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26화 (126/250)
  • #126. 친구와 원수 그 중간의 어디쯤 (2)

    “기껏 오겠다는 데가 여기였어?”

    “누나가 쇼핑몰 때문에 스토리 텔링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왜? 어디 좋은 데라도 가는 줄 알았다가 기껏 회사에 오니까 실망했냐?”

    경우는 친구를 놀래켜 줄 양으로 처음부터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내비게이션처럼 오른쪽, 왼쪽, 직진을 외쳐댔을 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길에 긴가민가했지만 기껏 새명 유통이라니 조금 김이 새기는 했다.

    “누가 뭐래.”

    “그러게 뭐하러 남의 가게에 가서 진상 피우고 있어.”

    “뭐야, 수현이 너한테 전화했어?”

    “그래. 단단히 삐쳤다고 달래 주라던데.”

    “와, 이 새끼. 완전 배신자.”

    “라면 하나 시켜놓고 투정 받아달라고 한 네 탓이지. 아, 그런 메뉴 있었으면 좋겠다. 라면은 보통으로 끓여 주면서 다 먹을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 들어주는 거지. 가격은 한 3만 원이면 적당하지 않을까?”

    “이래서 장사는 아무나 하나. 암만 봐도 넌 장사꾼 체질은 아냐. 나 같은 진상이 붙잡고 있으면 가게 망한다. 음식 장사는 회전율이 좋아야 한다는 거 모르냐? 그 시간에 손님 열 명 받는 게 더 낫지.”

    “그게 또 그런가?”

    어쨌든 그렇게 차에서 내리던 경우가 의아한 듯 물었다.

    “넌 안 내려?”

    “아, 나 잠깐 갈 데가 있어.”

    “어디 가는데?”

    “내가 너한테 일일이 다 말해야 하냐? 됐으니까 먼저 들어가. 볼일 보고 올 테니까.”

    그러더니 다시 출발하는 차.

    항상 같이 내리던 친구가 미련 없이 떠나버린 모습에 경우는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김강철은 차로 10분 정도 이동한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회사 근처에서 보면 곤란하다나 뭐라나.

    도대체 뭐가 곤란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진원을 만나기로 한 카페 안.

    경우를 데려다주느라 약속 시간이 조금 늦은 시간, 카페 안에서 오진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익숙한 얼굴이 김강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김강철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분명 오진원은 핑계였고 이쪽이 진짜라는 생각에 김강철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은 박현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나 찾아온 게 그쪽입니까?”

    그쪽이란 말에 박현호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나는 게 보였지만 김강철은 그냥 모른 척했다. 애써 웃던 그가 말했다.

    “맞습니다. 이렇게 만난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정식으로 인사하죠. 채널 DBN 박현호라고 합니다.”

    “김강철입니다.”

    “일단 앉으시죠.”

    최대한 젠틀하고 쿨 한 척하고 있었지만 재벌가에서 오랫동안 붙어있었던 그의 눈엔 박현호의 본성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잘 모르는 사이니까 저렇게 얌전하게 구는 거지 마음에 안 들면 사람을 있는 대로 굴릴 것 같은 관상에 김강철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찰 뻔했다.

    차를 주문하고 잠시 앉아 있던 김강철은 박현호를 보다 김경진 작가와 정해용 감독을 유니언 스튜디오로 보내 버렸던 일이 떠올랐다. 잘나가는 작가와 감독을 그쪽으로 보낸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건만 결국엔 경우가 말했던 대로 되어버렸으니 참 신기한 노릇.

    그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던 그는 그만 박현호와 눈이 마주치자 혹시라도 생각을 들킬까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나저나 제가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김 대리님이나 나나 알 만한 사람들이니 똑 까놓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 채널 DBN에서 저와 함께 일하는 거 어떻습니까?”

    그러고 보니 라면 먹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는 생각에 음료를 마시던 김강철은 박현호의 말에 그만 입에 든 그대로 뿜을 뻔했다. 겨우 삼킨 그가 박현호에게 물었다.

