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2)
박현호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보다 구겨 버렸다.
그가 비공개 계정에 올려 둔 사진이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김강철의 손에 들어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는 짓마다 밉상인 민경우도 그렇지만 그 아래에 있는 놈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하필 그런 놈에게 약점을 잡힌 것 같아 기분이 아주 불쾌했다. 놈을 빼내 민경우에게 엿을 먹일 생각이었으나 도리어 자신이 엿을 먹어 버린 상황.
잘못 건드렸다가는 이 사진들까지 유포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건드리지 않으면 유포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기는 했으나 마냥 그 말을 믿을 수만은 없는 일.
그렇다고 건드렸다가 괜히 긁어 부스럼 되지는 않을까 그게 더 걱정이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 되자 박현호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했다.
비공개 계정의 사진을 모조리 삭제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 그는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한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잔기술이 먹히지 않을 땐 역시 정공법으로 가는 수밖에.
그는 내선 전화로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진원 대표 오늘 중으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러고는 켜 둔 컴퓨터 화면에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가고 말았으니 경우의 대만 드라마 집필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색다른 홍보로 기대감을 끌어올렸던 드라마 <뫼비우스>는 유의미한 성적을 낸 첫방 이후 연일 시청률이 상승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전해진 작가 민경우의 해외 드라마 집필 소식은 사람들이 열광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지금까지 경우가 집필하거나 참여한 드라마가 모두 흥행에 성공하자 그를 송지현의 뒤를 잇는 흥행 보증 작가, 믿고 보는 드라마 작가라고 띄워 주고 있었다.
단순히 한류의 인기로 드라마 수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작에까지 참여하게 된 큰 사건이라며 다들 고무적인 반응이라 박현호로서는 더욱 짜증 나는 일이었다.
분명 드라마 제작사로는 ‘유니언 스튜디오’가 최고였는데 언제부턴가 ‘유니언 스튜디오’ 보다 ‘스튜디오 글로리’에 관한 기사가 많아졌으니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하는 드라마는 괜찮은 드라마, 일단 한 번은 봐야 한다는 인식이 더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업계 최고라는 자리마저 위태로워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 무슨 수를 써서도 그 자리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게 박현호의 생각이었다.
* * *
불러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박현호의 모습에 오진원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회사는 아예 넘겨 버리고 유유자적 취미 생활이나 하면서 지낼 것을. 다 늙어서까지 무슨 욕심으로 자리에 연연했는지 후회하는 중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은 그때 드디어 박현호가 입을 열었다.
“유니언에 소속된 작가들 중에 제일 잘나가는 작가가 누가 있습니까?”
“일단 오연옥 작가님이-.”
“그 여자는 뺍시다.”
“네. 오연옥 작가 다음으로 고료를 많이 받고 시청률도 잘 나오는 작가를 이르신다면 역시 김준원 작가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준원 작가요?”
김준원.
지난번 우재환이 출연했던 <암흑의 그림자> 작가로 여자 작가가 대부분인 드라마계에 선이 굵은 작품을 주로 쓰는 작가였다.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중타 이상을 치는 나름 팬덤을 형성한 잘나가는 작가였다.
“혹시 다음 채널 DBN의 드라마 편성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솔직히 너무 조급했어요. 하루 아침에 종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걸 인정했으면 좋았을 것을. 어쨌든 채널 DBN에 올인하는 건 그만하기로 했습니다. 차근차근 시청자를 끌어모으도록 방법을 바꿔야죠.“
“그럼……?”
“혹시 김준원 작가님 지금 작업하고 계신 건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 김준원 작가님은 드라마가 끝이 나면 한 달 정도 쉬신 다음 곧바로 다음 작품 구성에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 오래 작품을 손에서 놓아 버리면 다음 작품이 나오기까지 상당히 오래 걸리는 편이라 작가님 스스로 조절한다고 하더군요.”
“관리에 철저하신 분이군요.”
“그래서 항상 그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은 차기작 구상에 여념이 없을 겁니다.”
“그럼 대표님이 직접 김준원 작가님의 현재 작업 상태를 체크해보시죠. 작가님만 괜찮으시다면 차기작 곧바로 편성 받을 수 있도록 힘을 써 보겠다고 하시죠.”
갑작스러운 제안에 오진원의 눈이 커졌다.
“이렇게나 빨리요?”
“아, 편성은 SBC가 좋을 것 같네요. 지금 국장이 전효상이라고 했죠? 지난번 우리한테 진 빚도 있으니 이참에 그 빚 갚으라고 하면 되겠군요.”
전효상이 SBC 드라마국 국장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박현호가 있는 채널 DBN의 모기업인 대진일보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경우의 농간으로 ‘유니언 스튜디오’를 까는 기사를 냈으니 박현호는 지금 그때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거기다 오진원이 전효상의 대학 2년 선배라 박현호는 편성 자체가 그렇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만드는 드라마보다 더 시청률이 잘 나오는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게 일차적 목표였다.
그리고 그 다음엔…….
박현호의 머릿속이 복잡한 것과 다르게 오진원은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지 자못 불길해졌다.
어쨌든 박현호가 예상했듯 김준원 작가의 다음 작품이 SBC의 편성을 받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 * *
회의실에 모인 ‘스튜디오 글로리’의 제작부 PD들은 갑작스런 대본 폭탄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작가님, 도대체 이 많은 대본들은 다 뭐죠?”
“그동안 제가 차곡차곡 써 두었던 겁니다.”
“이, 이 많은 걸 언제 다 쓰셨대요?”
