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27화 (127/250)
  • #127. 친구와 원수 그 중간의 어디쯤 (3)

    “작가님? 작가님?”

    “네, 네?”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렇게 넋을 놓고 계세요?”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신도현의 모습에 경우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까 나 감독님 들어오셨거든요. 편집 끝나서 확인하신다고 작가님도 보실 거면 지금 오시라던데요.”

    “아, 그래요? 그럼 당연히 가 봐야죠. 방송 나가기 직전에 누구보다 빨리 보는 건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죠.”

    아직 방송 전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다 보니 나상재는 조연출에게 맡긴 드라마 편집본을 꼭 확인했다.

    어차피 앉아 있어 봐야 자꾸 딴생각만 하니 이럴 바에야 차라리 드라마나 보면서 다른 곳에 집중하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에 경우는 신도현과 함께 편집실로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도착하자 지체할 것 없이 드라마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 * *

    이상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자수한 범인은 범행에 쓰인 흉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기가 부족했다.

    범인은 되는 일이 없어 안 그래도 화가 나 있었다며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집에 있던 부엌칼을 가지고 나왔다고 진술했다. 그러다 공원 화장실에서 만난 부창환을 찔러 죽였다고.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어딘지 모르게 허술했으니 아무나 죽일 생각으로 왔다면 굳이 집에서 떨어진 공원까지 올 필요가 있었느냐는 점과 술에 취했다면서 그 많은 CCTV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흉기를 가지고 있었고 진범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들까지 알고 있었으니 결국 이상훈의 주장은 묵살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상훈은 그 모든 점이 의심스러워 결국 이곳까지 올 수밖에 없었다.

    클럽 매그넘.

    사장의 죽음으로 며칠간 문을 닫았던 나이트클럽이 다시 운영을 재개했다. 부창환 개인의 돈만이 아닌 여러 곳에서 투자를 받은 상태이다 보니 계속 문을 닫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상훈은 작년에 죽은 최호와 부창환 사이에 이 나이트클럽이 접점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 팀장의 말마따나 술장사는 안정적인 캐시카우였으니까.

    꼭 뭔가를 찾겠다는 이유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곳에 오면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거란 기분이 들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간 이상훈은 술을 마시는 척 나이트클럽 안을 둘러봤다. 클럽 안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기에 별로 수상해 보이진 않았다.

    출입구에도 그랬지만 곳곳에 수상한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마치 조폭들처럼 이 나이트클럽을 관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때 출입구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이상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박경택이었다.

    처음 이상훈은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박경택이 평소 즐겨 입는 늘어진 티셔츠에 후줄근한 잠바 차림이 아닌 졸업 선물로 자신에게 선물해 준 것과 비슷한 고급 양복 차림이라 못 알아본 탓이었다.

    정말 그가 알던 박경택이 맞는지 다른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폭처럼 보이는 놈들이 그를 향해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들어간 곳은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푯말이 붙은 곳이었다. 딱 봐도 그냥 나이트클럽에 놀러 온 사람이 아닌 이곳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혀, 형이 왜……?”

    홀린 듯 그곳으로 다가가는 그의 손목을 누군가 낚아챘다. 돌아보니 사사건건 이상훈의 말에 태클을 걸던 최태근이 서 있었다.

    “최 경장님. 여긴 어떻게……?”

    “무슨 사고를 치려고 그럽니까? 가만히 내버려 뒀다 간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난리를 쳤겠네.”

    “…….”

    “그냥 동태만 확인해요. 이런 곳에서 얼굴 팔려 봤자 일하는데 도움 하나도 안 됩니다.”

    확실히 그건 최태근의 말이 맞았다. 이상훈은 다시 자리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물론 그의 온 신경은 박경택이 들어간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에 가 있었다.

    “그나저나 최 경장님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나야 뭐……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습니까?”

    “그렇다기 보단 좀 의외라서요. 아니라고 그러더니 결국 최 경장님도 수상했던 거죠?”

