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28화 (128/250)
  • #128. 친구와 원수 그 중간의 어디쯤 (4)

    “좋아요.”

    “좋습니다.”

    “아주 훌륭해요.”

    강남의 한 스튜디오.

    L’amour와 ‘미스 앤 미세스’의 콜라보 화보 촬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국내보다도 해외에서 더욱 유명한 케니 리의 목소리가 현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 평소 과묵한 그가 얼마나 신이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를 신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L’amour의 전속 모델 이수현이었다. 셔터를 누르는 족족 완벽한 컷을 만들어 내는데 신이 나지 않을 사람이 없었으니 덕분에 케니 리는 훨훨 날고 있었다.

    요구하는 케니 리나 표현하는 이수현이나 처음 만나는 사이였음에도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스타일리스트 고서연은 물론 김강철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어색해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전문 모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어.”

    “그래도 자기 사진 보라고 하면 아직 진저리를 쳐요. 우리가 보기엔 잘 나왔는데 자기가 보기엔 이상하다나 뭐라나.”

    “그런데도 저렇게 표현하는 거 보면 타고났다고 봐야지.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사람 있어. 가만히 있어도 주위 시선을 끌어모으는 사람. 그러니까 라면 가게 사장님이 결국 모델까지 하는 거 아니겠어?”

    “수현이가 들으면 닭살 돋는다고 하겠네요.”

    “호호호, 하여간 수현 씨도 참.”

    “그나저나 저 사진작가분이 그렇게 유명한 분이세요? 우리 실장님 케니 리 작가님이 사진 찍는다고 하니까 입이 귀에 걸리셨던데요?”

    “자기는 이쪽 일을 안 해 봤으니 잘 모르겠구나. 이쪽에선 아주 유명한 사람이야. 섭외하기도 어렵지. 듣자 하니 ‘미스 앤 미세스’가 이번 화보 촬영을 위해서 진작부터 손을 쓴 모양이더라고. 콧대 높은 케니 리가 수현 씨 사진에 넘어왔다는 거 아니야. 이렇게 완벽한 피사체를 카메라에 담지 않는 건 죄라나 뭐라나.”

    “하긴 우리 수현이가 잘나긴 했죠.”

    “누가 보면 아들이라 하겠네. 이런 친구가 어딨어?”

    “그러니까요. 근데 유명하신 것 치고는 작가님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진 않는 것 같은데.”

    “맞아. 이제 한 스물 다섯 됐나?”

    “그렇게 어려요? 서른은 됐을 줄 알았는데…….”

    “노안이라기보다 조숙해 보이는 거지. 그래도 본인 듣는 데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름 콤플렉스니까.”

    “콤플렉스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듣기론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대. 근데 남의 나라에서 살기가 쉽겠어? 인종차별 당하고 우울증도 걸리고 힘들어했었다고 하더라고. 그러다 취미로 사진을 찍으면서 극복했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다행이네요. 우울증이 놔두면 위험하잖아.”

    “그러게. 열여덟 살 땐가 취미로 찍은 사진을 어머니가 대신 공모전에 냈다고 하더라고. 유명한 공모전이었다고 하던데 아무튼 거기서 대상을 받았다나 봐. 전시회도 열고 그러다 상업 쪽으로 옮겨온 거지. 인물 사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찍거든.”

    이수현의 화보 촬영이 있을 때마다 만난 덕분에 고서연과 친분을 쌓은 김강철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쨌든 유명 사진작가를 섭외한 걸 보면 ‘미스 앤 미세스’에서 그만큼 새명 패션의 남성복 브랜드 L’amour와 이수현을 밀어주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제 이런 일에도 익숙해진 김강철은 이수현과 케니 리가 만들어 낸 수많은 사진들 중에서 A컷을 골라내기 위해 고서연은 물론 케니 리와도 의견을 나누며 신중히 선택했다.

