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34화 (134/250)
  • #134.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4)

    “아까부터 뭘 그렇게 보고 있는데?”

    “아, 이거?”

    경우에 말에 김강철이 들어 보인 것은 대만 여행 가이드북.

    <뫼비우스>의 대본 집필이 끝난 후 나상재와 마지막 상의를 거쳐 수정까지 모두 끝마치자 경우는 제작부 PD들이 골라 준 드라마 대본을 대만의 린이췐에게 보냈다.

    대만의 드라마 분위기와 전혀 색다르면서도 거부감 없는 재미있는 스토리에 흡족한 린이췐의 반응에 결국 대만으로 날아가게 된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이유로 상기되어 있었다.

    “우리 여행 가는 거 아니다만.”

    “그래도 대만은 처음이잖아. 당일 치기도 아니고 며칠 있는다면서? 그럼 당연히 일 끝나고 시간도 남을 텐데 이왕 대만까지 갔으니까 좀 둘러보면 좋잖아.”

    “전에 미국 가게 됐을 땐 엄청 투덜대더니.”

    “그때야 갑자기 가게 돼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잖아.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나쁘지 않더라고. 내가 또 언제 미국땅을 밟아 보겠어? 그것도 내 돈 안 들이고 말이지. 그래서 해외 출장을 갈 땐 실속을 차리기로 했다.”

    경우는 한껏 상기된 김강철의 얼굴에 괜히 짜증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놈을 데리고 오지 않는 건데.

    영어는 수준급으로 하는 것과 달리 경우는 그 외의 언어엔 젬병이었다.

    대신 입사 후부터 김강철이 중국어 공부도 했다는 소리에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 낫겠지 싶어 같이 가기로 한 거였다. 대만어와 중국어가 조금 차이가 있다고 해도 사투리 수준이라 결국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다고 들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너 안 데리고 오는 건데.”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그러지 맙시다, 도련님.”

    “너 전부터 생각한 건데 은근히 나 놀리고 싶으면 도련님이라 그러더라?”

    “그걸 이제 알았어?”

    짜증이 있는 대로 난 경우는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오르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호텔에서 통조림할 거라 관광은 어려울 것 같은데?”

    “통조림? 갑자기 웬 통조림?”

    “호텔 안에 가둬두고 글만 쓰게 하는 거. 원고가 다 끝났다고는 해도 저쪽 의견 받아서 수정해야 할 거 아냐. 외국까지 와서 일을 대충하면 안 되지. 나라 망신 시킬 일 있냐?”

    “그래? 근데 그거랑 관광이랑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글이야 네가 쓰는 거지, 내가 쓰는 게 아니잖아?”

    “내가 뭐라고 했어? 가둬 두는 거라고 했잖아. 호텔에 혼자 있으면 그게 가둬 두는 거겠냐? 호텔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도록 네가 옆에서 감시해야 할 거 아냐?”

    “결국 그 말은 내가 너를 감시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 어디 가지 못하고 네 옆에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 경우를 향해 김강철이 소리쳤다.

    “이 사악한 놈. 그게 어떻게 너를 가두는 거냐? 나를 가두는 거지. 그렇게 내가 노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거냐?”

    “무슨 소리야. 나는 널 놀게 하고 싶지. 근데 놀러 온 게 아니잖아. 일을 해야지. 안 그래?”

    “이 밴댕이 소갈딱지! 하여간 나 좋은 꼴은 못 보지.”

    “그런 사람이 고생했다고 외제차를 선물했겠냐? 그만 투덜대고 잠이나 자. 어차피 대만 가면 눈에 불을 켜고 나 지켜야 할 거 아냐? 잠도 못 잘 텐데 미리 자 둬야지.”

    “대만까지 몇 시간이나 된다고…….”

    불행한 앞날에 투덜대던 김강철은 손에 들고 있던 대만 여행 가이드북을 얼굴에 덮고 잠을 청했다. 금세 곯아떨어진 그의 모습에 경우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2시간 30분 남짓한 비행을 끝내고 타오위안 국제공항에 도착한 이들은 마중을 나온 린이췐을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대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생각보다 가깝네요.”

