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30화 (130/250)

#130. 친구와 원수 그 중간의 어디쯤 (6)

이미 편집을 끝낸 후 한 번 본 드라마였지만 실시간으로 TV에서 방송되는 걸 보는 기분은 남달랐다. 해서 경우는 신도현을 비롯해 나상재와 그때까지도 사무실에 남아 있던 작가 몇 명과 함께 첫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기 지루한 탓이었는지 밝고 쾌활한 성격의 이시연 작가가 운을 띄우자 다른 작가들 역시 달려들었다.

“시청률 내기는 하신 거예요?”

“얼마 모았어요?”

“맞힌 사람이 이번에도 다 가져가는 거예요?”

“전엔 누가 가져가셨나?”

“우리 시청률 내기 하면 거의 다 민 작가님이 가져가지 않아요?”

그러자 일제히 경우를 바라봤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 반응이 없는 경우를 대신해 나상재가 나섰다.

“작가들이 돼서 죄다 궁금한 게 돈밖에 없습니까? 그리고 남의 드라마 내기는 알아서 뭣합니까?”

“우와, 남이라고 편 가르시는 거 봐. 드라마 참여는 안 했어도 같은 회사 식구들인데 궁금하잖아요. 원래 내가 했든 안 했든 내기는 재미있는 거라고요.”

“도박 중독 상담 전화번호는 1336번이에요.”

나상재의 우스갯소리에 다들 웃었지만 단 두 사람, 경우와 신도현은 웃지 못했다.

아무래도 드라마의 특성상 가장 부담을 느끼는 것은 작가였으니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나상재가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드라마 잘 나왔으니까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겁니다. 으하하하.”

“감독님, 어깨 떨리는데요?”

신도현의 지적에 황급히 손을 내린 나상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망한 경험도 많은 베테랑 감독이었음에도 드라마는 처음이다 보니 긴장한 나상재는 물론, 데뷔작을 흥행하면 다음에는 망한다는 속설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신도현 역시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경우는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첫방을 기다리는 그 묘한 긴장감이 현장을 휩쓸고 있었다.

곧이어 드라마가 시작되고 참석한 이들은 저마다의 자세로 드라마를 즐기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학대에 동생을 잃은 후 고아원으로 갈 수밖에 없는 박경택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고아원에 버려져 괴롭힘을 당하던 이상훈에게 죽은 동생을 투영한 박경택은 동생을 대신해 그를 지키기로 한다. 그것이 어디 하나 마음 붙일 데 없는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약해서,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 탓에 나쁜 놈을 잡는 경찰이 되고 싶다는 이상훈의 꿈을 이뤄 주기 위해 가진 것 없고 힘도 없는 박경택은 스스로 조직폭력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이상훈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박경택의 괴로움이 강범석의 연기로 설득력을 더하고 있었다.

70분 남짓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드라마가 끝이 났다.

이미 본 이들은 물론 처음 본 이들까지 드라마에 젖어 쉽게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나상재가 괜히 눈치를 보며 작가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거 뭐라고 말들 좀 해 봐요.”

“아, 감독님. 좀 조용히 하세요. 전 드라마의 여운을 조금 더 느껴야 한다고요.”

“요즘은 아역들도 연기를 꽤 잘하네요. 어린 경택이 안 울려고 입을 앙 다무는데 내가 다 짠해서 혼났어요.”

“원래 아역들이 연기를 잘해도 성인으로 넘어가면 부자연스러운데 싱크로율 장난 아닌데요. 저런 아역들을 어떻게 구했대요?”

긴장했던 것과 달리 작가들의 반응이 좋자 나상재와 신도현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거기다.

“인터넷 반응 장난 아니에요. 악플은 하나도 없고 다 호평인데요? 대박 날 건가 봐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상재의 전화가 울렸다. 끊기만 기다리던 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뭐래요?”

“시청률 나왔다죠?”

“얼마나 나왔대요?”

“최저 18퍼센트, 최고가 23퍼센트 나왔답니다.”

생각보다 높은 시청률에 축제 분위기였다.

“역시 영화만 출연하는 강범석 배우의 효과가 있었던 거겠죠?”

“아까 보니까 연기도 진짜 절절했죠.”

“나이도 있으신데. 그러고 보면 참 동안이에요. 재환 씨하곤 한 열 살 넘게 차이 나는데 극에선 3살 차이로 나오는데도 위화감이 안 들잖아요.”

“전 티저도 괜찮던데요. 1차도 좋았지만 2차가 완전 영화 같았어요. 티저 보고 드라마 재미있을 것 같다고 보겠다는 친구들도 많았구요.”