    “뭐, 뭐 라구……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요.”

    “잘못 들은 게 아닙니다. 스카우트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김강철 씨한테요.”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 눈만 끔뻑끔뻑하는 김강철의 얼굴에 박현호는 미소 지었다.

    사실 그를 꼭 스카우트 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다. 야심작으로 준비했던 오연옥의 드라마가 그저 그런 반응으로 끝나 버린 데다 채널 DBN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케이블 방송을 할 때나 지금이나 사실 별 차이가 없었다.

    시청률은 거의 1~2퍼센트대.

    그러던 중 보게 된 민경우의 차기작 드라마 티저. 솔직히 배가 아팠다. 잘될 드라마는 보기만 해도 대충 감이 온다. 삐뚤어진 눈으로 봐도 대박의 기운이 물씬 났다.

    이쪽은 되는 일 하나 없는데 저쪽은 하는 일마다 잘되고 거기다 오른팔이었던 서필진까지 빼앗아 갔다. 그럼 이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태도를 취하는 게 당연지사.

    듣자 하니 학창 시절부터 친구였던 비서 김강철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친구라면서 노예처럼 일한다, 사실은 약점이 잡힌 거다, 알게 모르게 경우한테 원한을 가지고 있다 등등.

    솔직히 호기심이 생겼다. 경우가 가는 곳이면 늘 뒤따르던 그. 별로 하는 일은 없어 보이는데 안 끼는 데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붙였더니 경우에 대한 그의 불만이 생각보다 깊었다.

    잘만 꼬시면 이쪽으로 포섭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를 데려오기만 한다면 스튜디오 글로리의 기밀과 운영 방식은 물론 민경우의 약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그 과정이 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남들 보기엔 친구 사이인데 배신을 하면서까지 이직을 하기엔 위험 부담이 따를 테니까.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김강철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얼마 줄 겁니까?”

    “네?”

    “스카우트 제안하면서 연봉도 생각 안 해 오셨습니까?”

    “아, 지금 받고 계신 연봉의 2배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얼마 받고 있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그게…….”

    “그냥 달랑 2배 주겠다고 하면 옳다구나 하고 제가 갈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물론 돈이 중요하죠. 하지만 저는 제가 일할 곳의 비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그쪽 회사로 이직할 생각이 들만한 제안을 다시 생각해 오시죠. 알다시피 친구와 연을 끊고 회사까지 옮기는 건데 충분히 끌릴만한 조건을 제시하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김강철이 돌아서기 전 박현호에게 다시 말했다.

    “충분히 생각하고 다시 연락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아, 다음번엔 다른 사람 내세워서 괜한 짓 하지 맙시다. 아셨죠? 그럼 이만.”

    그러더니 살짝 묵례를 하고는 나가 버렸다.

    당황한 박현호는 멍한 채 나가는 김강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잠시 후 박현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으니 어쩌면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직을 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에 자신이 나타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렇다고 대놓고 따라오긴 뭐 하니 더 생각해 보라는 둥 시간을 벌었지만 결국 자신에게로 올 거라 확신했다.

    “정 그러시다면 좋은 조건 생각해 보지.”

    마침내 박현호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솔직히 말해서 이런 쇼핑몰은 경음이 먼저고 우리는 후발주자잖아.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우리가 짝퉁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거지. 듣자 하니 경음 쪽에서도 그런 식으로 마케팅으로 한다고 하더라고. 원조가 어쩌고저쩌고……. 이게 무슨 설렁탕집이냐고! 그렇다고 우리도 당할 수만은 없잖아. 요즘 브랜드 이미지를 고려한 스토리 텔링 마케팅이 유행이라고 하던데 쇼핑몰에 스토리 텔링을 가미하면 어떨까 해.”

    “…….”

    “너, 내 말 듣고 있어?”

    “어? 누나 뭐라고?”

    “무슨 일인데? 도대체 뭔 일인데 이렇게 넋 놓고 있는 건데? 너…… 혹시 무슨 사고 쳤니?”