    “그렇죠. 생각보다 대만과 한국이 멀지 않습니다.”

    그들은 곧장 TDS로 가 고위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방송국을 둘러봤다.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점에 신기해하며 견학을 끝낸 뒤 회의실로 들어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빨리 대본을 보내 주실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미리 써 두었던 게 여러 편 있었거든요. 그 중 대만과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고른 건데 린이췐 씨께선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삶만큼이나 사람들은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궁금해하니까요.”

    “누구나 결국엔 죽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없잖아요. 언젠간 오겠지만 아직은 먼, 그래서 나와는 관련 없는 일처럼 생각되죠. 근데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게 죽음이죠.”

    경우가 린이췐에게 보낸 드라마 대본 <디 엔드>는 주인공의 죽음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는 내용이었다.

    착하고 선량하게 살아왔던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저승사자가 찾아와 그를 저승으로 데리고 가려 하지만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일 때문에 주인공은 결국 도망치고 망자의 신세로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주인공은 마침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생각해 보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죽음 이후의 세계가 크게 다르지 않더라구요. 착하게 산 사람은 천국을 가고 나쁘게 산 사람은 지옥을 간다는 건 어느 나라나 똑같잖습니까?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건 자연의 순리니까요.”

    “참, 제가 여기 오면서 좀 알아봤는데요. 대만은 음력 7월이 귀신의 달이라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저승의 문이 열려 귀신들이 이승으로 몰려온다고 믿고 있죠. 그런 것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드라마를 이쪽 문화에 맞게 수정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스토리에 귀신의 달을 적용해서 수정을 해 보는 건 어떨까 하는데요.”

    메모까지 하면서 수정 방향을 설명하는 경우의 말에 린이췐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통역을 부탁해 따라왔더니 린이췐의 수준급 한국어 실력에 김강철은 입도 떼보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심 풍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면 뭐 하나 그림의 떡인 것을.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그럼 수정은 민 작가님께서 직접 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하죠. 그래서 당분간 대만에서 지내려고 레지던스를 예약해 놓은 상태입니다.”

    “진작 저희 쪽에 말씀해 주셨으면 저희가 미리 준비해 드렸을 텐데요.”

    처음 대만행이 결정되자 린이췐은 최대한 경우의 편의를 봐주겠다며 숙소를 잡겠다고 했지만 경우가 말렸다. 굳이 남아서 수정을 하겠다고 한 건 자신이었으니 그들에게 드라마 외적으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방송국에서 잡아 주는 숙소가 얼마나 괜찮겠냐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단 며칠을 있더라도 일 때문에 지내는 건데 될 수 있으면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럼 일단 저녁부터 드시죠. 제가 타이베이 101 빌딩 레스토랑에 예약해 두었습니다. 전망대도요. 듣자 하니 외국에서 오신 분들이 많이 관광을 가는 코스라고 하더군요.”

    타이베이 101 빌딩이란 소리에 김강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으니 분명 비행기 속에서 보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였다. 비행기만 타고 왔다가 일만 하고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 들어 봤습니다. 대만에 오면 꼭 가 봐야 하는 관광지라고 하던데 레스토랑까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자신 있게 권하시는 걸 보니 맛집인가 보죠?”

    “글쎄요, 저도 처음입니다. 그 앞을 자주 지나가기는 하지만 들어가 본 적은 없어서요. 작가님 덕분에 저도 처음 구경하는 겁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서울 살면서 남산 타워를 아직도 안 가 봤거든요.”

    경우의 말에 그들은 웃으면서 방송국을 나갔다.

    * * *

    다음 날부터 경우는 정말로 호텔에 틀어박혀 대본을 수정했다. 말이 수정이지 이건 거의 처음부터 다시 쓰는 수준이었다.

