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25화 (125/250)
  • #125. 친구와 원수 그 중간의 어디쯤 (1)

    동도 트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김강철은 베개 아래로 숨어들었지만 그렇다고 벨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참 울리던 벨소리가 끊기고 다시 잠에 빠지려던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 뭐야 진짜!”

    단전에서부터 짜증이 올라온 김강철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넌 지금이 몇 시라고 생각하는데?”

    [글쎄? 안 봐서 모르겠는데?]

    “민경우, 머리가 달렸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아. 장식으로 달고 다니지 말고. 넌 아무 때나 출근해도 되는 대표님이라 잘 모르겠지만 평범한 직장인인 나는 정시 출근해야 한다고. 이 새벽에 전화하는 건 반칙이지.”

    [그러냐? 미안하다. 내가 사과할게. 됐지?]

    입으로만 하는 사과에 남아있던 졸음마저 확 달아나는 듯했다. 여기서 화를 내 봐야 소용 없다는 걸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

    “또 무슨 일로 전화했는데?”

    [이따 공항으로 픽업 좀 가달라고. 대신 박 실장님껜 내가 연락해서 늦게 출근하게 해 줄게.]

    “공항? 갑자기 공항은 왜?”

    [아, 내가 전에 얘기 안 했나? 오늘 박종연 감독님 귀국하시는 날이잖아.]

    “그분은 가족도 친척도 없어? 굳이 꼭 내가 가야 해?”

    [몰랐어? 감독님 기러기 생활하신 거?]

    “…….”

    [부모님은 댁에 계시긴 할 거야. 근데 여든 넘은 분들한테 공항에 아들 마중 나가시라고 하긴 그렇잖아.]

    “……그럼 네가 좀 가지?”

    [내가 가면 감독님 미안해 하실 거 아냐.]

    “나는? 내가 가면 안 미안해 하신대니?”

    [너는 아무래도 회사 식구로 생각하니까 감동받지 않겠냐? 사람은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 감동을 먹는 거거든. 어차피 작품 한번 하고 말 거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우리하고 같이하면 좋잖아.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 알았지?]

    “…….”

    [아, 6시 도착이라고 했으니까 이제 출발하면 되겠다. 수고해.]

    그러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민경우!”

    이왕 시킬 거 미리미리 말했으면 얼마나 좋아?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40분. 지금 출발해도 빠듯한 시간이었으니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친구가 아니고 웬수야, 웬수!”

    그는 자신이 워커홀릭처럼 일만 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창 사고치고 다닐 때는 사람 마음 졸이게 하더니 마음 잡고 일을 하니까 제대로 쉴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고 예전으로 돌아가랄 수도 지금이 괜찮다고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 * *

    전화를 끊은 경우는 살짝 웃었다. 투덜거릴 친구의 모습이 안 봐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친구가 가까이서 돕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실감하고 있었다.

    “진짜 이 기회에 차라도 바꿔 줘?”

    핑계 삼아 김예신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던 그는 생일에 차를 바꿔 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회의실 문이 열리고 신도현이 들어왔다.

    “어? 신 작가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그러는 작가님이야말로…… 혹시 퇴근 안 하신 거예요?”

    “뭐, 그렇다기보다……”

    솔직히 대본은 순조로웠지만 방송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조급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두 사람이었으니 그저 웃어넘겼다.

    그러다 신도현을 보던 경우는 나상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야 산전수전 다 겪었잖습니까? 신동 소리 듣던 내가 영화 몇 편을 말아먹었는지 알잖아요. 그래도 마냥 허송세월한 건 아니라 이거죠. 하 실장이 내 취향에 딱 맞는 커피 들고 왔을 때부터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으로 1부터 10까지 정리가 되더라구요. 근데 신 작가는 아니잖아요. 경험도 많지 않고 지난번에 회의할 때 보니까 웬만하면 민 작가님 의견을 따르더만요. 단순히 남의 의견을 잘 들어주는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왜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런 이유 탓에 전생에 자신의 정체를 꽁꽁 숨기고 다녔을지 모를 일이었다. 경우는 이참에 단단히 이야기를 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우가 득시글거리는 방송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이쪽도 그에 맞는 대비를 해놓아야 했다.

