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33화 (133/250)
  • #133.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3)

    매일 쉬지 않고 일어나는 각종 사건에 오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노필규는 샤워실에서 간단히 씻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꾸벅꾸벅 졸다 책상으로 아예 엎어진 조 순경에게 이불 대신 겉옷을 덮어 주던 그때 갑자기 커진 TV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 바람에 조 순경 역시 잠에서 깨어났다.

    “TV는 왜? 조 순경 자게 냅두지.”

    “아, 형님. 이거 그놈아 때문에 켜는 거라고요.”

    “벌써 시작했어요?”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물어 보는 조 순경의 꼴에 노필규는 어이가 없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피곤하면 잠이나 더 자지 뭘 보겠다고 일어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 작가님 드라마잖아요. 저 드라마 쓴다고 한동안 여기 와서 취재했잖아요. 어떻게 보면 저 드라마에 우리도 일조 한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봐 줘야죠. 한 사람이라도 더 봐 줘야 시청률도 오르고 그게 결국 작가님 돕는 거잖아요.”

    “이 바보야, 그냥 본다고 시청률이 올라가냐?”

    “드라마 보면 당연히 시청률 올라가고 그런 거 아니었어요? 그럼요?”

    “조사 업체에서 사람들을 선정해서 어느 채널을 보는지 조사하는 무슨 장치를 단다고 하더라. 그걸 달아야 조사가 된다나 뭐라나. 그러니까 네가 아무리 본다고 해도 시청률이 1도 안 오른다는 거지.”

    “왜 그런 말씀을 이제야 하시는 거예요? 전 제가 열심히 보면 시청률이 올라가는 줄 알았죠.”

    “왜? 그럼 이제부터 드라마 안 볼 거냐?”

    “그럴 수야 없죠. 사람이 의리가 있지. 어쨌든 민 작가님이 노 경사님한테 눈칫밥 먹어 가면서 고생해서 쓴 거잖아요.”

    “왜 불똥이 나한테 튀어?”

    “그야 노 경사님이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그러면서 유독 민 작가님한테는 쌀쌀맞게 하는 거 있잖아요. 원래 무뚝뚝하기는 했지만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게. 하여간 민 작가님도 대단하시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웃으면서 대하셨잖아요.”

    “하긴. 그 정도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할 만하지.”

    “내가 뭘 어쨌다고…….”

    “형님 좀 그런 거 있수다. 자기 손으로 잡아넣고 출소해서 찾아오는 놈들한테는 밥 사 줘, 술도 사 줘, 용돈까지 쥐여 주면서 세상 둘도 없는 사람처럼 대하잖아요. 근데 민 작가한테만 서릿발처럼. 솔직히 좀 너무 했지. 그 형님 친구 조카, 지금 잘나가는 모델 됐다면서요? 본인하고도 다 풀고 잘 지낸다고 하던데 형님이 중간에서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수?”

    두 놈이 짜고 자신을 몰아붙이는데, 어이가 없었던 노필규는 뭐라고 말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드라마가 막 시작하는 바람에 결국 입도 떼지 못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싶다가도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노필규가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조 순경과 박 경장은 쿵짝 맞춰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근데 드라마라 그런지 과장된 면이 많아요. 그쵸?”

    “극적 전개라잖아. 너무 사실적으로 그리면 재미없어서 누가 보냐?”

    “솔직히 잠입 수사는 해도 저렇게 조직 안에 들어가고 그러진 않잖아요.”

    “드라마나 영화처럼 저렇게 잠입하기가 쉽나. 요즘 조폭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아마 경찰대 졸업한 사람 누구누구인지 다 파악하고 있지 않겠냐?”

    “듣기론 싹수 봐서 일부러 접근한다고도 하던데, 정말 조폭한테 상납 받는 경찰이 있을까요?”

    “나야 모르지. 에휴, 그런 식으로 의심하기 시작하면 일 못한다. 그냥 서로 믿고 가는 거지.”

    “근데 저 드라마에 나오는 광수대요. 우리를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래도 한 팀장님이 노 경사님 같단 말이죠?”

