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외나무다리 위 두 사람 (5)
화려한 사무실 내부.
재벌 회장님 못지않은 포스의 김학범이 책상 위 난초를 놓고 잎을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그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서 눈을 내리깔고 있는 박경택.
김학범은 박경택을 힐끗 보더니, 서랍 속에 든 것을 꺼내 책상 위로 던졌다.
“일처리가 생각보다 깔끔하더군. 역시 박 실장이야. 내가 그러니까 우리 박 실장을 곁에 두고 있는 거잖아.”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강북 쪽은 어쩌기로 했어?”
“조만간 적당한 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여간 돈이 문제야. 돈에 눈 돌아가니까 저승길 찾아드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덤비지.”
“이번엔 걱정하시는 일 없도록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나야, 우리 박 실장만 믿을게. 그만 나가 봐.”
박경택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가자 그가 나간 문을 힐끔 보며 미소 짓던 김학범은 다시 정성스레 난초 잎을 닦았다.
* * *
박경택의 사무실.
소파에 앉은 채 테이블에 발까지 올려놓고 휴대폰 게임을 하던 조한철은 문을 열고 박경택이 들어오자 깜짝 놀란다.
“아이, 깜짝이야. 거, 노크 좀 하고 들어옵시다.”
“내 방에 들어오는데 노크를 해야 하나? 하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내가 그쪽 심정을 이해 못 했네. 사람을 한둘 죽인 게 아닐 텐데 말이야.”
“거, 말 가려서 합시다. 그 일을 누가 시켰는데, 지금.”
박경택이 테이블 위에 올린 조한철의 발을 툭툭 쳤다.
“시건방 그만 떨고 이거나 챙겨.”
테이블 위에 김학범에게 받아온 것을 내려놓은 박경택의 모습에 다리를 슬그머니 내린 조한철이 그것을 살폈다.
돈 봉투와 위조된 여권이었으니 일단 돈 봉투를 열어보며 액수를 확인하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여간 우리 형님, 계산 하나는 끝내주게 하신다니까.”
“누가 형님이야?”
“그 말도 몰라요? 부자는 다 형님이라는 말.”
어이없다는 듯 조한철을 째려보던 박경택이 입을 열었다.
“이번 주 토요일 밤, 인천에서 일본으로 가는 우리 쪽 배가 있어. 일본에 있다가 제3국으로 옮겨. 움직일 땐 그 여권 쓰고. 잠잠해질 때까지 돌아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미쳤다고 시끄러운 이 나라에 돌아오겠어요! 걱정 말아요. 나도 눈치라는 게 있으니까. 어디 보자, 이번엔 일본사람이라……. 내가 일본말 하나는 기막히게 하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시끄럽고 당분간 몸 사려. 돈 생겼다고 빨빨대다가 제 발 저리지 말고.”
“내가 뭐 어린앱니까, 그런 것도 모르게. 어쨌든 이 손이 필요하면 또 불러요.”
조한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요나라, 바끄상.”
서둘러 나가는 조한철의 모습에 박경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가 소파 옆 협탁을 열고 액자 하나를 꺼냈다. 이상훈의 경찰대 졸업사진.
복잡한 얼굴로 사진을 보는 박경택 위로.
“컷!”
감독의 사인이 떨어졌다.
소파 옆에 숨겨둔 물을 마신 강범석은 코디가 헤어와 메이크업을 수정하는 동안 대본을 다시 한번 읽었다.
다음 씬을 준비하는 사이, 나상재가 다가와 소파에 앉았다.
“저기…….”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A4용지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강 선배도 드라마 쪽은 별로 경험이 없어서 모르는 모양이네. 이게 그 유명한 쪽대본이랍니다.”
“쪽대본이요?”
“나도 드라마는 처음이라 이런 것도 처음 봤어요.”
나상재의 말에 잠시 대본을 들여다보던 강범석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거 이미 촬영한 부분인데요.”
“그렇죠. 근데…… 작가님이 완벽주의 성향이 있으신지 성에 차지 않는다고 바뀐 대본으로 재촬영을 부탁하셨어요. 3화부터 4화까지 5씬 정도라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간곡히 부탁하시더라구요. 재촬영 해 달라고. 물론 강 선배가 원하지 않는다면 안 해도 괜찮다고 하셨거든요. 어떻게 생각해요?”
사실 강범석이 드라마를 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쪽대본이었다.
드라마든 영화든 모든 장면과 대사는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의미 없어 보이는 씬 구성이라 할지라도 클라이막스의 희열을 위해 꼭 필요한 장면들이었으니 그 하나하나가 철저히 계산된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시간에 쫓겨 급조한 대본으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캐스팅을 결정했을 때만 해도 결말만 제외한 14화 시놉시스까지 모두 본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그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 작가가 쪽대본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평소 그라면 거절했을 게 맞았지만 이미 촬영이 끝난 부분의 재촬영이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나상재가 건넨 대본을 살펴본 그는 한참 만에 나상재의 물음에 답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작가님들도 그렇고 감독님도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저라고 뻗댈 수만은 없죠. 재촬영하시죠.”
어떤 배우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작가에게 대본 수정을 요구하기도 하고 파워가 센 배우는 작가를 교체하기까지 했다.
파워라면 밀리지 않는 천하의 강범석이었으니 화라도 내지 않을까 싶어 내심 쫄아있던 나상재는 그가 응하자 이 상황을 꿰뚫어 본 민 작가의 혜안에 감탄하고 말았다. 그는 처음 쪽대본을 받아 들고 사무실로 쫓아갔던 그 날의 일을 떠올렸다.
