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29화 (129/250)
  • #129. 친구와 원수 그 중간의 어디쯤 (5)

    경우의 차 키를 아무 데나 던져둔 김강철은 씩씩대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하게 마시려고 넣어 둔 맥주를 찾았지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보니 거실 테이블 위에 빈 캔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민경우, 이 개자식!”

    사러 나가자니 귀찮고 자기가 왜 그런 수고를 해야 하나 싶었던 그는 결국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지금 배달 되죠? 매운 닭발이랑 맥주요. 여기가 어디냐면요…….”

    그렇게 배달 음식을 주문한 뒤 빈 맥주 캔을 정리하느라 한 번 더 빡친 그는 그냥 넘어갈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한번 당해 보라는 심정으로 이번 기회에 진짜 사표를 쓰는 건 어떨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시작했다.

    * * *

    “으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하루 종일 촬영하느라 진이 빠진 사람한테 라면 끓여 달라고 하는 사람은 너뿐일 거다.”

    “그런 줄 몰랐지. 미안.”

    김강철의 집에서 쫓겨난 경우는 그가 시킨 대로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갈까 하다가 어쩐지 집엔 가고 싶지 않아 이수현의 집을 찾았다.

    그의 라면 가게에 가끔 들르긴 했지만 집으로 찾아오기는 이번이 처음.

    평소와 달리 술 냄새를 풍기는 그를 위해 이수현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기꺼이 라면을 끓여 줬다.

    정신 없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경우가 라면을 다 먹고 숨을 돌린 후에야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어?”

    “너 예전부터 무슨 일 있으면 집에 안 들어갔잖아.”

    “내가?”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 건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이수현의 다그침에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전 김강철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뭘 잘못했나 싶은 경우의 얼굴에 이수현은 머리를 짚었다.

    “이건 암만 봐도 네가 잘못한 것 같다.”

    “내가? 아니, 왜? 나랑 연 끊겠다고 한 건 그놈이야!”

    “그걸 믿어? 강철이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한 것 같아?”

    “아니면. 굳이 그놈한테 그렇게 말할 이유가 뭐 있어? 그냥 싫다, 됐으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본인은 새명에 뼈를 묻겠다, 그러는 편이 낫잖아. 근데 그렇게까지 말한 걸 보면 강철이도 조금은 생각이 있었겠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놈 진심이 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냥…… 정말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해내는 놈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몰아붙인 것도 있었고……. 나야 지가 친구니까 다른 사람보다 편해서 그랬던 건데…….”

    “아, 그럼 사과를 해.”

    “사과는 무슨 사과. 내가 뭘 잘못했다고?”

    발끈하는 경우의 모습에 이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경우야.”

    “응?”

    “솔직히 말해서, 너 옛날에 비해 많이 변했어. 그건 너도 알고 있지?”

    “그……렇지.”

    “진짜 옛날엔 개차반이었잖아. 애들 괴롭히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막 살았지. 시간 지나면서 조금 덜하기는 했다만 난 지금도 눈 감으면 그때 일이 훤하다”

    “남의 흑역사를 왜……?”

    “흑역사인 줄 아니까 다행이다. 근데 지금 보면 내가 꿈을 꾸나 싶을 정도로 완전 변했거든. 사람이 나이가 들면 철이 든다던데 널 두고 하는 소린가 싶더라. 오죽했으면 내가 몸만 그대로고 영혼만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나 그런 생각까지 했다니까.”

    “뭐, 뭘 그렇게까지…….”

    “그러니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변했어. 근데 이상하게 강철이 대할 때 만큼은 예전 그대로야.”

    “뭐가 그래. 내가 얼마나 잘해 주는데.”

    “그건 네 생각이고. 사람은 참 자기 자신에 대해 몰라. 봐, 지금도 며칠에 한 번씩 와서는 나한테 얼마나 하소연을 하고 가는데.”

    “…….”

    “다른 사람한테 하듯이, 아니, 그 절반만 강철이한테 해 줘 봐. 걔가 그런 소리를 왜 하겠어? 정말 그만 두고 싶었다면 진작에 그만 뒀겠지. 네가 강철이 약점 잡고 있는 것도 아닌데 걔가 어쩔 수 없이 너네 회사에 붙어 있는 건 아닐 거 아니야?”

    “…….”

    “야, 너 설마…… 진짜 강철이 약점 잡고 있는 건 아니지?”

    “얘가 무슨 큰일 날 소릴.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응!”

    “야!”