    “무슨 소리. 딱 봐도 한 팀장, 배신자 같은데. 전에 경찰에 프락치 있는 거 떡밥 나왔잖아.”

    “언제요?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그러면서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두 사람의 눈치에 결국 폭발한 노필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라마 볼 거면 드라마만 봐.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아? 보기 싫으면 끄던가!”

    “아니에요, 아니에요. 입 다물고 볼 게요.”

    손사래를 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결국 자리에 앉는 노필규였으나 두 사람의 수다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은근히 찔려서 저래요.”

    “내말이.”

    노필규가 한숨을 내쉬며 째려보자 그들의 시선은 얼른 TV로 향했으니 평소 뉴스를 보기 위해 놔둔 TV가 오랜만에 드라마를 내보내고 있었다.

    첫 드라마 취재 때와 달리 경우가 유명인이 된 탓에 그의 취재는 역산 경찰서의 다른 부서에도 큰 뉴스였으니 이 드라마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행히 현실적인 표현이 많았다는 경찰서 내부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었다.

    입을 벌린 채 드라마에 빠져든 박 경장과 조 순경을 보며 피식 웃던 노필규는 눈앞에 쌓인 서류 작성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힐끔 드라마를 보게 되었으니 생각보다 재미있는 내용과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현실적인 캐릭터에 놀라는 중이었다.

    마침 조직에서 맞닥뜨린 이상훈과 박경택의 긴장감이 고조된 순간이었으니 노필규는 서류를 작성하던 것도 잊은 채 결국 드라마에 집중하고 말았다.

    * * *

    “이사님, 이놈이 제가 말씀 드렸던 그놈입니다.”

    손이라도 비빌 기세의 조원태와 달리 덤덤하게 서 있는 이상훈의 모습에 김학범은 살짝 미소 지었다.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에도 당황하지 않은 이상훈의 모습에 김학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 좋네. 사람은 말이야,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을 알 수 있다고 하거든.”

    “…….”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 봐. 원태 네가 교육 잘 시키고.”

    “네, 이사님.”

    면접이 통과한 것 같아 기분이 좋은 조원태와 달리 무덤덤한 이상훈은 김학범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아, 나가면서 박 실장 들어오라고 해.”

    “네, 이사님.”

    조원태가 먼저 나가고 티나지 않게 김학범을 살핀 이상훈.

    그 사이 박경택이 들어오고 아주 잠깐 박경택과 이상훈 사이에 불꽃 튀는 눈빛이 오간다.

    마침내 문이 닫히고 김학범 앞에 선 박경택.

    “부르셨습니까?”

    “방금 나간 그놈, 뒤 좀 캐 봐.”

    “네?”

    “박경택 답지 않게 왜 이렇게 당황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잖아. 원태 저 새끼가 데려온 그놈 말이야, 날 보고도 당황하지 않더란 말이지. 그런 놈들은 딱 둘 중 하나지. 우리 쪽 정탐하려는 짭새 끄나풀이거나 아니면 박 실장 같이 크게 될 놈이거나.”

    “…….”

    “박 실장이 잘 살펴. 만약 짭새 쪽 끄나풀이면 박 실장 손으로 직접 처리해. 아니라면 박 실장이 잘 키워 봐. 괜찮은 재목이 될 것 같으니까.”

    “네.”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박경택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이 오빠 되게 잘생겼다. 누가 보면 배우라고 하겠어.”

    이상훈의 옆에 앉은 아가씨가 자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그의 시선을 끌기 위해 괜히 그의 얼굴을 찔러보며 끼를 부리고 있었다. 귀찮다는 듯 여자가 낀 팔짱을 빼 버리는 그의 모습을 아가씨가 귀엽게 보고 있었다.

    “하여간 수줍어 하기는. 난 이렇게 튕기는 오빠가 매력적이더라.”

    “적당히 해 둬. 여자가 그렇게 달려들면 남자는 도망치기 마련이야.”

    클럽 매그넘.