    “누가 그렇대요! 그냥 좀 찜찜해서 그런 거지. 혹시라도 그쪽이 사고 칠까 봐 온 거라고요. 내가 없었어 봐요, 분명 무슨 사단이 났어도 진작에 났지.”

    투덜대던 최태근의 모습에 이상훈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머뭇거리고 있던 그때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의 문이 열리고 박경택이 나오고 있었다. 물티슈로 손을 닦고 있었는데 얼핏 소매 끝에 보이는 붉은 얼룩은 피처럼 보였다. 점점 굳어지는 이상훈의 얼굴에 최태근이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저 치가 진권파 행동 대장이라나 뭐라나.”

    “네?”

    “처음 들어요? 진권파? 이쪽 나이트클럽은 진권파가 관리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왕이면 이쪽 조폭들도 좀 알아 두시는 게 편할 겁니다.”

    다른 것보다 박경택이 조직폭력배의 행동 대장이라는 말에 이상훈은 충격을 받았다.

    그 탓에 자신을 유심히 보는 최태근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늦은 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던 박경택은 반지하 방 계단으로 내려가려다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 깜짝이야!”

    누군가 계단 아래를 향해 쪼그려 앉아 있는 탓이었다. 처음엔 술에 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 다시 보니 이상훈이었다.

    “상훈아, 여기서 뭐 해?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러는 형은 왜 이렇게 늦었는데? 정형 일 배우느라 지금까지 고기 썰다 온 거야?”

    “어? 어…… 전에도 말했지? 사장이 사업 수완이 괜찮다고. 새로 개업하는 식당을 또 뚫어왔더라고. 너도 알잖아. 개업 빨 때문에 식당 막 문 열면 손님 많은 거.”

    “그래서 지금까지 고기 썰다 오느라 소매에 피가 묻은 거구나?”

    “어?”

    이상훈의 말에 놀란 박경택이 자신의 소매를 내려다봤지만 핏자국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인사 잘한다.”

    소매를 보느라 고개를 숙인 박경택의 머리를 이상훈이 쓰다듬자 그는 자신이 놀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뭐야? 형이나 놀리고.”

    이상훈은 박경택의 옷차림을 살폈다. 어디다 벗어 둔 건지 아까 입고 있던 고급 양복이 아니라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생각보다 양복이 잘 어울렸던 형의 모습에 이상훈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옷 좀 좋은 거 입지. 맨날 목 다 늘어난 티셔츠가 뭐야.”

    “갑자기 옷 타령은. 근데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오랜만에 형이랑 술 한잔할까 해서 왔는데 못 하겠다. 호출 왔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쁜 놈 잡는데 밤낮이 어디 있어.”

    “하긴. 피곤해서 어떡하냐?”

    “지금까지 일하다 온 형도 있는데 뭐.”

    “나야…….”

    “형…… 이제 나 돈 버는데 형도 공부해 볼 생각 없어?”

    “어? 갑자기 공부라니?”

    “형도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잖아. 과외하는 놈보다 더 잘해서 그놈하고 싸웠던 기억 나는데. 그때 그놈 코를 납작하게 패줬잖아. 하필이면 그놈이 학생회장에 그 엄마가 육성회장이라 형만 정학 맞고 그래서 학교도 관뒀잖아.”

    “새삼스럽게 지난 이야기는 해서 뭘 해.”

    “아까워서. 솔직히 나보다 형 머리가 더 좋았잖아. 형이 대학 갔으면 지금쯤 뭐가 됐어도 한자리했을 텐데.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형―.”

    “상훈아. 내 나이가 몇인데 이제 와 공부야. 공부 잘했던 것도 다 옛날이야기지. 공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거 아냐?”

    “늦었다고 생각할 땐 정말 늦은 거야. 호출이라면서 안 늦었어? 형이 데려다줄까?”

    “아냐. 지금까지 일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어서 들어가 쉬어. 난 택시 타면 되니까 형은 들어가.”

