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23화 (123/250)
  • #123. 외나무다리 위 두 사람 (4)

    경찰서 내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세트장이 촬영 준비로 분주했다.

    광수대 팀장 한백준 역은 <역전의 정수>에서 배신자 임 씨를 훌륭히 소화한 윤석규가 맡았다.

    이상훈과 박경택을 위기로 몰아붙일 비리 경찰은 드라마 막바지까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다. 누가 비리 경찰인가 극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순간 배신자 역할로 강한 인상을 남긴 윤석규라면 시청자들에게 혼란을 주기 제격이라 판단해 결정된 캐스팅이었다.

    그 외에도 팀원 주본찬 경사 역에 <셀룰러 메모리>에서 우재환, 강범석과 호흡을 맞춘 구대수가, 최태근 경장 역에 ‘스튜디오 글로리’의 전속 배우인 강도열이, 마지막으로 임이철 경장 역에 신인 배우 송하람이 캐스팅되었다.

    광수대의 첫 촬영을 앞두고 나상재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이상훈은 경찰대를 졸업한 후 형사과를 잠시 거쳐 이곳 광수대에 이제 막 합류한 겁니다. 막내인 임이철보다 경찰 경력이 짧다고 보면 됩니다. 나이는 끝에서 두 번짼데 계급은 팀장님 다음이니 꼬박꼬박 존댓말 써야 하고 톡 까놓고 말해서 불편한 사이죠.”

    각자 경찰서에서 활약하며 주름잡던 이들이 차출돼 구성된 광수대. 그런 곳에 경력도 얼마 없는 이상훈이 합류하게 되었으니 탐탁지 않은 것은 사실. 시놉시스를 통해 각자 캐릭터에 대한 연구를 해 왔음에도 나상재의 설명이 가미되자 훨씬 이해가 빨랐다.

    팀원들 중 이상훈과 가장 대립하는 관계가 강도열이 맡은 최태근이었으니 감독의 디렉팅을 열심히 듣고 있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우재환이 장난스레 말했다.

    “우리 둘이 이렇게 한 드라마에…… 이런 날이 올 줄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러게.”

    “근데 요 근래에 형이 맡았던 역할이랑은 조금 다른 거 아냐? 순정파만 연기하더니.”

    “이쯤에서 다른 역도 맡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작가님 말씀이 있었지.”

    “그래?”

    최근 그가 맡은 역할과는 좀 달라 의아해하던 우재환은 최태근 역에 강도열을 캐스팅한 게 어쩌면 숨은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장을 누비던 스탭들이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가 걸리지 않는 쪽으로 빠지자 스탠바이가 시작됐다. 팀장의 자리 뒤쪽 사건의 개요를 적은 화이트보드를 중심으로 각자 개성이 드러나게 위치를 잡자 나상재의 사인이 떨어졌다.

    드디어 배우들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 * *

    얼마 전 공원 화장실에서 피살된 채 발견된 피해자와 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며 주본찬을 시작으로 각자 조사해 온 자료를 팀원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이름 부창환, 나이 45세, 미아동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9일 저녁 6시 나이트클럽으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40분 후 나이트클럽에 도착, 다시 30분 후 밖으로 나갔는데 이후 행적이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공원에 운동 나온 시민에 의해 발견됐습니다.”

    “무슨 일로 나갔는데?”

    “전화가 걸려 오긴 했는데 대포폰이라 추적이 쉽지 않습니다.”

    “전화 건 놈이 범인이겠구먼. 사인은?”

    “복부 자상에 의한 과다출혈이랍니다.”

    “근처 CCTV를 모두 살펴봤지만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공원 출입구를 제외하곤 화장실 주변에 CCTV가 없었습니다. 범인은 이미 그 점을 알고 그곳을 범행 현장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나이트클럽 사장이라…… 이거 돈 냄새가 나는데. 그쪽으론 뭐 알아낸 거 없어?”

    “안 그래도 알아봤는데요, 대출도 없고 사채를 쓴 정황도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더 찾아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빚 독촉을 받은 흔적은 없습니다.”

    “흉기는?”

    “근처를 다 찾아봤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인근 하천까지 샅샅이 찾고 있는 중입니다.”

    “뒤져도 안 나오면 범인이 가지고 있겠지. 빨리 용의자를 특정해야 할 텐데 말이야.”