    “그, 지난번에 수정한 부분 말이에요. 저는 수정 하기 전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아, 그래요?”

    “작가님은 작가님만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거든요. 남들이 생각 못 하는 거요. 저야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좋아지지만 작가님은 처음 생각했던 게 더 나을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자신의 글에 확신을 가졌으면 해요. 지금 충분히 잘하고 계시니까.”

    “아…… 안 그래도 나 감독님께 한 소리 들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제가 너무 바보 같았죠?”

    “아니요. 원래 배우들이 욕심이 많아요. 지금이야 서로 눈치 보느라 점잖은 척하는 거지 한창땐 진짜 난리도 아니었어요. 유명 브랜드의 그것도 하필 같은 옷 협찬받아 와서 서로 입겠다고 코디들이 머리 잡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죠. 여배우들 간에 신경전이 말도 못 했고요.”

    “아, 저도 그 비슷한 이야기 들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에선 하하 호호 잘 웃으면서도 대기실에선 말 한마디도 안 나누는 경우도 얼마나 허다했는데요. 드라마가 혼자서 하는 게 아닌데 이왕이면 혼자 돋보이고 싶거든요. 사람들이 자기만 봐줬으면 싶고 잘 보이고 싶고 사람 마음이 그래요.”

    “…….”

    “같이 일하는 사람들인데 요구 조건 들어줄 수도 있죠. 근데 그 사람들 다 들어줬다간 결국 드라마가 산으로 갑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죠. 그러니까 휘어잡히지 말고 휘어잡아 보자고요. 그럴 리 없겠지만 다음에 또 그러면 미간에 힘 딱 주고 인상 한 번 써줘요. 솔직히 작가님 지금 너무 순해 보여서 뭐든 다 들어줄 것 같거든요.”

    “그래요? 그럼 이렇게 해 볼까요?”

    어설프게 인상을 쓴 신도현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산전수전 겪은 사람치고 순수하달까? 자신과 달리 그 안의 소년미가 오래 가길 경우는 바랐다.

    “참, 여기 이 부분 말인데요. 생각해 보니까 김학범이 말이에요. 마약 말고도 부창환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가 있었으면 어떨까요?”

    샛길로 새는 것도 잠시, 두 사람은 곧바로 드라마로 돌아왔다.

    * * *

    “이렇게 공항까지 직접 나오지 않아도 됐었을 텐데요. 덕분에 저는 편합니다만, 이거 죄송해서 어떡하죠?”

    “말씀 편히 하세요. 경우한테 하듯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그럼 그럴까? 김 대리도 고생이 많아. 이 새벽이 나오려면 잠도 거의 못 잤을 거 아냐.”

    “푹 잘 자고 나왔으니 걱정 마세요. 그나저나 여행은 괜찮으셨어요? 어디 어디 다녀오셨어요?”

    “미국에 있는 가족들 좀 만나고 곧장 유럽으로 갔지. 이태리도 갔다가 모나코, 프랑스, 벨기에, 독일…… 그러고 보니 주로 서유럽으로 돌았네. 이참에 가고 싶은데 다 찍고 왔지.”

    “우와, 듣기만 해도 부럽습니다.”

    “그렇지? 근데 원래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나는 직장 생활하는 자네가 부러울 때가 많아. 회사 안에 내 물건을 채운 내 책상이 있다는 거, 매일 아침 회사로 출근해 월급날만 기다리며 열심히 일하는 그런 특별할 거 없는 일들이 참 부럽더군. 남들이 들으면 호강에 겨운 소리라고 하지만 원래 가 보지 않은 길은 아쉬움이 남는 법이야.”

    그렇게 운전을 하는 동안 김강철은 꽤 오랫동안 박종연과 이야기를 나눴다.

    박종연의 팬이었으나 늘 경우가 옆에 있었을 때만 잠깐 만났던 터라 그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기회가 없었다.

    처음엔 새벽에 사람을 깨워 짜증도 났지만 덕분에 이렇게 박종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 새벽의 힘들었던 일도 잊은 채 그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말도 참 재미나게 한다며 김강철은 감탄했다.