    같은 동양권 문화다 보니 유사한 점도 많았지만 디테일을 따지면 다른 게 너무 많았다.

    일례로 저승사자만 해도 한국은 허여멀건 얼굴에 파랗다 못해 검은 입술, 옷마저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이들을 떠올리지만 대만은 흑백무상이라고 명칭부터가 달랐다. 흰 도사복에 흰 관모를 쓴 백무상과 검은 도사복에 검은 관모를 쓴 흑무상이 짝을 이뤄 다니는데 그들을 흑백무상이라 일렀다.

    7급 공무원보다 조금 위였다는 저승사자와 달리 흑백무상은 망자를 천국으로 데려갈지 지옥으로 데려갈지 결정할 정도로 권한도 막강했다.

    착하게 산 덕분에 백무상과 함께 천국으로 갈 예정이었던 주인공은 결국 그 손을 뿌리치고 도망쳐 혼령으로 결국 이승을 떠돌게 된다.

    규칙을 어긴 탓에 결국 천국으로 가는 기회를 박탈당한 주인공. 주인공은 이제 흑무상에게 잡히면 곧바로 지옥으로 갈 처지다.

    시시때때로 망자의 영혼을 수거하려는 흑백무상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주인공. 거기다 떠돌아 다니는 혼령을 잡아먹고 힘을 키우는 악귀들을 피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루고 싶은 것이 있던 주인공은 다른 귀신들의 도움으로 귀신의 달 저승의 문이 열릴 때까지 흑백무상에게 잡히지 않으면 무사히 저승으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에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이승에서의 마지막 일을 마친다.

    하지만 저승의 문이 열리기 하루 전날 흑백무상에게 잡히는 불상사가 발생하는데…….

    수정된 대본을 읽는 김강철의 태도가 진지했다.

    “이거 이렇게 바꾸니까 진짜 색다르다. 한국 드라마 같지 않아.”

    “그래?”

    “어. 그리고 재밌어. 이 흑백무상이랑 악귀가 간간이 나오니까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네. 덕분에 드라마가 지루할 새가 없다고 할까? 중간에 주인공 돕는 다른 혼령들 이야기도 생각할 거리를 주고 말이야. 어쩐지 어릴 때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도 난다.”

    사실 이 드라마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바로 할머니였다.

    외롭고 힘들었던 순간 다시 한번 돌아가신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하면 쓴 글이었으니 김강철의 저런 감상도 이해가 됐다.

    호텔에서의 통조림을 끝내고 린이췐에게 대본을 보내자 순식간에 읽은 그가 감탄을 하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짧은 시간에 대본을 이 정도까지 수정하시다니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마음에 들기만 하겠습니까? 이대로 제작만 하면 시청률은 물론 화제성까지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그거야 뚜껑 열어보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죠.”

    “더 손볼 것도 없이 이대로 번역만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아예 대만 작가가 썼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예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국에서 대본 쓰듯이 자료 조사를 한다고 했는데 어쨌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원고까지 넘겼으니 경우로서는 할 일을 다 한 셈이었다.

    “참, <뫼비우스> 상황에 대해선 들으셨습니까?”

    “아니요. 그쪽은 제 담당이 아니라서…….”

    “지금 번역을 하는 중입니다. 끝나는 대로 더빙을 할 수 있도록 배우들과 싱크로율이 맞는 성우들로 캐스팅도 마친 상태입니다. 편성은 프리미엄 시간대가 될 것 같습니다. 솔직히 방송국 안에서도 기대하고 있는 눈치거든요.”

    생각보다 빠른 진행 상황에 경우가 놀랄 정도였다.

    다소 무리한 일정이 아닌가 싶었지만 한국에선 드라마를 일주일에 2편 방송하는 것과 달리 대만에선 일주일에 1편 방송하기 때문에 그렇게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잘만 하면 한국에서 <뫼비우스>가 끝나기 전에 이곳에서 방송을 시작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도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대만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경우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얼마 후 린이췐으로부터 <뫼비우스>가 첫 방송을 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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