    한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 궁리에 빠져 있는 사이 피해자의 사진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이상훈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칼에 몇 번이나 찔렸다고 했죠?”

    이제 와 무슨 뒷북을 치는 건가 싶어 아니꼽게 보는 최 경장의 모습에 임이철이 서둘러 대답했다.

    “총 7군데입니다.”

    “참 많이도 찔렀다. 무슨 원한이 그렇게 많다고. 쯧쯧쯧.”

    그때였다.

    “이거…… 지난 연말 잠수교 피살 사건과 비슷하지 않나요?”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 예요?”

    이상훈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계급이 낮은 최 경장이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지난해 잠수교에서 40대 남자 최호가 피살되었죠. 그때도 사인이 복부의 자상으로 인한 과다출혈이었습니다. 지금 피해자 부창환이 칼에 찔린 위치를 보면 그때 최호의 자상 흔적과 매우 유사한 것 같아서요.”

    이상훈의 말에 슬금슬금 뒷걸음을 친 임이철이 자신의 책상으로 가 컴퓨터로 사건 기록을 찾는 사이 최 경장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이보세요, 경위님. 그때 최호를 찌른 범인은 지금 하늘나라 갔어요. 그럼 귀신이 죽였단 말입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범인 자백했고 살인에 쓰인 흉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흉기에 남은 피해자 혈흔과 범인의 지문이 모두 증거로 인정되었다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이상하더라구요.”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요?”

    “자수까지 한 마당에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을 했다는 게 그렇잖아요. 억울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자살을 한다면 모를까.”

    “…….”

    “자수하는 사람들은 보통 겁이 많죠. 자기가 잡힐까 봐 견디지 못해 자수를 하죠. 그런데 자살이라…… 더군다나 폭행치상으로 전과도 있는 사람이 죄책감 운운하는 건 아무래도 납득하기 힘들어서요.”

    “그래서, 그쪽이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사건 기록 봤으면 알 거 아닙니까. 감식반이나 국과수가 범인이 가지고 있던 흉기가 범행에 쓰이던 게 맞다고 증명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짜고 거짓말이라도 했단 겁니까? 지금이 무슨 쌍팔년돈 줄 아나.”

    “최 형사!”

    “내가 뭐 틀린 말 했습니까? 형님도 말씀 좀 해 보세요. 그때 우리가 범인 잡겠다고 얼마나 뺑뺑이 돌았습니까? 제보받고 증인 찾고 수사망 좁혀지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놈이 자수한 거 아니냐고요!”

    “그만둬. 이 경위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이겠지.”

    팀장의 지적에 최태근이 겨우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상훈의 지적이 그 당시 경찰 내부에서도 나온 지적이었으나 증거가 명확하다는 이유로 결국 덮어 버렸다. 그 사건에만 매달려 있기엔 해결해야 할 사건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이 경위, 과거 사건 기록까지 찾아보면서 노력하는 건 좋아. 하지만 그런 식의 발언은 문제가 있어. 어쨌든 그렇게까지 말한 이 경위 생각을 더 들어보고 싶은데.”

    “여기 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면 일곱 군데나 찔린 것 치고 주변에 피가 튄 흔적이 많지 않습니다. CCTV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는 걸 봐선 범죄에 능숙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전문 칼잡이요.”

    이상훈이 말에 다들 얼굴이 굳어졌다.

    “칼잡이들은 자기만의 습관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비교해 보면 아시겠지만 여기 피해자가 찔린 위치가 최호가 살해됐을 때 칼에 찔린 위치와 꽤 유사합니다. 만약 최호를 살해한 범인이 그때 자살한 그 사람이 아니라면 두 살인 사건엔 공통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완전 소설 쓰고 계시네. 근데 소설 쓰기엔 상상력이 너무 빈약하신 것 같네요. 머리 좋다고 해서 기대했더니만. 음모론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세상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허다해요. 우린 그런 거 많이 봤고요.”

    최태근이 비아냥거렸지만 이상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잠수교 살인 사건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필요성은 있다고 봅니다.”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만약 두 사건이 연관성이 있다면 이번에도 범인이 자수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피해자에 대해 더 파고들어 그가 죽은 진짜 이유를 찾지 못하도록요. 범인이 나타나서 그냥 싸우다 죽였다고 하면 그만이니까요.”