자신이 만든 1차 티저보다 박종연이 도와준 2차 티저가 더 좋았다는 말에 나상재가 물었다.

“정말 2차가 더 좋았다고 그래요?”

“그 친구 말이 그렇다구요. 전 당연히 1차가 좋았어요.”

눈치껏 애교로 응수하는 통에 결국 나상재도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끝을 내기엔 아쉽다는 의견에 근처 호프집으로 향했다. 내일 일정도 있는 탓에 가볍게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낸 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나 둘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대리를 부르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내던 경우는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차 키가 없는 탓이었다. 김강철에게 주고 나온 뒤 돌려받지 못했다.

평소라면 다음 날 출근하기 전에 바로 가져다줬을 텐데 여태껏 전화 한 통화 없었다. 이대로 집으로 갈까 하다가 술 마신 김에 한번 김강철의 집으로 향했다.

* * *

야근으로 평소보다 늦은 퇴근을 한 김강철은 회사 근처에서 저녁을 먹은 후 텅 빈 냉장고를 떠올리며 근처 마트에 들렀다. 가득 채워 넣을 생각에 제법 많은 양의 맥주를 트렁크에서 꺼내던 그는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 있는 익숙한 그림자에 눈을 깜빡였다. 경우였다.

“저기서 뭐 하는 거야?”

그쪽으로 갈까 하다가 눈앞에 맥주를 본 그는 일단 이걸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부르지 않아도 어차피 곧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맥주를 차곡차곡 냉장고 안에 정리 후 씻고 나왔는데도 감감무소식.

살짝 걱정이 된 그는 하는 수 없이 놀이터로 나갔다.

여전히 그 자리에 못이 박힌 채 앉아 있는 그를 보며 한 소리 하려다 그만 드르렁 코 고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뭐야? 여기서 이러고 자고 있어?”

어이없어 하던 그가 경우의 어깨를 툭 밀쳤다. 몸이 뒤로 넘어가자 화들짝 놀라 깬 경우가 후다닥 일어났다.

“누, 누구야?”

“나다! 왔으면 들어오지 여기서 뭐 하는 건데? 여기가 너네 집 안방이냐?”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왜 남의 차 키는 가져가선 안 주는 건데?”

“내가 가져갔냐? 네가 놓고 갔지.”

“네가 달라고 그러니까 놓고 간 거지.”

“킁킁. 너 또 술 마셨냐? 됐으니까 그냥 가라.”

“되긴 뭐가 돼? 차 키 내놔!”

“내가 너를 하루 이틀 봐? 술 마시고 차 키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또 무슨 일을 할 줄 알고?”

“너는 나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데, 그때 이후로 나 술 마시고 운전대 안 잡거든.”

“당연한 걸 너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 마. 술에 취하면 판단력 흐려지고 실수할 수 있는 법이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논리적이셨는데? 그래서 결국 간다는 데가 박현호 밑이냐? 왜? 그 자식이 나보다 많이 준다던? 그래, 너도 결국 돈이었어. 얼마 준다던? 얼마에 팔려가는 건데?”

“이 자식이 근데 보자보자 하니까!”

술 취한 사람은 상대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화가 난 김강철이 경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화가 나는 건 경우도 마찬가지. 엎치락뒤치락 그렇게 주먹다짐이 시작됐다.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으니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싸움이 아닌 그야말로 개싸움. 치고받고 하던 두 사람은 금세 지쳐 놀이터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몸은 지쳤는데 이상하게 마음만은 시원한 기분이었다.

오래전 그날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던 경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너 주먹 많이 세졌다. 예전엔 내 근처에 얼씬도 못 했잖아.”

“무슨 소리. 많이 맞기는 했어도 나도 너 꽤 때렸거든. 너한테 안 지려고 얼마나 악바리처럼 살았는데. 너야말로 다 죽었다. 전에 네가 꼬맹이 괴롭히던 애들 패 줄 때만 해도 여전한 줄 알았더니 이젠 완전 물주먹이야, 민경우.”

“이제 그렇게 살면 안 되니까.”

“…….”

잠시 할 말을 잃은 경우는 김강철의 눈치를 보더니 결심을 했다는 듯 물었다.

“……누나한테 들었어. 정말 그만둘 거야?”

“가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왜? 이제 와서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고?”

그러자 경우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솔직히 나도 충격이었다고. 친구 연을 끊는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이 어딨어?”

