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1)
대만의 TDS 방송국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는 린이췐은 최근 드라마 편성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핵심 시간대였지만 올라오고 있는 드라마 기획안은 신선한 건 하나 없고 죄다 어디서 본 듯한 것들뿐이었다.
물론 규모가 작다 보니 제작에 한계가 있다는 건 그 역시 잘 알고 있었지만 비단 돈 문제만은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제작비야 당연히 많이 들이면 더 좋은 퀄리티의 드라마를 뽑아낼 수 있다고 해도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듯 대만 드라마는 친숙한, 이미 검증된 이야기에 익숙해져 버렸다.
거기다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은 거액을 제시하는 중국 쪽으로 가버렸으니 인재도 없고 환경 자체가 소극적으로 변해버렸다.
선배들은 물론이고 이전에 있었던 이들 모두가 적당히 자리를 지키다 물러나기가 일쑤였지만 어쩐지 린이췐은 선배들이 밟은 그 길을 밟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를 좋아했고 좋은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으나 현실은 점점 암울해져 가고 있으니 그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나 회사 다녀올게.”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하나뿐인 딸이 출근하는 아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게 조금은 화가 났다. 아무리 사춘기라고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싶은 그는 오랜만에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즈치! 아빠한테 인사 안 해?”
“다녀오세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얼굴을 봐야지.”
그러자 힐끔 보며 건성으로 인사하는 딸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뭐라 한소리 하려다 아내가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주는 바람에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사춘기가 무슨 벼슬도 아니고 집에서건 밖에서건 이놈의 자리는 이 모양, 이 꼴이라는 생각에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가방을 챙겨 나오는데 들리는 음악소리.
그것은 아까부터 아빠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딸 즈치가 보고 있는 휴대폰 화면 속에서 들리는 것이었으니. 뭘 보나 싶어 딸의 어깨 너머 작은 화면에 그만 린이췐은 시선을 집중하고 말았다.
이상한 낌새에 즈치가 돌아보니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아빠가 서 있었다.
“아빠, 뭐야? 왜 남의 걸 봐?”
“아니, 그…… 그거 뭐냐? 드라마 같은데?”
“아빠도 드라마 같은 걸 봐?”
“너 이 아빠가 무슨 일 하는 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드라마 만들잖아. 방송국에서!”
“아, 그랬나?”
“그랬나? 아빠한테 관심을 가지라고 하지 않을게. 대신에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겠니?”
“어차피 아빠도 나한테 별 관심 없잖아.”
순간 그동안 일을 하느라 무심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린이췐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딸이 하는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던 것. 미안한 마음에 딸의 눈치를 보던 그는 이 기회에 딸과 대화를 늘려가자 싶은 마음에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근데 말이야…… 우리 방송국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 건데?”
“말하면? 아빠가 알아?”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우리 즈치, 용돈이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안 그래도 용돈이 떨어졌을 것 같아서 좀 주려고 했는데.”
언제 꺼냈는지 지폐를 들고 있는 아빠의 모습에 즈치는 냉큼 돈을 낚아채더니 아빠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거 한국 드라마야. 요즘 한국 드라마 안 보면 친구들이랑 얘기가 안 통한단 말이야.”
“한국 드라마?”
“그래.”
“그 드라마 제목이 뭔데?”
“그게…….”
“화내려는 거 아냐. 한국 드라마가 나쁜 것도 아닌데 뭘. 그냥 아빠가 궁금해서 그래. 아빠 일이랑 관련 있는 거잖아.”
사실 즈치가 머뭇거리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은 불법 다운로드였던 것.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한국에서 방송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드라마를 구해서 저렇게 보고 있는지 린이췐으로서는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물론 그도 과거 한국 드라마를 봤던 적이 있었으니 빠른 전개에 빨려들 것 같기도 했지만 어쩐지 마무리가 죄다 비슷해서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그 이후론 일이 바빠서 볼 시간이 없기도 했다.
그러다 드라마에 심취한 딸의 모습에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생각났으니 린이췐은 딸이 가지고 있다는 드라마 파일을 건네받아 일단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배우들의 열연은 물론 흡인력 있는 전개, 거기다 이 드라마엔 다른 한국 드라마에 없는 특징이 있었으니 과거 아시아를 주름잡던 홍콩 영화에 대한 향수가 떠올랐다.
보통 한국 드라마 하면 떠오르는 게 로맨틱 코미디나 가족극이 대부분.
사실 대만 드라마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평소 봐 오던 대만 드라마와 비슷한 점이 많은 덕에 사람들은 거부감 없이 한국 드라마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사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현상 유지만 하고 있는 대만 드라마와 달리 한국 드라마는 소재의 다양화는 물론 촬영 기법이라던가, 색감, 구도까지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국 드라마와 달리 발전하지 않는 대만 드라마를 보며 더 많은 해외 드라마가 들어오면 결국 그런 드라마들에 잠식돼 도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감마저 느껴졌다. 그러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하다 생각한 그는 한국 드라마에 대해 더 알아본 뒤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한 후 임원들을 설득해 결국 한국, 여기 ‘스튜디오 글로리’까지 날아왔다.
일차적인 목표로는 드라마를 수입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더 중요한 다른 목적이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위해선 드라마 제작사 대표이자 인기 드라마 작가인 경우를 꼭 만나야만 했다.
자신을 찾는 대만 프로듀서의 등장에 영문을 모른 경우는 일단 멀리서 온 손님을 반기며 악수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TDS 프로듀서 린이췐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민경우라고 합니다. 한국어가 참 능숙하시네요.”