    바로 그때였다.

    “우와, 진짜 비슷하네.”

    임이철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주눅이 든 임이철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이 경위님이 비슷하다고 해서 잠수교 사건 다시 찾아봤는데 정말 그때 피해자의 복부 자상 위치하고 지금하고 너무 비슷한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최태근을 시작으로 나머지 사람들도 임이철의 자리로 와 컴퓨터 화면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

    임이철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광수대 형사1팀입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득달같이 묻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전환데 그래?”

    “자기가 부창환을 죽였다고 자수를 한 사람이 지금 파출소에 있답니다.”

    다들 당황한 얼굴 위로.

    “컷!”

    나상재가 외쳤다.

    동일한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찍기 위해 스탭들이 카메라 위치를 바꾸고 세팅을 새로 하는 동안 조연출이 나상재에게 다가왔다.

    “저, 감독님…….”

    조연출이 내민 무언가를 본 나상재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그러졌다.

    “뭐야, 이게?”

    “3부 대본이 일부 수정되었답니다. 일단 감독님 먼저 보시고 이대로 촬영 진행해 주셨으면 한다는데요?”

    “뭐?”

    A4용지 3장 분량에 수정된 부분이 총 5씬으로 오늘이 아닌 모레로 촬영 스케줄이 잡혀있는 씬들이었다.

    살펴보니 모두 강범석이 맡은 박경택의 분량.

    영화를 찍은 경력은 오래되었지만 드라마는 처음이었던 나상재는 실소하고 말았다.

    “쪽대본 말로만 들었지 내가 이렇게 받을 줄은 몰랐네. 그나저나 촬영 초반인데 드라마 판은 원래 이러는 거야?”

    “아니요. 촬영 일정에 쫓기다 막바지에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거지 이렇게 초반부터 쪽대본이 나오는 건 저도 처음입니다.”

    “우리 오늘 이 씬 찍고 나면 스케줄 끝나지?”

    “네. 다음 촬영은 내일 새벽입니다.”

    “잘 됐네. 끝나고 회사 들어갈 때 나 좀 태워 줘.”

    “집으로 안 가시고요?”

    “드라마 판이 원래가 이렇다면 모를까 촬영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런 식으면 곤란하지. 작가님한테 좀 따져야겠어.”

    영화 촬영까지 모두 마쳤는데도 여러 가지 문제로 개봉을 못 하게 되자 결국 영화 일을 그만둔 나상재의 일화를 잘 아는 조연출이었다. 작가와 감독 사이의 다툼은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었으니 이러다 무슨 사달이 나는 건 아닌가 싶어 불안해졌다.

    * * *

    데스크톱 하나에 연결된 각각의 모니터를 사이에 둔 채 같은 화면을 보고 있는 경우와 신도현은 지금 대치 중이었다.

    처음 두 사람이 대본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선 고민이 많았다. 경우는 물론 신도현 역시 보조 작가 없이 혼자 대본을 써왔기 때문에 두 사람이 아이디어를 나누는 것을 제외하고 대본을 쓰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한참 대화를 나눈 끝에 이 드라마가 투탑 주인공이라는 점을 이유를 들어 경우와 신도현이 각각 이상훈과 박경택의 대화를 나눠 쓰기로 했다.

    이를 테면 경우가 이상훈의 대사를 쓰면 그에 대응하는 박경택의 대사는 신도현이 쓰는 식이었다. 캐릭터를 아예 나눠 대사를 쓰다 보면 캐릭터의 특징을 더욱 또렷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아직까지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4화 대본까지 다 쓴 마당에 3화부터 박경택의 대사를 조금 수정하고 싶다는 신도현의 의견은 뜻밖이었다.

    “물론 지금 대본도 좋지만 경택의 감정이 글로 표현된 부분은 조금 담담한 것 같아서요. 아끼는 상훈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거잖아요. 그런데도 상훈에 대한 원망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면 설득력이 떨어질 것 같아서요.”

    한참을 설명하는 신도현의 말을 경우는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경우의 눈앞에 띄운 화면 속 경택의 대사가 수정되고 있었다. 모니터 너머 집중한 신도현의 모습에 경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그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고 나상재가 들어왔다.

    “작가님,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고개를 끄덕인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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