    마침내 표지는 물론 잡지 안에 실을 8장의 사진을 골라냈다. 세 사람의 의견이 가장 많이 절충된 사진들이었으니 이 정도면 잡지 완판은 물론 L’amour의 신상도 흥행하지 않을까 기대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김 대리 실력 많이 늘었네.”

    “그런가요?”

    “처음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구경꾼처럼 있었잖아. 근데 지금은 패션에 대해 좀 아는 것 같은데.”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다 대표님 덕분이죠.”

    “하여간 김 대리 사회생활 참 잘해. 그럼, 일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음에 또 촬영 잡히면 그때 봅시다.”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생각보다 촬영이 일찍 끝난 오후, 그동안 바쁜 일정 탓에 촬영이 끝나자마자 퇴근하기로 되어 있던 김강철은 이수현을 바래다준 뒤 이른 퇴근에 즐거워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개운하게 씻은 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맥주 한 캔을 따 한모금 마시는 순간, 세상이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흡족해하던 김강철은 모든 게 만족스러운데도 뭔지 모르게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네. 내가 뭐 잊은 게 있나?”

    혹시 지갑을 두고 온 게 아닌가 살펴도 보고 차 키도 있고, 있을 건 다 있었지만 뭔가 잊은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휴대전화를 살펴보던 그는 그 허전함이 뭔지 깨달았다.

    바로 민경우.

    벌써 며칠째 경우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지 않은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하루에도 전화가 열두 번도 더 왔을 텐데 지난 며칠 동안 경우로부터 전화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경우의 개인 비서였지만 새 브랜드 L’amour와 관련해 이수현의 일을 전담하고 있었으니 화보 촬영 준비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런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지난번 사무실에서 봤을 때 얼굴이 좀 안 좋아 보이기는 했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런 여유, 내가 원하던 거잖아. 근데 내 무덤을 파고 들어가려는 짓을 왜 하려는 건데? 이러지 말자, 강철아. 지금은 이 여유를 즐기는 거야. 얼마나 좋아.”

    냉장고 안에 시원하게 넣어둔 맥주 한 캔을 더 마시고 뭘 볼까 채널을 돌렸지만 한 번 자각하고 나니 찜찜한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소파에 누운 채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도 볼 것도 없고 잠도 오지 않자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도수 없는 검은색 뿔테 안경에 마스크를 쓰고 후드를 뒤집어쓴 김강철이 어느 건물 지하에 있는 PC방의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열심히 검색을 하는 중이었다.

    사람을 털기 위한 기본은 바로 주변 탐색. 원래 아이디는 거의 하나로 통일해서 쓰기 때문에 아이디를 검색하면 과거 인터넷에 올린 글까지 나오기 마련. 그렇게 검색한 과거 행적과 SNS를 시작으로 박현호에 대해 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털기 시작했다.

    비밀번호만 알아내면 메일까지 털어내는 건 시간문제. 솔직히 이 정도 수준에서 긁어내는 건 그에게 일도 아니었으니.

    ‘진작 이놈에 대해 털었어야 했는데…….’

    가지고 간 USB에 박현호에 관한 자료를 하나둘 저장하기 시작했다. 한창 집중을 하고 있던 그때 잉―잉―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아잇, 깜짝이야.”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한창 집중하고 있던 탓에 그는 갑작스레 울린 휴대폰 진동에 깜짝 놀랐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연락이 안 온다 했다, 내가. 거봐, 딱 퇴근하고 집에 올 시간이네.”

    당연히 경우가 전화했을 거라 생각한 김강철은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경우가 아닌 박현호였던 것이다.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 그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박현홉니다. 우리 더 만나기로 했죠. 시간 괜찮으면 지금 만났으면 하는데요.]

    “좋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죠.”

    검색 기록까지 모두 삭제하고 흔적을 지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청담동의 어느 와인 바.

    안으로 들어선 김강철은 바텐더 바로 앞에 박현호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성큼성큼 걸어가자 인기척에 박현호가 돌아봤다. 미소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살짝 미묘해지는 걸 김강철은 놓치지 않았다. 슬쩍 아래위로 훑어 내리는 게 지금 자신의 복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강철은 그의 옆에 앉았다.