    “그래도……”

    “됐다니까 그러네. 어서 들어가.”

    그렇게 겨우 박경택을 집으로 밀어 넣은 이상훈은 골목길을 홀로 걸으며 생각했다.

    저 집은 눈가림용으로 놔둔 걸까, 옷차림을 바꾸듯 사실은 진짜 형의 집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형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형의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언제 나온 건지 터덜터덜 걸어가던 이상훈의 모습을 지켜보던 박경택은 아까 전의 일을 문득 떠올렸다.

    ‘클럽 매그넘’으로 그가 찾아왔음을 박경택 역시 알고 있었다. 혹시나 그 일에 대해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 머리를 굴렸는데 다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는 생각했다. 이상훈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혹시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 * *

    “이야, 드라마 잘 나왔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박종연이 감탄을 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나? 한 30분은 됐나? 다들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으면 내가 들어오는 줄도 몰라?”

    “왔으면 인기척이라도 하지.”

    같은 학교 동기였던 나상재가 살갑게 말했다.

    두 사람이 친구 사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두 사람이 같이 서 있는 그림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귀국하자마자 사무실부터 나오시더니. 혹시 차기작 벌써 구상 끝나셨어요?”

    “무슨 소리야. 공항까지 사람 보내 부담 팍팍 준 누구 씨 때문에 온 거지. 그리고 오늘은…… 사실 내가 이 드라마 티저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어떻게 된 속인지 궁금해서 와 봤더니 괜히 왔어. 더 궁금해 미치겠네. 내가 대본이라도 봐 줄까? 아니면 2차 티저는 만들었어?”

    “찍어놓은 걸로 편집해 봐야지.”

    “나 감독이 직접 한 거였어? 역시 아직 죽지 않았네. 그러고 보면 여기 이 세 사람이 스튜디오 글로리의 핵심 멤번가?”

    “암만 그래도 안 보여 주니까 알랑방귀 그만 뀌지.”

    “에이, 하여간 귀신을 속이지 네놈은 못 속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의 모습에 경우가 피식 웃었다.

    “어쨌든 감독님 보시기에도 드라마 잘 될 것 같다는 거죠.”

    “나 믿지 마. 내가 사람들 다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저 친구 감정선이 좋네. 나 감독 영화에 나왔던 배우지? 좋은 배우가 되겠어.”

    “원래 좋은 배우였다. 영화만 보는 네 놈이 뭘 알아. 이미 드라마 판에서 뜬 배운데.”

    “그래? 어쨌든 연기도 그렇지만 대본도 참 좋네.”

    “그치? 내가 봐도 우리 대본이 이번에 너무 잘 나왔어. 고생들 했어요. 끝까지 잘해 봅시다.”

    “왜 작가들한테 부담을 줘. 봐, 민 작가 얼굴 허옇게 뜬 거.”

    갑작스러운 박종연의 지적에 어리둥절하다는 듯 경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얼굴을 매만졌다.

    “제 얼굴이 떴어요?”

    “아니요. 민 작가님은 어제도 오늘도 잘 생기셨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향한 신도현의 시선에 박종연은 목을 가다듬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딱 봐도 민 작가 안색이 별로잖아. 민 작가가 드라마 말고 신경 쓸 게 뭐 있어, 안 그래?”

    박종연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 자신을 향한 걱정 어린 두 사람의 시선에 경우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냥 잠을 좀 설쳐서 그래요.”

    “잠을 왜 못 잤는데, 역시 자나 깨나 드라마 걱정 뿐이구먼.”

    더는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단 생각에 경우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물론 드라마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김강철 때문에 더 신경이 쓰였다. 드라마 집필을 할 때면 무엇보다 등장인물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게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이상훈의 심정에 누구보다 공감하고 있었다.

    서운한 마음 조금, 미안한 마음 조금,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친구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사실에 경우의 마음속은 무척 복잡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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