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5)
사람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소문이 나 있던 터라 대만에서 <뫼비우스>의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발 빠르게 드라마를 선점한 덕에 비교적 싼 가격으로 드라마를 수입한 TDS관계자들은 드라마를 제작한 것보다 더 적은 돈을 들여 그 이상의 효과를 보자 매우 흡족해했다.
덕분에 경우가 쓴 드라마에 대한 우려도 사라졌으니 린이췐은 새 드라마 제작에 박차를 가했다. 경우가 처음 붙인 <디 엔드>라는 제목 대신 대만 분위기에 맞게 <귀월鬼月>로 수정한 드라마는 대본을 본 사람들의 입을 타 기대작이라 평가를 받았으며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대만에서 첫방 시청률이 대박이 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한국에서도 <뫼비우스>의 마지막 회가 방송을 앞두고 있었다.
마포의 식당을 빌린 경우는 고생한 스탭은 물론 배우들과 함께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종방연을 가졌다. 몇 달 동안 함께해 온 이들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적당히 술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취기에 꾸벅꾸벅 졸던 나상재를 경우가 흔들어 깨웠다.
“벌써부터 주무시고 계시면 어떡해요?”
“밤새 촬영하고 아까 점심 때까지 편집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고요.”
“첫 드라마 어떠셨어요?”
“이건 좋다고도, 안 좋다고도 할 수 없는 게 영화하곤 확실히 다르니까, 바로 반응이 오잖아요. 덕분에 신나게 일하기는 했지만 일정에 쫓겨 여유도 없고…… 진짜 고되다는 말이 딱 맞아요.”
“그럼 다음에 또 드라마하자고 하면 안 하실 건가요?”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네요.”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강범석이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저는 감독님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가요. 자랑이 아니라 제가 출연한 영화가 두 편이나 천만 관객이 들었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더란 말이죠. 근데 이번 드라마 첫 방송 나가자마자 사람들이 알아보는데, 저 처음 느꼈습니다. 아, 이런 게 스타의 삶이구나.”
“괜히 그러신다.”
“진짜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까 연말 시상식 베스트 커플 상 후보로 올랐던데요. 우재환 씨랑 같이요.”
신도현의 말에 강범석은 물론 나상재의 인상도 잔뜩 찌푸려졌다.
“베스트 커플은 무슨.”
연기 욕심에 은근한 라이벌 의식까지. 촬영하는 내내 강범석과 우재환 사이의 적잖은 신경전에 누구보다 시달린 건 나상재였으니. 물론 그게 드라마에 좋은 영향을 끼쳤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 고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쨌든 수상하셨으면 좋겠네요.”
“작가님, 그거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그럼요. 뭐가 됐든 상은 좋은 거잖아요.”
“하여간 작가님도 참 짓궂으시지.”
“저는 그게 궁금한데…….”
조심스러운 신도현의 태도에 경우가 물었다.
“뭐가요?”
“배우님, 혹시 다음에 출연 제의받으면 드라마 출연하실 건지 궁금해요.”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우재환까지도. 잠시 생각에 잠긴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한 번 정도는 같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확실히 영화와는 다른 드라마만의 매력이 있으니까.
그게 경우가 드라마를 계속 써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드디어 10시가 되고 식당의 TV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지점, 뫼비우스>의 마지막 방송이 시작되었다.
* * *
이상훈은 ‘클럽 매그넘’의 전 사장이었던 부창환이 장기 투숙용으로 마련해 둔 모텔방을 찾아 마침내 숨겨놓은 비밀 장부를 발견했다.
거기엔 부창환과 김학범의 관계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오래전 사채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김학범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부창환은 그동안 김학범의 악행을 고스란히 증거물로 모아 두었다.
이상훈은 혹시 몰라 장부를 휴대폰 사진으로 찍어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잠시 후 이상훈의 전화 진동이 울렸다.
“네. 증거 찾았어요. 이거면 김학범은 물론이고 진권파를 일망타진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제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품 안에 장부를 숨긴 채 일어서는 순간, 문이 열리고 부하들을 여럿 대동한 김학범이 들이닥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이상훈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사님…….”
“여기서 뭐 해?”
“저 그게-.”
“쥐새끼처럼 몰래 들어와서 염탐하면 모를 줄 알았어?”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형사1팀 이상훈 경위라고 불러 줄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그게 중요한가? 네가 알아야 하는 건 그거야, 너도 곧 죽을 거라는 거.”