    “누나는 내가 무슨 만날 사고만 치는 사람인 줄 알아?”

    “아닌데 얼굴이 그 모양이야?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얼굴인데?”

    “없어. 있긴 뭐가 있다고.”

    “진짜야?”

    “그래. 어쨌든 누나 말은 쇼핑몰 마케팅을 위한 스토리 텔링이 필요하다 이거지?”

    “아예 안 들었던 건 아닌 모양이네. 맞아,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지금은 내가 드라마 쓰는 중이라 좀 바쁘니까 드라마 끝나고 생각 좀 해 볼게. 어쨌든 완공까지는 멀었으니 시간 있잖아. 그나저나 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어?”

    “모든 게 순조롭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일 시작하면 똑 부러지잖아.”

    “하여간 도무지 겸손을 몰라. 알았으니까 누나도 스토리 텔링에 써먹을 컨셉 좀 생각해 봐. 금 나와라, 뚝딱도 아니고 그냥 내놓으라고 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니까.”

    “오케이. 그럼 컨셉 정해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렇게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서는 동생의 모습을 민지선이 말없이 바라봤다. 살짝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먼저 이야기했을 테니 알아서 잘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대표실을 나온 경우는 복도에서 지나가는 김강철을 보곤 자연히 그를 향해 시선이 이동했다.

    조금 전 회사에 자신만 내려두고 가 버린 그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르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몰래 여자라도 만나나 싶었다. 그렇다면 가만두면 안 되지 싶은 생각에 장난기 가득한 그는 결국 택시까지 잡아타고 그의 뒤를 밟았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새명 유통에서 멀지 않은 어느 건물의 지하 주차장. 괜히 잘못했다가 들킬까 싶어 차마 주차장까지는 따라가지 못한 그는 건물 앞에 택시를 세워두고 건물 앞을 서성였다.

    그 여자가 여기서 일하나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다시 등장한 김강철의 모습에 그는 몸을 숨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건물 1층의 카페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박현호를 만나고 있는 걸 딱 목격하고 말았으니.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했던 그는 몸을 숨겨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들리는 의외의 말소리에 그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친구와의 연을 끊고 회사를 옮긴다…….

    늘 자신의 곁에서 원하는 일은 다 해 주던 그였기에 그 모든 걸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자신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경우는 일에 몰두한 친구를 잠시 바라보다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빠져나갔다.

    마침 고개를 든 김강철은 서둘러 복도를 걷는 경우의 모습을 지켜봤다.

    “왜 저렇게 빨리 걸어? 도망가는 사람처럼? 혹시 무슨 일 있나? 안 데려다줘도 되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사이.

    “김 대리!”

    “네, 실장님.”

    “우리 ‘미스 앤 미세스’랑 콜라보 하기로 했던 거 그거 스케줄 나왔나?”

    “네. 다음 달에 케니 리 선생님 입국 날짜에 맞추기로 했습니다.”

    “결국 케니 리를 섭외했다 이거네. 케니 리가 여간 깐깐한 게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만큼 그쪽에서 우리 이수현 씨를 좋게 봤다는 거겠지.”

    “네, 표지까지 8페이지 나가기로 결정 났습니다.”

    “그 정도면 전문 모델도 힘든 건데. 어쨌든 김 대리가 그쪽이랑 이야기 잘해서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해.”

    “네.”

    월간 여성 잡지 ‘미스 앤 미세스’에서 이수현의 화보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다. 당연히 그가 입을 의상은 전속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L’amour의 신상.

    미국을 시작으로 유럽에서도 인정 받고 있는 사진작가 케니 리를 섭외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미스 앤 미세스’가 그만큼 이번 화보에 힘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새명 패션의 남성복 브랜드 L’amour 전속 말고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친구를 위해 그의 스케줄을 김강철이 관리하고 있었으니 경우 말고도 이수현까지 챙겨야 하는 그의 입장에선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도 사실.

    그러니 별다른 생각 없이 박현호를 향해 던진 말이 큰 반향을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그는 일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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