는 누가 보상해야 하는지 경우는 답답한 심정이었다.

    이번 일이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경우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뫼비우스>가 끝난 2012년 11월의 어느 날, ‘스튜디오 글로리’의 라운지에서 쉬고 있던 경우는 마침 TV에서 SBC의 새 야심작 <마르스>의 예고편을 보게 되었다. 짧은 시간인데도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채 눈을 떼지 못했다.

    “저게 강철이가 말한 그건가? 박현호, 이번엔 힘 좀 줬네.”

    예고편만 봤는데도 궁금하게 만드는 포인트와 빼어난 영상미, 무엇보다 지난해 KBC의 시청률 1위 작품인 김준원 작가가 쓴 <비밀 요원>의 프리퀄 드라마였으니 기대감이 드는 건 당연지사.

    <마르스>의 예고편이 나간 후 인터넷 반응도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비밀 요원> 방송 당시 가장 인기를 얻었던 캐릭터는 단연 우재환이 맡았던 주인공 수철이었다. 다음은 수철을 돕는 서브 여주 에스더 역의 차다원으로 수철을 본의 아니게 매번 위기에 빠뜨리며 민폐 캐릭터로 시청자들이 원성을 받았던 여주인공 유가희와는 대조적이었다.

    남자 배우 못지않은 액션씬을 소화하며 몸을 아끼지 않은 열연에 주목조차 받지 못했던 차다원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 결과 이번 드라마 <마르스>의 단독 주연 자리를 꿰찼다.

    어쨌든 그 동안 헛발질만 하던 박현호가 절치부심한 것 같아 나쁘지만은 않았다. 저런 상대가 있어야 경쟁할 맛도 나는 법이니까.

    그렇게 웃으며 넘기려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드라마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전 생에 저런 제목의 드라마는 없었다. 혹시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경우는 휴대폰으로 <마르스>에 대한 검색을 해 보았다. 줄거리라도 읽으면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은 이유였다.

    하지만 <마르스>와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고 기억을 더듬어 봐도 떠오르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 무엇보다 <마르스>의 연출을 정해용 PD가 맡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김경진 작가와 콤비를 이뤄 만들어 내는 드라마마다 히트를 쳤던 정해용 PD. 이전 생의 그는 <마지막 사랑>으로 친일 논란을 겪고 드라마가 실패한 이후 오랫동안 함께한 김경진 작가와 결별한다. 이후 젊은 PD들과 손을 잡고 회사를 차려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어 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 그가 김준원 작가와 손을 잡았다. 뭔가 경우가 알고 있는 이전 생과 분명 달라지고 있었다.

    “이게 두 사람을 유니언으로 보내 버린 나비효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

    “뭐라고 혼자서 중얼거리는 거야?”

    언제 왔는지 안청모가 웃으며 서 있었다.

    “아, 형님! 언제 오셨어요?”

    “아까. 예전부터 느끼던 거지만 너는 젊은 놈이 뭘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려. 그런 건 나이 들어서나 하는 거야. 이를 테면 은기 형님만큼?”

    “김 PD님이 들으면 섭섭해하시겠어요.”

    “나랏님도 옆에 없으면 씹는 마당에. 근데 뭘 보고 있었길래 그래?”

    “<마르스> 예고편이요.”

    “아, 유니언 스튜디오에서 한다는 그 드라마? 어떻게 보면 이거야말로 시즌제 드라마 아냐?”

    “시즌제요? 정말 그렇게 만든대요?”

    “그 드라마 <비밀 요원>의 프리퀄이라며? 프리퀄도 나왔는데 드라마만 잘되면 시퀄이야 못 만들겠냐? 전에 들어 보니까 김준원 그 양반이 시리즈에 욕심이 좀 있더라고.”

    “그래요?”

    “어. 마블처럼 세계관을 만드는 게 꿈이라나. 이 드라마에서 엑스트라처럼 잠깐 스쳐 지나간 등장인물이 다른 드라마에선 주인공으로 나온다나? 아무튼 그런 식으로 드라마 속 세계관을 확장하고 싶어하는 것 같더라고. 근데 그게 말이 쉽지. 윽, 나는 생각만 해도 머리에 쥐 날 것 같다.”

    안청모의 말마따나 한 드라마에서만 등장하고 끝나는 캐릭터가 아니라 다른 드라마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만드는 건 작가 한 사람의 힘만으론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생각해야 할 것도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았으니 경우조차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 정도까지 섬세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게 김준원 작가의 강점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휴대폰으로 다시 <마르스>의 예고편을 감상하고 있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빠서 연락이 안 되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봐?”

    고개를 들어 보니 누나 민지선이 서 있었다.

    “어? 누나가 여긴 어쩐 일이야?”

    “전화를 해도 안 받으니까 그렇지. 김 대리는 다른 일로 바쁘고, 별수 있어? 아쉬운 사람이 와야지. 하도 전화를 안 받길래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네.”

    “바빴어. 누나도 알다시피 드라마 끝난 지 얼마 안 됐잖아. 근데 누나가 여기까지 다 행차를 하고 누나야말로 바쁜 줄 알았더니 한가한 모양이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해맑은 표정에 민지선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뭐야,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쇼핑몰 스토리텔링 부탁했잖아.”

    “아, 맞다.”

    “아, 맞다?”

    “미안, 누나. 내가 진짜 깜빡했어. 누나도 알다시피 내가 요즘 좀 바빴어야 말이지. 하고 있던 드라마에 대만 쪽 일까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알잖아?

    “모르겠는데?”

    “아, 누나!”