“글쎄. 하지만 내가 죽는대도 너는 끝장이야!”
그러자 이상훈을 비웃던 김학범이 품 안에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흔들어 보였다.
“아, 이거 때문에? 근데 어쩌지? 이제 곧 소용없을 예정인데.”
그가 흔든 휴대폰 속에는 방금 전 이상훈이 보낸 증거 사진이 고스란히 있었으니. 김학범의 어깨 너머로 주본찬 경사의 모습이 보였다.
“주, 주 경사님이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닌 사람 좋은 얼굴로 최태근과 대립할 때마다 중재하던 주본찬이 배신자였단 사실에 이상훈은 놀라고 말았다. 그에 김학범이 고갯짓을 하자 뒤에 있던 부하들이 이상훈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을 수색했다. 그의 몸부림에도 결국 품 안에 숨긴 부창환의 장부를 손에 넣은 김학범.
“이거 고마워서 어쩌나. 안 그래도 이걸 찾고 있었거든. 손 안 대고 코 푼다는 게 바로 이걸 뜻하는 거겠지.”
“김학범!”
“그래, 그렇게 짖어봐.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김학범이 돌아서자 부하들이 이상훈을 붙잡고 그의 머리에 복면을 덮어씌우려 다가왔다.
말하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어디론가 보내져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겠지.
벗어나려 발버둥 치다 안 되겠다 싶은 그는 그 자리에서 도약해 복면을 씌우려던 놈을 발로 차 쓰러뜨렸다. 당황한 놈들도 다리를 걸어 쓰러뜨린 후에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자 못마땅하다는 듯 김학범이 입을 열었다.
“멍청한 것들. 여럿이 한 놈도 제대로 못 잡아?”
그 말에 곁에 있던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서로 대치한 채 바라보는 그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고 이상훈은 주먹을 꽉 쥔 채 자세를 취했다. 그때 부하들 사이를 뚫고 나오는 조원태.
“이쁘게 봐 줬더니만, 나를 속여?”
언제 꺼냈는지 손에 들린 나이프의 날이 반짝였다. 이상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좁은 모텔방 안, 이상훈과 놈들의 격투가 시작됐다. 부하들이 하나둘 나가떨어지지만 마침내 이상훈을 제압한 조원태가 그의 목을 조르며 나이프로 이상훈의 눈을 노렸다. 조원태의 손목을 잡은 이상훈이 힘으로 버티는 아슬아슬한 순간, 시끄럽게 울리는 화재 경보음!
조원태가 방심한 순간을 놓치지 않은 이상훈의 반격에 결국 그는 나이프를 놓치고 재빨리 낚아챈 이상훈이 테이블 위, 그의 손을 나이프로 박았다.
“아악!”
* * *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멈추고 조금씩 퍼지는 메케한 연기에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던 김학범은 황급히 올라오는 박경택과 마주쳤다.
“이사님!”
“무슨 일이야?”
“저 새끼 뒤를 봐주는 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놈이 사람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1층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연기가 너무 퍼져 내려갈 수 없습니다. 일단 옥상으로 대피하시죠. 신고를 했으니 구조 헬기가 올 겁니다.”
“이거 귀찮게 됐군.”
의심 없이 돌아서는 김학범의 등을 보며 박경택은 숨겨 두었던 나이프를 꺼냈지만 때마침 돌아본 주본찬의 발길질에 나이프를 놓치고 말았다. 믿었던 박경택의 배신에 김학범의 눈이 불타오르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어 돌아서고, 대신 주본찬이 박경택을 덮쳤다.
엎치락뒤치락 박경택을 올라탄 주본찬이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는데 오롯이 견딘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조금 전 자신이 떨어뜨린 나이프. 겨우 손을 뻗어 나이프를 잡은 순간, 주본찬의 외마디 비명이 모텔 계단을 울렸다.
그 소리에 잠시 멈칫한 김학범은 이내 계단 위로 올라 옥상 문을 열었다.
* * *
칼에 스친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이상훈이 문을 열자 올라오던 박경택이 놀라 그의 앞에 섰다.
“형!”
“상훈아! 괜찮아? 많이 다친 건 아니지?”
“형!”
“내가 너네 팀장님께 연락했어. 금방 올거야.”
엉망이 된 얼굴로 다친 이상훈을 살피던 박경택은 손에 박힌 나이프를 빼내 좀비처럼 일어나 뛰어오는 조원태를 발견했다. 이상훈을 밀치고 조원태가 찌른 칼에 찔린 박경택.