“실은 대학교 때 교환 학생으로 한국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국말 많이 배웠죠. 대만에 돌아간 이후 잘 쓰지 않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 만은 아닌가 봅니다.”
“아주 훌륭하세요. 이 정도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정도예요.”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튜디오 글로리의 공식 대표인 김종수는 물론이고 미리 연락을 받았던 김기영 변호사와 창립 멤버이자 제작부 이세길 부장까지 대동한 자리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경우는 그가 수입해 가려는 드라마가 이미 종영한 다른 드라마가 아닌 이제 막 방송을 시작한 <뫼비우스>라는 점에서 놀랐다.
그런 경우의 반응에 린이췐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를 꼽으라면 단연 한국 드라마죠. 여러 드라마가 있지만 최근엔 <뫼비우스>가 가장 인기가 좋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식 수입이 되기 전인데도 저희 딸이 귀사의 드라마를 이미 알고 있더군요. 어차피 지금도 한국 드라마를 많이 수입하는데 인기 드라마를 선점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나중에야 드라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판권부터 비싸게 사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벌써 그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굳이 이런 자리에 자신까지 부른 이유가 뭔지 경우는 궁금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린이췐이 말을 이었다.
“실은 민경우 작가님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제가 이곳까지 직접 오게 된 겁니다.”
“저요?”
“저희 TDS에서 제작하는 대만 드라마의 대본 집필을 해 주시면 어떨까 싶어서요.”
“예? 대만 드라마 집필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어안이 벙벙한 건 경우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영화 감독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아 해외 영화 연출을 한다는 경우는 많이 들어 봤어도 한국 드라마 작가가 다른 나라 드라마를 집필한다는 것은 거의 들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언어.
“저는 한국어나 영어밖에 할 줄 모르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하시던 대로 한국어로 드라마를 쓰시면 되는 일입니다. 지금처럼 해 오셨던 대로 쓰시는 거죠. 부담 가질 것 없이 말입니다. 그럼 번역은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셔도 저는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외국 작가에게 드라마 집필을 부탁한다니요. 단순히 번역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문화 차이도 있고 정서도 다르지 않습니까?”
“민 작가님만 괜찮으시다면 작품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수정을 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수정도 민 작가님의 동의를 얻을 생각입니다.”
“글쎄요. 대만에도 드라마 작가는 많을 텐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려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대만도 90년대 초반까지는 나름 드라마 시장이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방송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케이블에 대한 규제가 많이 낮춰졌어요. 결국 그게 시청률 하락으로 이어졌고 경쟁력도 약화시켰다고 봅니다.”
시청률이 낮아진 탓에 드라마 제작에 투자가 줄어들고 질적으로 하향화 된 드라마가 나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만에서 드라마 회당 제작비 1억이라고 하면 제법 규모가 큰 대작 드라마라고 생각될 정도.
갈수록 높아지는 배우들의 몸값 탓에 웬만한 한국 드라마의 제작비가 2억원을 넘는 걸 생각하면 대만 드라마의 규모가 확실히 작긴 했다. 과거 중화권 드라마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에 비하면 초라한 모습이었다.
“지금 대만 드라마라고 하면 사람들은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만 떠올립니다. 이건 단순히 규모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들이 모험을 하려 하지 않아요. 실패만을 두려워하니 이미 검증된 이야기만 쓰려 하죠. 그래서는 발전이 없다고 봅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대만에서 제작하는 드라마 하나 없이 수입 드라마만 내보내는 지경까지 오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거죠.”
결국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프로그램의 질적 상승밖에 없다는 결론.
아이러니하게도 대만의 인재들이 막강한 중국의 자본에 빠져나간 상황이라 린이췐은 결국 한국, 그것도 최근 대만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의 작가인 경우에게 손을 내밀게 된 처지가 된 것이다.
“지금의 대만의 드라마 제작자들은 타성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변화가 필요하죠. 다 진 경기에서도 한 순간 흐름이 바뀌면 역전이 가능하잖습니까? 저는 민경우 작가님에게 그 바람이 되어 주십사 부탁을 드리러 온 겁니다.”
한국에도 인기가 많은 드라마 작가가 많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경우를 찾아온 것은 그만이 가진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라면 타성에 젖어 든 대만의 드라마 관계자들에게 충격을 안겨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용건을 전한 린이췐이 돌아가고 나니 경우의 고심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어깨를 김종수가 다독였다.
“저도 소싯적에 소설가를 꿈꾸던 때가 있었거든요.”
“대표님이요?”
“왜요? 안 어울립니까?”
“아니요. 드라마 외엔 곁눈질하지 않으실 분이라 생각했을 뿐이에요.”
“뭐, 드라마 못지 않게 소설도 좋아했죠. 그때 생각하기로 노벨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영국의 어느 작은 서점에 내 소설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을 했었죠.”
“소설은 아니지만 대신 드라마가 그렇잖아요.”
“맞습니다. 그러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한국 드라마하고 다르게 생각할 거 뭐 있습니까?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은데. 린이췐 씨가 말했던 거창한 비전 같은 건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지금처럼 조건이 맞으면 할 수 있는 일이고 아니면 못하는 거, 그것만 생각하세요.”
하긴, 대만이라는 나라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 뿐, 해외 진출은 다각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고민을 끝낸 경우는 다음 날 한국에 남아 있던 린이췐을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