    한 식구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축하주 한 잔 하자고 온 곳이 바로 이곳. 조원태의 똘마니들과 함께 룸을 잡고 아가씨들까지 불러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역시나 이상훈이 의심했던 것처럼 이곳이 진권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정보를 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몰래 확인해 보니 박경택이 보낸 문자였다.

    ‘나 좀 잠깐 봐.’

    눈에 띄지 않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이상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길 잃어버리지 말고 조심하고.”

    “오빠, 내가 화장실까지 데려다 줄까?”

    코맹맹이 소리에 이상훈이 그녀를 째려보자 조원태가 말렸다.

    “넌 좀 빠져. 너 때문에 화장실 간다는 거 아냐?”

    “내가 뭘?”

    투덜대던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룸을 나온 이상훈이 주변을 살폈다. 마침내 박경택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상훈의 손을 잡고 비어있는 룸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쿵쾅대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룸 안까지 들렸다.

    “너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와? 김학범 그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 알기나 해?”

    “그러는 형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건데?”

    “…….”

    “여기가 형이 일하는 정육점이었어? 형이 배운다는 정형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야? 부창환도 형이 죽인 거야?”

    “이상훈!”

    누구 때문에 내가 이곳으로 기어들어왔는데?

    내가 뭣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박경택은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도 그의 등을 떠밀지 않았다. 결국 이런 선택을 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뭣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 하지만 김학범은 네가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냐. 경찰이든 검찰이든 정보를 빼내 올 자기 사람을 어디에나 심어 놓고 있다고. 그 인간은 사람을 믿지 않아. 벌써 너를 의심하고 있다고!”

    “내 몸 하나쯤 내가 건사할 수 있어. 형이야말로 입조심해. 괜히 이렇게 보는 눈 많은 데서 사람 불러내지 좀 말고.”

    돌아서서 나가는 이상훈을 보며 박경택이 그를 불렀다.

    “상훈아!”

    멈춰 선 채 등을 보인 그에게 박경택이 낮게 말했다.

    “조심해.”

    “형이야말로 내 손으로 형한테 수갑 채우는 일만은 하지 않게 해 주라.”

    그렇게 차갑게 나가 버린 이상훈의 모습에 박경택은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한편 문 밖에 선 이상훈 역시 자신이 한 말에 상처 받은 얼굴이었다. 다시 룸으로 돌아간 그는 쉼 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보는 조원태.

    “천천히 마셔, 천천히. 밤은 길고 술은 얼마든지 많으니까.”

    * * *

    <뫼비우스>의 방송이 끝난 후 마지막 회 집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경우와 신도현은 날이 샌 뒤에야 원고를 끝낼 수 있었다.

    나상재와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 보고 수정을 해야겠지만 원고가 끝이 나자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수고하셨어요.”

    “작가님도요.”

    “배도 고픈데 근처에서 해장국이나 하고 들어가죠.”

    그렇게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 마침 그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옆 회의실에서 나온 모기범 PD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 작가님 집필 끝나셨어요?”

    “네, 혹시 나 기다린 겁니까?”

    “작품 선정이 이제 막 끝났거든요.”

    이 아침에 끝냈다는 말에 살짝 의아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모기범의 말에 그를 따라 옆 회의실로 들어간 경우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패잔병처럼 쓰러진 제작부 PD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혹시 퇴근 안 하시고 날을 새신 거예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퇴근하려고 했는데요, 저희도 드라마 제작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재미있는 대본을 보면 멈출 수가 없어서 말이죠.”

    신도현 역시 재미있는 드라마는 재방에 삼방까지 날밤 새워 가며 보던 게 일상이라 모기범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떤 거죠?”

    “이거요.”

    모기범이 내민 대본을 받아 든 경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작품이었군요. 저도 어쩐지 그럴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

    “이거 무슨 내용인데요? 저도 좀 봐도 될까요?”

    호기심을 보이는 신도현을 막아선 것은 경우였다.

    “나중에요. 오늘은 이만 쉬시죠.”

    경우의 제지에 신도현은 그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회의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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