    비행기 안에서 잤다며 피곤하지 않다는 그를 마포에 내려 준 김강철은 마침 출출하던 차에 그곳에서 멀지 않은 수현의 라면 가게로 향했다.

    때마침 등교 시간.

    아침을 굶고 온 학생들 덕에 가게 안은 이미 만석이었다.

    새명 패션의 남성복 브랜드 L’amour의 전속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이수현은 바쁜 와중에도 장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직원을 둘이나 더 뽑은 덕에 장사를 하는데 별문제가 없었다. 새로 뽑은 직원들 역시 수현이 못지않은 외모의 청년들이라 장사는 여전히 잘 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의 비주얼 갑은 사장인 이수현이었으니 웬만하면 등교 시간엔 가게를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이들은 될 수 있으면 이수현을 볼 수 있는 시간에 가게를 찾았다. 덕분에 이 라면 가게는 등교 시간이 가장 붐볐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온 탓이었는지 북적대는 가게 앞에 잠시 기다리던 김강철은 학생들이 하나둘 학교로 사라지자 겨우 가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기다림까지 더한 탓인지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게 체력에 한계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사장님, 여기 땡초라면 하나요.”

    “뭐야? 또 밤새 달렸나?”

    “밤새가 아니라 새벽에 달렸다. 민경우 그 새끼는 하여간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사람을 부려 먹어.”

    “그래서 힘들다고 투정하러 왔어?”

    “오냐, 힘들어 죽겠다. 아주 쓰러지겠다, 쓰러지겠어.”

    “그럼 그만두면 되잖아. 그래, 이 기회에 때려 쳐버려!”

    “야, 남 일이라고 너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냐? 내가 너처럼 건물이 있길 하냐, 아님 경우처럼 물려받을 유산이 있길 하냐. 그만두면 당장 뭐 먹고 살라고?”

    “이 세상에 너 받아 줄 회사 하나 없겠냐? 너, 네 입으로 그랬잖아. 능력 있다고. 그만한 능력이면 오라는 데가 줄을 설 것 같은데.”

    “큼큼, 물론 오라는 데야 많지. 그렇다고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사표 던지고 이직해 버리기엔 좀 그렇잖아.”

    “너 예전부터 느꼈지만 경우한테 유독 약하더라? 싫다고 하면서도 결국 경우 말이라면 다 들어줬잖아. 말도 안 되는 것도 전부. 내가 모르는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야?”

    “……이유가 있긴 뭐가 있어?”

    “아닌데. 분명 뭔가 있는데.”

    “있긴 뭐가 있어. 그런 거 없으니까 라면이나 빨리 줘.”

    “예예, 손님. 여기 땡초라면 대령이요.”

    “그래, 역시 이 맛이야.”

    “그건 그렇다 치고, 생각은 해 봐. 네가 항상 옆에서 뭐든 다 해 주니까 경우가 너의 소중함을 모르는 거잖아. 나는 한 번 세게 나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해.”

    라면 그릇에 코를 박고 면치기를 하는 김강철의 모습에 이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 쉽게 바뀌는 건 아니었으니까.

    게 눈 감추듯 한 그릇 비운 그가 가게 밖으로 나오자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너 혹시 나한테 카메라 달아놨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보고 있는 것처럼 딱 맞는 타이밍에 전화 거니까 그렇지.”

    [그래? 그럼 지금 당장 올 수 있겠네.]

    “어딜? 너네 회사? 출근은 자유롭게 해도 된다며?”

    [회사에 안 가도 된다고 그랬지 쉬란 말은 안 했잖아. 얼른 와. 나, 갈 데가 있어.]

    그러더니 뚝 끊긴 전화.

    “하여간 지 멋대로야. 오라 했다, 가라 했다. 무슨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수현이 말마따나 이참에 진짜 사표 써?”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아, 간다니까!”

    [김강철 대리님?]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그는 움찔하고 말았다. 분명 경우가 독촉하는 전화일 거라고 아니었다. 전화기를 다시 보니 모르는 낯선 번호.

    “누구시죠?”

    [유니언 스튜디오의 오진원이라고 합니다.]

    ‘유니언 스튜디오? 거기서 왜 나한테 전화를 거는데?’

    의아한 듯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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