‘일단 강 배우님 의견을 물어주세요. 아마 바뀐 대본을 읽어보면 하겠다고 할 겁니다.’
‘혹시 대본 수정을 요구한 게 신 작가였습니까?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요?’
‘지금 신 작가님 흔드는 건 그쪽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번 보여 주는 게 낫다고 보는데요. 자기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요.’
어떻게 돌아가는 속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상재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시간도 많지 않았는데 그사이 대본을 숙지한 강범석이 훌륭히 연기를 소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바뀐 대본이 더 나은 것도 같았다.
* * *
“갑자기 왜 부르는 거야?”
“방송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 전에 시사회를 좀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영화도 가편집하고 괜찮은지 보잖아.”
“하여간 작가님 보면 은근히 완벽주의라니까. 이미 촬영 끝낸 부분을 재촬영하자고 하지 않나.”
“그래도 너 재촬영한 거 나도 봤는데 훨씬 괜찮던데. 그만하면 재촬영할 만하지.”
“그래?”
은근히 만족하는 강범석의 얼굴에 조재웅은 뿌듯해졌다. 그 모든 게 결국 자기가 신도현에게 말한 대로 이루어졌으니 방송이 나가면 우재환보다는 강범석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거라 확신했다.
그렇게 도착한 스튜디오 글로리의 편집실.
생각보다 넓은 편집실 규모에 놀란 조재웅은 시사회라고 한 것 치고는 경우와 나상재, 그리고 자신과 강범석밖에 없다는 사실에 의아했다.
“다른 분들은……?”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요. 오늘 중요한 건 두 분이니까 일단 앉으시죠.”
얼결에 자리에 앉자 곧바로 드라마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처음 본 타이틀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맞았다. 오프닝에 기대감이 고조된 조재웅은 곧바로 시작된 드라마에 서서히 몰입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드라마가 끝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선 경우가 편집실의 조명을 켜자 강범석은 물론이고 역시 얼빠진 조재웅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경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 실장님.”
“네, 네?”
“드라마 잘 보셨습니까?”
“아, 네…… 네…….”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죠?”
“그게…….”
“조 실장님, 웬만하면 우리 신 작가님 흔들지 마시죠.”
“형, 작가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안 강범석이 물었지만 아무도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저희 신 작가님,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남들은 몇 년 공부해도 당선될까 말까 한 공모전 단박에 당선되신 분이죠. 근데 정식으로 드라마 교육을 받지 않아서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남의 의견에 휩쓸리기 쉽죠. 이게 다 드라마를 위한 일이라고 하면 저라도 솔깃할 거예요.”
“…….”
“그래서 실장님 뜻대로 대본 수정되었는데 보시니까 어떠세요?”
그제야 강범석은 전후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 앉아 있기 불편할 정도였다.
솔직히 그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으나 부분 부분만 떼어놓고 봤을 때 그랬을 뿐, 전체 흐름 속에선 그의 연기가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장님 얼굴 보니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알 것 같네요.”
“…….”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저희 작가님 흔드실 것 같아서요. 어쨌든 대본은 저희 작가들에게 맡겨 두시죠. 따로 의견이 있으면 감독님과 상의해 주시구요. 다만 신 작가님 따로 불러내서 그러시는 건 그만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만 뭐라 했다면 모르겠지만 아예 결과물을 놓고 이야기하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적당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이제 강범석이 조재웅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형 때문이었어?”
“미안하다.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아, 진짜…… 쪽팔린다, 정말.”
“…….”
강범석의 말에 푹 고개를 숙인 조재웅이 이어지는 말에 놀랐다.
“형이 쪽팔린 게 아니라 내가 쪽팔려.”
“응?”
“나 쪽대본 싫어하는 거 형 잘 알잖아. 근데 쪽대본 나온 거 보고 두말 않고 그러자고 했어. 왜 그랬는 줄 알아? 바뀐 대본 보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잘하는 것들로 바뀌었더라고. 그대로 하면 돋보일 것 같았어.”
“범석아…….”
“내가 저 어린 녀석 연기에 좀 놀랐나 봐.”
“형이 미안해.”
“형이 왜 그랬는지 알겠어. 내가 초조해하는 게 눈에 보였겠지.”
“내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확실히 민 작가, 좀 짓궂은 데가 있어. 그냥 좋게 말하면 될 걸 사람을 불러다가 이렇게 쪽팔리게 할 거 뭐 있나? 아니다, 덕분에 확실히 알았으니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도 없네.”
그날 밤, 두 사람은 포장마차에서 오랫동안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 날, 무슨 일이 있었냐 싶었던 강범석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몰입했다. 그 모습을 본 나상재는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 <너와 내가 만나는 지점, 뫼뵈우스>의 첫 번째 티저가 첫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TV는 물론이고 인터넷까지도 강범석의 드라마 출연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거기다 차세대 연기파 배우 우재환에 대한 관심도도 또한 상승하고 있었으니 드라마를 향한 기대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민경우 다음 드라마라 이거지?”
소식을 접한 박현호 역시 망설이던 끝에 결국 티저를 보고야 말았으니.
“무슨 광고를 이렇게 감질나게 만들어, 만들긴.”
자기도 모르게 드라마의 기대감에 그는 그만 짜증이 나고 말았다.
한편, 그 시각 인천 국제 공항.
입국장에서 누군가가 들어오길 한참 기다리던 김강철은 마침내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여깁니다, 여기!”
김강철의 얼굴을 발견한 그가 환히 미소 지으며 김강철에게 다가왔다.
“오래간만입니다.”
그가 김강철과 악수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