“형!”
고통에 일그러진 박경택을 향해 조원태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옛날부터 참 엿 같았어. 다 똑같은 처지에 혼자 고고한 척하는 네 눈깔이 참 마음에 안 들었거든.”
다시 한번 박경택의 복부를 찌른 조원태.
일그러지던 박경택은 남아 있는 힘을 겨우 짜내 조원태를 밀어붙였다. 결국 힘에 밀려 조원태의 뒤에 있던 창문이 깨지고 두 사람은 창문 아래로 추락했다.
“형!”
* * *
구조를 위해 모텔 옥상 위로 헬기가 나타나자 손을 흔드는 김학범.
마침내 헬기에서 사다리가 내려오자 천천히 사다리 위를 올라가는데 헬기에 타고 있던 건 광수대 한 팀장. 결국 김학범의 손목엔 수갑이 채워졌다.
연막탄의 연기가 사라지자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온 이상훈은 허벅지에 칼이 찔려 절뚝거리며 체포된 주본찬을 뒤로한 채 주변을 살폈다. 한쪽에 세워 둔 구급차로 천천히 다가가는 이상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누군가를 덮은 하얀 천을 천천히 들췄다.
박경택의 모습을 확인하고 오열하는 이상훈. 하지만 애타는 이상훈의 부름에도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 * *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잡혀 온 소년 하나가 이상훈 앞에 앉아 있었다. 소년은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댔다.
“그놈들이 먼저 그랬다고요! 부모가 없으면, 가진 게 없으면 누가 밟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누가 그렇대? 그치만 폭력은 안 돼. 복수란 말이다, 네 분풀이를 위해 몇 때 때려 주는 게 복수가 아니야. 그놈들 위에 서서 밟아 줘야지.”
“말이 쉽지, 나 같은 놈이 뭘 할 수 있겠어요?”
“그거야 네 마음먹기에 달린 거지. 나 봐. 고아원 출신이라도 지금은 나쁜 놈 잡잖아.”
고아원 출신이라는 말에 놀라는 소년을 보며 상훈이 미소 지었다.
* * *
드라마가 끝이 나자 참여한 스탭들은 당분간 휴식에 들어갔지만 경우는 여전히 회사에 출근해 그동안 드라마에만 전념하느라 하지 못한 업무를 처리하기에 바빴다. 그의 부름에 온 김강철이 투덜대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대표라고 좋은 건 하나도 없단 말이지.”
“됐고, 대만 쪽에 쓸 PPL 목록은 가지고 왔어?”
“여기.”
서류를 넘겨준 김강철이 새삼스럽다는 듯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또 뭐가?”
“그렇잖아. 너 처음 드라마 쓴다고 했을 때만 해도 진짜 어이없었지. 오죽했으면 지선 누님이 그랬겠어. 책 한 줄도 안 읽는 애가 무슨 드라마냐고. 근데 한국도 아니고 대만까지 진출했단 말이야. 앞으로 너의 행보가 참 기대된다.”
“기대할 거 뭐 있냐? 이미 뻔해 보이는데.”
“보이다니?”
“세계 정복! 난 드라마로 세계 정복할 거다.”
“하여간 엉뚱하기는. ……근데 그게 영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김강철의 말마따나 처음엔 그저 오랜 꿈이었던 드라마 작가가 되기만 한다면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 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고 더 큰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경우는 자신이 꿈꾸고 바라던 일들이 불가능할 것만 같진 않았다.
“참, 박현호 쪽 소식 들었어?”
“아니. 내가 그쪽 소식을 들어야 해?”
“그쪽에선 널 참 신경 쓰는데 네가 이런 반응인 줄 알면 참 서운할 거야. 그래도 알고 있는 게 좋겠지? 듣자 하니 연말에 방송할 대작을 준비한다고 하더라고.”
“대작? 그놈은 왜 그렇게 대작에 목을 매? 보나 마나 종편 띄우려고 그러는 거겠지. 참 애쓴다.”
“아니던데. SBC에서 한다고 들었어.”
“SBC?”
“응. 시놉이 꽤 괜찮게 나왔다고 하더라고.”
“도대체 또 무슨 꿍꿍인데? 작가가 누구란 소리는 못 들었어? 아니면 제목이라도?”
“김준원 작가라고 하던데 제목은 잊어버려서…… 무슨 사람 이름 같았는데.”
그 말을 듣던 경우는 뭔가 잊어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