    “퇴근 시간에 맞춰 전화드린다고 드린 거였는데 회사에서 오시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네, 야근이 일상인데 오늘은 어쩌다 보니 일찍 퇴근했거든요. 모처럼 집에서 쉬고 있는데 그쪽 전화 때문에 굳이 이렇게 나오게 된 거구요. 그렇다는 건 시답잖은 소리를 하면 제가 기분이 많이 좋지 않을 거란 얘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긴장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연락드릴 걸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고민은 해야 해서요. 중요한 분을 모셔 오는데 쉽게 생각할 수는 없잖습니까?”

    “제가 중요한 사람이라……. 일단은 믿어보죠. 그래, 어떤 생각이신지 들어나 봅시다.”

    김강철의 말에 박현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아, 피곤해. 도대체 강남을 하루에 몇 번씩 다녀오는 거야?”

    투덜대던 김강철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여는 순간 집안 조명이 밝게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분명 집을 나서면서 불을 다 끄고 나갔는데 무슨 일인가 싶은 그때 단정하게 벗어둔 신발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거실로 들어서니 테이블 가득 빈 맥주캔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여, 왔냐?”

    얼굴이 빨개진 걸 보니 취한 게 분명했다.

    “뭐야, 너 내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들어왔어?”

    그의 말에 경우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단순한 자식. 분명 네 생일은 아닐 거고 전화번호도 당연히 아닐 거고 남은 건 딱 하나밖에 없지. 자동차 번호판.”

    “무서운 새끼. 내가 다른 사람은 안 무서운데 넌 좀 무서워, 새꺄. 근데 내 집엔 어쩐 일이냐? 내 집에 온 적 한 번도 없잖아.”

    “없지. 주로 네가 왔으니까. 그래서 불공평한 것 같아서 나도 한번 와 봤다. 근데 인간적으로 정리는 좀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

    경우의 시선이 향한 곳은 산처럼 쌓여있는 빨래 더미였으니 세탁물은 주방 세탁기 옆에 쌓아두고 세탁이 끝나고 마른 건 거실 한쪽에 아무렇게나 쌓아 두던 게 버릇이 되어버렸다.

    “신경 꺼. 너 같은 도련님이야 일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정리해 주시겠지만 보통은 다 이러고 살아. 하여간 남의 집에까지 와서 깔끔 타령이야.”

    “아닌데, 혼자 산다고 해도 다 정리하고 살던데. 그리고 내 빨래는 내가 정리하거든.”

    “아, 뭐래. 정리해 줄 거 아니면 신경 꺼.”

    “그래, 그러자. 신경 끄자…….”

    말과 동시에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김강철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경우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강철아…….”

    “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너 박현호 만난 거 알고 있어.”

    “…….”

    “분명 박현호가 자기랑 같이 일하자고 했겠지. 안 그랬으면 너한테 접근할 놈이 아니니까. 내가 뭐 그동안 한 짓도 있고 그러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어.”

    술을 마신 탓이었는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그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김강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데?”

    “가고 싶으면 가라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안 그래? 안 붙잡을게. 그게 친구인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도리인 것 같다.”

    경우의 이야기를 듣던 김강철은 어이가 없어 냅다 경우의 뒤통수를 갈겼다.

    “아! 왜 때려!”

    “으이구, 이 웬수야. 넌 친구가 아니라, 웬수다, 웬수! 됐으니까 꺼져! 가 버려!”

    김강철의 손길에 그대로 쫓겨난 경우는 쾅 닫힌 문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왜 저래?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니까.”

    뒤늦게 얼얼한 뒤통수를 매만지며 경우는 돌아서려는데 문이 다시 열렸다.

    “차 키!”

    그의 말에 주섬주섬 차 키를 꺼내자 김강철이 낚아채 갔다.

    “운전은 절대 안 돼! 택시 타고 가!”

    다시 문이 쾅 하고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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