“네가 그거까지 어떻게 알아? 박현호한테 들은 줄 알았더니…… 너 설마 나 미행했냐? 와,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집착 쩐다.”

“집착은 무슨. 그거야…… 네가 하도 수상하게 구니까…… 됐다, 갈 놈한테 무슨 소리를 더 해.”

“너는 내가 가기를 바라는 모양이네. 그래도 15년이나 붙어 있으면서 친구라 생각했는데…… 완전 헛 산 것 같다.”

“누가 할 소리. 너야말로 그러는 거 아냐. 박현호가 어떤 놈인지 뻔히 알면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아무렴 내가 업어 키운 거나 마찬가지인 너를 박현호 그 자식한테 험담이야 했겠어. 너는 나를 진짜 뭘로 보고.”

“그럼 그런 소리를 왜 했는데?”

“일종의 희망 고문! 단번에 안 된다고 하면 그쪽에서 네 알았습니다, 하고 물러날 것 같아? 사람 귀찮게 할 거 아냐. 단박에 끊어낼 건수를 잡기 전까지 시간 벌이를 한 거야. 그리고 된다고 했다가 확실히 까야지 저쪽에서 더 열받지.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런 새끼 밑에서 일할 생각 없거든. 너도 지겨운데.”

몸서리를 치던 김강철은 바에서 그와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세상 멋있는 척, 쿨한 척하던 박현호의 얼굴은 김강철이 내민 몇 장의 사진에 무너졌으니. SNS 비공개 계정으로 보고 있었던 은밀한 사진들이었다.

‘어, 어떻게…….’

‘이보세요, 박 전무님. 앞 다르고 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내가 어떻게 믿습니까? 나는요,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사람 밑에서는 일 못합니다. 아무리 비전이 좋아도 말이죠.’

그때 박현호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뒀어야 했다고 김강철은 생각했다.

“하여간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럼 사표는? 사표는 왜 쓴 건데?”

“네가 나보고 가라며. 그동안 일만 하느라 벌어둔 돈도 있으니까 이 기회에 좀 쉬고 놀려고 했지. 돈 떨어지면 다른 데 취직하고. 그래도 새명 그룹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데 어디든 경력직으로 괜찮지 않겠냐. 또 혹시 알아? 새명가 비리를 알고 싶은 사람들이 나를 비싸게 사갈지.”

“그건 안 되지.”

“하긴 너만 해도 켕기는 게 많긴 해. 그치?”

“…….”

“그래. 내가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입은 다물어 주마. 잘 가라. 새끼, 너 때문에 또 씻어야 하잖아. 귀찮게.”

돌아서는 김강철을 향해 경우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씨부렁대는 거야?”

“……하다고.”

“뭐?”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미안해! 엄청 미안해! 됐냐?”

“별로 미안한 거 같지 않은데?”

“됐어!”

돌아서서 가려는 경우를 그가 웃으며 붙잡았다.

“그래, 친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넘어가 줘야지. 들어가. 여기까지 왔는데 맥주나 한잔하고 가. 콜?”

“콜!”

그렇게 집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가득 채워둔 냉장고가 텅 빌 정도로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며칠 후, 김강철은 회사 앞으로 배달된 선물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곧바로 경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이, 이, 이거 뭐냐?”

[차 오래 탔잖아. 바꿀 때도 됐고 해서.]

“진짜 내 거야? 회사 차 아니고?”

[그래, 네 거야, 네 거.]

“아이고, 도련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성심을 다해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 새명에 뼈를 묻는 각오로-.”

중간에 전화가 끊겼지만 기분이 하나도 상하지 않았으니 냉큼 운전석에 앉은 김강철은 운전대도 잡아 보고 이것저것 열어 보며 온 몸으로 기쁨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 시각, 전화를 끊은 경우는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곧이어 걸려온 이수현의 전화에 그의 기분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듣자하니 너 강철이한테 완전 코가 꿰였다며?]

“무슨 소리야? 강철이가 그래?”

[미안하다고 울고불고 사과한 것도 모자라 차까지 사다 바쳤다며? 예전에도 그렇게 싸우더니 어떻게 지금까지 그렇게 똑같냐? 어쨌든 잘 했어. 친구 사이에 좋게 좋게 지내야지. 사이좋게.]

놀리는 듯한 말투로 전화를 끊자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강철, 이 개자식!”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지만 곧이어 김종수가 그를 찾아왔으니.

“작가님 좀 나와보시죠. 대만에서 손님이 오셨어요.”

대만? 영문을 모를 소리에 경우는 김강철의 일은 잠시 미뤄둔 채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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