경우의 말에 제작부 PD들은 물론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언젠가 미국 드라마를 직접 제작해 볼 계획도 가지고 있던 경우는 이번 기회에 대만 드라마를 그 시험 단계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가 미국의 드라마나 영화 같은 수많은 매체를 통해 그들 문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과 별개로 그 반대의 경우는 그렇게 쉽지 만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류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문화가 여러 나라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모든 작품이 다 인기를 끄는 건 아니었다. 한국 안에서 흥행한 몇몇 드라마에 한정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미 인기가 검증된 작품과 달리 아예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번 경우는 차원이 다른 문제.
때문에 이번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향후 ‘스튜디오 글로리’가 나아갈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었기에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 경우는 능력 있는 제작부 소속 PD들 몇을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가 쓴 드라마가 8편은 됩니다. 모두 16부작이고 시놉은 물론 대본 완결까지 마친 상태죠.”
“이, 이 많은 걸 전부 작가님이 쓰셨어요?”
“그럼 누가 씁니까?”
경우의 지적에 모기범이 당황하고 말았다.
“아, 그러니까 제 말은 작가님 계속 바쁘셨는데 언제 이런 걸 쓰실 시간이 있으셨는지 뭐 그런…….”
횡설수설하는 모기범의 말에 경우가 웃으며 답했다.
“예전부터 틈나는 대로 쓴 겁니다. 근데 제가 지금 드라마를 쓰고 있는 처지라 아무래도 직접 하긴 지금으로썬 무리일 것 같아서요. 그래서 여러분들께 부탁을 좀 드릴까 하는데요.”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에 온 신경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 그렇다고 멀리서 부탁해 온 사람을 마냥 기다리게만 할 수도 없는 일 같아서 경우는 제작부 PD를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현재 대만에서 흥행하고 있는 드라마를 보고 경우가 이미 쓴 대본 중에 대만의 환경에 가장 어울릴만한 드라마를 선택해 달라며 부탁했다.
경우 역시 과거 대만 드라마를 본 적은 있었지만 몇 편에 불과했고 대만 사정에 훤한 것도 아니었으니 이럴 때 회사 식구들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어쨌든 작가 민경우,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스튜디오 글로리’ 회사 차원의 일로 커진 탓이었다.
사실 경우는 린이췐이 제안에 승낙을 하면서 조건을 하나 걸었으니 ‘스튜디오 글로리’의 제작진 일부가 대만으로 건너가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는 게 그것이었다. 그건 린이췐이 생각하는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었으나 이미 대만에도 새명 그룹이 진출해 있었으니 제작비를 지원하는 선에서 의외로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역시 어디를 가나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거의 없었다.
우호적인 언론사를 통해 연일 기사를 쏟아 내는 덕분에 ‘스튜디오 글로리’의 홍보 효과도 엄청났으니 제작부 PD들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소식을 듣고 온 작가들은 자신들 눈으로 확인한 대본의 양에 놀라고 말았다.
“작가님, 제가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니죠?”
“사람이 저 정도의 대본을 틈나는 대로 쓸 수 있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군요. 그동안 전 뭘 하고 있었던 걸까요?”
“민 작가님 드라마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하지 않았었나?”
“정말 세상은 불공평한 거였네요. 그냥 부자도 아니고 재벌집 아들이 솔직히 저런 능력까지 있으면 저건 완전 사기죠!”
“전부터 생각하던 거지만 민 작가님한테는 정말 벽이 느껴지네요. 넘사벽.”
“작가님 능력이 다 돈빨이라고 하는 사람들 이거 와서 봐야해. 어디다 소문낼 데 없을까요?”
“인성도 좋은데 능력은 더 좋아. 세상에 이렇게 다 가진 사람이…… 있었네.”
남다른 경우의 능력에 한동안 작가들은 좌절감에 빠져 글을 쓰지 못했다는 후문이 전해지는 가운데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경우는 <뫼비우스>를 집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현재 드라마는 8부까지 방송된 참이었다.
시간 차를 두고 살해당한 두 사람, 최호와 부창환 사이의 연관성을 찾던 이상훈은 결국 마약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해외 출장이 잦은 최호가 외국의 마약 조직과 접선해 물건을 들여오고 부창환의 나이트클럽에서 판매를 했을 거라는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거기엔 진권파라는 거대한 조직이 엮여 있었으니.
꽤 오래 전부터 진권파를 잡으려 준비했던 한팀장은 수사국장에게 이상훈에 대해 보고하고 결국 그의 지휘 아래 소수만 아는 작전을 세워진다.
바로 이상훈이 진권파에 잠입해 수사를 이어나 가도록 한 것이다.
그동안의 수사로 인해 조직의 일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한팀장은 2인자인 김학범의 바로 밑에 속한 조원태를 타깃으로 삼으라 지시한다. 일부러 그에게 접근한 이상훈은 결국 조직에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박경택을 마주하고 말았으니 조직 안에서 두 사람이 마주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며 8부가 끝이 났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 방송 진행 상황이었고 사실 드라마 집필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대본은 마지막 회 단 한 편을 남겨 놓고 있었기에 어떻게 인상 깊은 마무리를 지을지 고심하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마지막 회는 작가들이 알아서 하라며 떠나 버린 나상재 탓에 두 사람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이미 어떻게 결론을 낼지는 짐작하고 있는 상황.
“역시 극적인 엔딩을 위해서는 죽음밖에는 없겠죠.”
“네. 아무래도 죽여야 할 것 같아요.”
마침내 두 사람의 마지막 회 대본 집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