    “어쨌건 강철이 걔도 진짜 불만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닐 거란 거지. 그냥 푸념 같은 거야. 털어놓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는 거. 너, 우리 가게로 아침에 오는 손님들 중에 직장인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 그 사람들 라면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 다 한다고.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 사는 게 원래 그렇잖아. 물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도련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내가 모르긴 뭘 모른다고.”

    “에휴, 됐으니까 다 먹었으면 이제 그만 가라.”

    훠이훠이 손을 흔들어 대는 이수현의 모습에 경우는 하는 수 없이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내가 강철이한테만 그대로였다고? 이렇게 잘해 주는데?”

    이수현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경우는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운동도 하고 시력 교정 수술을 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그 시절 김강철은 또래보다 작은 키에 시력이 좋지 않아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으니 짓궂은 아이들의 표적이 되기 쉬었다. 가령 민경우 같은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다.

    * * *

    콰당.

    요란한 소리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한 아이가 제대로 엎어져 있었으니 상태가 걱정돼 일으켜 주려던 다른 아이들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넘어진 학생을 보며 민경우가 낄낄 웃고 있는 탓이었다. 그럼 넘어진 아이는 보나 마나 김강철일 테니 괜히 엮였다가 다음 타깃은 자신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이들은 애써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깡철이, 미안해서 어쩌냐? 내가 다리가 너무 길어서 책상 밑이 좁아 뻗는다는 게 그만, 쏘리!”

    “너 이 새끼, 일부러 그러는 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러게 네가 피해 갔으면 좋잖아? 그럼 나도 꼴 보기 싫은 네 면상 안 봐도 되는 거고, 너도 이렇게 넘어질 필요 없는 거잖아. 머리가 나빠서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거야, 아니면 고통을 즐기는 건가?”

    주변 패거리들과 함께 낄낄대는 민경우에게 달려드는 김강철이었으니 매번 얻어터지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언젠가는 저놈 면상에 주먹을 날리는 날이 꼭 올 거라면서.

    * * *

    흥!

    콧바람에 코에 쑤셔 넣었던 화장지가 빠졌다. 아무래도 작은 키가 문제였다. 사내들만 득시글한 곳에 모여있다 보니 서열 싸움은 당연지사.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마른 김강철은 그런 놈들에게 본보기가 될 먹잇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생긴 것에 비해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었으니 더 쥐어 터지는 한이 있어도 달려드는 게 김강철이었다. 어쩌면 민경우가 자꾸만 그를 걸고 넘어지는 것도 매번 지치지 않고 달려드는 근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내가 이 사이즈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우리 아버지도 삼촌도 스무살 때부터 키가 컸다고 했다고! 졸업하기 전에 반드시 큰다! 그래서 묵사발을 만들어 줄 거야!”

    으득으득 이를 갈던 김강철은 1000ml짜리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때 마침,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으니.

    누군가 김강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돌아보니 처음 보는 얼굴. 누구냐는 눈빛으로 보는 김강철에게 놈이 말했다.

    “우리 동생, 이 형님이 말이야. 용돈이 좀 부족해서. 돈 좀 있으면 빌려줬으면 하는데. 내가 내일 갚아 줄게.”

    놈 뒤로도 산만한 덩치의 놈들이 넷이나 더 있었으니 잘못 했다가 맞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하지만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얻어터지는 한이 있어도 달려드는 깡다구의 김강철이었으니 입안 가득 머금고 있던 우유를 놈들에게 뿜어 버렸다.

    “에이씨, 너 뭐야?”

    “나? 김강철이다. 그러는 니들은 뭔데 나한테 돈을 빌려 달라 말라야? 내가 무슨 ATM기냐? 아님 나한테 맡겨 놓은 거 있어? 갚을 생각도 없으면서 돈을 꾸기는 무슨. 헛소리 작작하시지!”

    “하하, 요것 봐라. 귀엽게 봐 줄라고 했더니 안 되겠네. 미친놈한테는 매가 약이지. 너 같은 놈들은 좀 맞아야 해.”

    꽉 쥔 주먹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움찔한 김강철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맞는 데 이골이 난 줄 알았는데 돌덩이처럼 단단해 보이는 주먹에 어쩔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넌 뭐냐?”

    갑자기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민경우가 놈의 주먹을 잡고 있었다.

    “그러는 너는 뭔데? 아, 얘가 네 친구냐?”

    “뭐래? 눈깔이 썩었냐? 어떻게 얘랑 나랑 친구야?”

    “친구 아니면 남 일에 관심 끄시지.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내 줄 때 가라.”

    “햐, 내가 우리 꼰대 말고 오라, 가라 소리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네가 뭔데 나한테 오라 가라야!”

    하여간 저놈의 성질머리.