    경우의 막내다운 투정에 민지선은 그만 웃고 말았다.

    “어쩐지 여길 그렇게 오고 싶더라니. 좋아, 정 그렇게 미안하면 저녁 사든가.”

    그러자 경우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누나, 설마 같이 저녁 먹을 사람이 없어서 나랑 밥 먹으려고 온 건 아니지?”

    자신을 째려보는 누나의 눈빛에 경우는 그만 자신이 정곡을 찔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하, 아무렴 우리 누나가 같이 밥 먹을 사람 하나 없을라고.”

    “방금 너 무지 로봇 같았다. 드라마는 잘 쓰면서 연기는 영 아닌가 봐.”

    “뭐래. 가자, 뭐 먹고 싶은데?”

    그렇게 민지선을 데리고 가려던 경우는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안청모를 잠시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안 PD님…… 누나 존재감이 워낙 세서 방금 전까지 안 PD님이랑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잊어버렸잖아.”

    “지금 내 탓 하니?”

    “그렇다기보다…….”

    “어쨌든 반가워요, 안청모 PD님.”

    꽤 오랜만인데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민지선의 모습에 안청모가 놀랐다.

    “아, 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나야, 뭐. 참, 이직하셨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뭐,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작가 민경우는 괜찮은 작가잖아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럴 게 아니라 형님도 저희랑 같이 저녁 하시죠?”

    “아냐, 남매 간에 오붓하게-.”

    “그러지 말고 같이 가시죠. 저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괜찮아요. 보셨다시피 남매 둘이 밥 먹으면 싸움밖에 더 하겠어요? 그러니 같이 가세요.”

    민지선의 포스에 더는 사양도 못하고 안청모는 결국 엉거주춤 그들 남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 *

    “그래서? 컨셉 이야기는 해 봤어?”

    “아직 구체적인 컨셉이 정해진 건 아닌데 나왔던 이야기 중에 제일 인상 깊었던 걸 말하자면, 우주!”

    “우주?”

    “쇼핑몰 규모가 크잖아. 그래서 쇼핑몰을 우주로 보는 거야. 그 광활한 우주 속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특별한 기적?”

    “그거 꼭 어린 왕자 같네요.”

    “어린 왕자요?”

    민지선의 관심에 눈치를 보던 안청모가 입을 열었다.

    “그게…… 어린 왕자가 우주 여행을 하면서 여러 행성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장미꽃이나 사막 여우를 통해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해 볼 거리도 많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어린 왕자 이야기를 좋아하잖아요.”

    “그거 괜찮은데요? 그치 누나?”

    “응.”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경우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너는 매너 없이. 식사 시간엔 진동으로 해 놓아야 하는 건 기본 아니니?”

    “미안, 깜빡했어.”

    경우가 전화를 끄려는 사이 안청모도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진동으로 바꿔 놓았다. 마침 민지선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살짝 미소 지었다.

    “어? 김 대표님인데? 아무래도 받아야 할 것 같아. 웬만하면 퇴근 후에 전화 안 하시는 분이거든. 네, 대표님. 그래요? 그럼 제가 지금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저 아직 근처에 있어요. 네.”

    전화를 끊자마자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서 어쩌지? 나 지금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

    “일이라기보다…… 그렇게 신경 쓸 일 아니니까 걱정 마. 저기 형님, 미안하지만 우리 누나랑 같이 식사 좀 해 줘요. 우리 누나 저래 봬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진 마시구요. 알았죠?”

    그러더니 바람처럼 쌩하고 나가 버렸다.

    둘만 남은 상황에 잠시 어색함이 감돌고 민망하다는 듯 웃어 버린 두 사람은 이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PD님은 무슨 영화 좋아하세요?”

    “영화요? 전 드라마 PD인데요?”

    “그러니까요. 드라마면 당연히 본인이 연출하신 드라마 좋아하실 거 아니에요. 가장 최근에 한 <뷰티풀 라이프>?”

    정곡을 찔린 안청모는 놀랍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음, 영화라면 아무래도 <첨밀밀>이죠.”

    “확실히 감성적이시라니까. 전 <쇼생크 탈출>이요.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기적을 만들어 내잖아요.”

    경우의 걱정과 달리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 * *

    다들 퇴근을 한 뒤라 적적한 사무실 안에 김종수는 짐을 챙기는 이세길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경우가 뛰어 들어왔다.

    “대표님!”

    “민 작가 왔어요?”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부장님, 사모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거예요?”

    “암…… 이랍니다. 다행히 2기라 수술만 하면 나아질 수 있다고는 하지만…….”

    말을 다하지 못한 이세길이 흡하고 숨을 들이켜고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김종수와 함께 ‘스튜디오 글로리’를 세운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우가 쓴 대만 드라마 <귀월鬼月>의 제작을 도우며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내의 암 진단은 매우 충격적이었으니 일에만 매달린 자신 탓에 아내가 몹쓸 병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은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가족을 위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일만 했는데 그게 결국 내 가족을 병들게 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말리지 마십시오. 지금이라도 아내 곁에서 병 수발하면서 그동안 못다 해 준 거 해 줄 생각입니다.”

    이세길의 마음을 알기에 경우는 물론 김종수도 차마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부장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대신 사모님 건강 좋아지고 다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시면 돌아오세요. 부장님 자리는 비워 둘 테니까요.”

    자신을 생각하는 경우의 마음 씀씀이에 이세길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짐을 챙겨 돌아가는 이세길의 뒷모습을 보는 경우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하지만 경우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불행은 부지불식간, 한꺼번에 올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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