    민경우의 주먹이 놈의 턱주가리를 갈겼다. 이후 모두 한데 엉겨 붙어 주먹다짐을 하는 건 뻔한 수순. 근성 하나는 끝내줬던 민경우와 김강철은 다섯이나 되는 놈들이 혀를 내두르며 도망칠 때까지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은 그 자리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마치 소년 만화의 한 장면처럼 눈부시게 파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던 김강철이 고개를 돌려 옆에 누운 민경우에게 물었다.

    “넌 뭐냐? 뭣하러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건데?”

    그러자 몸을 일으킨 민경우가 흥분한 듯 말했다.

    “나쁜 놈들이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 다섯씩이나 되면서 사람을 괴롭히는데 그걸 그냥 두고 봐?”

    “허! 너 진짜 어이없다. 그러는 너는? 너도 걔들이랑 다를 거 없거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걔들이랑 나랑 어떻게 같아?”

    어이없다는 듯 일어나 앉은 김강철이 말했다.

    “너도 걔들처럼 나 괴롭히잖아!”

    “그거야…….”

    “당연히 할 말이 없겠지. 지금까지 해 온 짓이 있는데 겨 묻은 놈이 똥 묻은 놈 보고 욕한다고 하더니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될 줄 몰랐네.”

    “도와줘도 지랄이야, 지랄이!”

    “누가 도와 달랬냐? 앞으로 오늘 같은 일 있어도 도와주지 마. 그냥 모른 척 지나가. 나한테 신경 꺼!”

    “됐거든. 머리가 나빠서 잊은 모양인데, 넌 내 밥이야, 밥. 내 밥은 건드리는 놈들은 가만 안 놔둬. 하여간 그 새끼들 다음에 보면 죽었어!”

    그러다니 자리에서 일어나 가 버렸다.

    약간 벙찐 듯 보고 있던 김강철이 그가 사라진 뒤에야 투덜댔다.

    “저놈 미친 거 아냐?”

    그렇다고 두 사람의 사이가 하루 아침에 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민경우는 여전히 그를 괴롭혔고 그때마다 김강철은 지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미운 정이 무섭다고 오랜 시간이 지나 결국 친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 * *

    커튼 사이로 비친 햇빛에 눈이 부신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2시.

    옛날 생각을 했더니 꿈자리가 뒤숭숭한 게 영 개운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늦은 밤까지 신도현과 사무실에서 대본을 쓰고 돌아온 경우는 피곤이 가시지 않는 몸을 겨우 일으켰다. 내일이면 첫 방송이 시작될 참이었으니 씻고 서둘러 회사로 가야 했다.

    입맛이 없어 대충 우유나 한잔 하고 나가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누나 민지선이었다.

    “여보세-.”

    [너 강철이랑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강철이 그만두겠다고 사표 냈어.]

    “뭐?”

    박현호와 밀담을 나누던 그때부터 예상한 일이었으나 막상 현실이 되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듣고 있어?]

    “어? 어.”

    [내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는데 얘가 생각보다 완강하네. 너랑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혹시 싸웠어?]

    “싸우긴 무슨. 내가 어린앤가.”

    [애들만 싸우니? 어른들 별거 아닌 걸로 잘만 싸우거든.]

    “…….”

    [어떡해? 사표 수리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잊었어? 네 비서 하겠다고 네가 직접 데려왔잖아. 뭐 요즘이야, 네 비서 일보다 우리 쪽 일을 더 하기는 한다만 어쨌든 네 의사가 중요하잖아. 어떡해? 수리해, 말아?]

    “잠깐만…… 나중에,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 할게.”

    서둘러 전화를 끊은 경우는 마침내 닥친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새명 유통 대표실.

    전화를 끊는 민지선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고개를 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래 주면 되는 거지?”

    “감사합니다, 누님.”

    “고마울 것까지야. 솔직히 내가 봐도 우리 경우가 널 너무 부려 먹긴 했어. 가끔은 고삐를 바짝 당겨 줘야지. 그렇다고 진짜로 사표 내고 그럼 안 돼. 김 대리는 우리 새명에서 필요한 인재니까. 알지?”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래, 그럼 그만 나가 봐.”

    김강철이 나가자 그녀 역시 생각이 많아졌으니 장난에 어울려 주긴 했지만 동생이 이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누나로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L’amour와 관련해서 그가 보고 있는 업무가 한 둘이 아니었으니 이러다 정말로 친구 간에 의가 상해 그만두게 되는 건 아닌가 싶은 우려도 있었다. 그렇다고 둘 사이에 끼어들 수도 없는 일. 부디 잘 해결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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