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22화 (122/250)
  • #122. 외나무다리 위 두 사람 (3)

    최종 시청률 6.3퍼센트.

    마지막 회라고 반짝 상승하기는 했지만 1화가 8퍼센트로 시작해 최고 13퍼센트까지 올랐던 <핏빛 와인잔>의 끝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종편 시대의 서막을 여는 드라마라 칭한 적도 있었지만 어느새 그런 말을 싹 사라지고 온갖 자극적인 막장 클리셰를 섞었다는 오명만 잔뜩 뒤집어썼다.

    그동안 자신의 드라마가 좀 자극적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욕을 먹지는 않았는데……. 오연옥은 20년 드라마 작가의 세월이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실 근처 치킨집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있던 그녀는 하필 TV에서 지난 은상 예술 대상 시상식이 재방송되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주인에게 꺼버리든지 다른 채널로 바꿔 달라고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미 늦었다. 주인이 턱까지 괴고 TV에 집중하고 있는 탓이었다.

    더군다나 때마침 등장한 송지현이 자신에게 등대 같은 역할을 해 준 제작사 대표에게 고맙다고 전하는 모습에 TV를 깨버리고 싶었다.

    한때 자신이 라이벌로 생각했던 그녀가 작품성까지 인정받으며 날개까지 단 상황에서 자신은 있던 날개마저 꺾여 추락하고 있었으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초라했다.

    드라마 작가 지망생들에게 전설로 통했을 때도 있었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무너지는 건가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여기 더 있다가는 더 우울해질 것 같아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일어나야겠다 싶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연옥 작가님? 어머, 오랜만이에요.”

    원수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하필 이런 곳에서 더군다나 이런 모습으로 송지현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오연옥은 놀라 그만 딸꾹질이 나오고 말았다.

    “딸꾹!”

    “괜찮으세요? 저 땜에 놀라셨나 보네. 여기요, 오백 두 개 갖다주세요.”

    “저 방금 일어나려던 참이었는데요, 딸꾹!”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랑 한잔 더 하고 가세요.”

    그러고 보니 송지현이 작업실도 이 근처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이쪽에 작업실을 구했던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왜 인간은 후회할 짓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득 채운 맥주가 나오자 오연옥은 딸꾹질을 없앨 겸 빨리 마시고 자리도 뜰 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참, 드라마 잘 봤어요.”

    ‘이 여자가 사람 염장 지르나.’

    애써 아닌 척하며 오연옥은 태연하게 받아쳤다.

    “그러셨어요? 바쁘셨을 텐데 고마워요.”

    “근데 작가님 평소 작품 분위기랑 좀 다르던데요. 혹시 보조 작가 바뀌었어요? 아니면 누군가 수정 요구를 했다든지.”

    “…….”

    “역시 그렇죠? 내가 아는 작가님은 그럴 리가 없는데 좀 이상하다 싶더라구요. 작가님은 늘 적정선을 지키셨잖아요. 솔직히 이번에 설정이 좀 과했죠. 작가님 스타일은 아니고 분명 누군가 개입한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요.”

    자신의 작품을 꾸준히 봐 왔다는 것도 놀랐지만 단번에 변화를 알아차린 것도 놀라웠다.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 송지현 또한 자신을 그만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오연옥의 마음도 누그러졌다.

    “그 새엄마와 생모가 악연이었다는 설정만 없었다면 훨씬 더 나았을 것 같더라구요.”

    “그렇죠. 하여간 알지도 못하면 나서지나 말지…….”

    다소 격한 반응에 송지현이 놀라자 민망해진 오연옥은 그동안의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니, 실은 그게 말이죠……”

    가뜩이나 계약 문제로 박현호에게 안 좋았던 감정이 있었던 송지현 역시 오연옥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공감하고 있었으니 술자리에서 공동의 적을 씹어대는 것만큼 사람이 쉽게 친해지는 법은 없었다.

    “작품의 최종 결정자는 어디까지나 작가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어쨌든 작가니까요. 어떻게 보면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작품을 수정하려고 하잖아요. 그렇게 되는 순간 작품은 본 궤도를 잃고 엉뚱한 곳으로 가기 마련이죠.”

    그렇게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오연옥은 막연히 적대감만 가지고 있던 송지현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작가님을 좀 오해하고 있었네요. 이렇게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인 줄 진작 알았으면 좋았겠다 싶은 생각마저 들어요.”

    “글쎄요. 오해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얼마 전까지는 개차반이었거든요. 근데 우리 대표님 만나고 생각이 좀 바뀌었죠.”

    “대표님이라면 옛날 SBC에서 드라마 연출하셨던 김종수 PD님 말씀이신 거죠? 저도 한번 같이 일해 본 적 있어서 그분 성품 잘 알죠.”

    “아니요. 물론 김종수 대표님도 좋은 분이시지만 민경우 작가 말한 거였어요.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어려운 것 없이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생각이 깊더라구요.”

    천하의 송지현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민경우에 대해 오연옥도 차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집이 아닌 작업실로 돌아간 오연옥은 민경우가 썼다는 드라마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참 드라마를 보던 그녀는 처음 자신이 드라마를 쓰기로 결심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사는 게 너무 지치고 힘들던 차에 드라마라도 보며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그때 봤던 드라마가 너무 재미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써도 이것보단 낫겠다 싶어 시름을 잊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게 그 시작이었건만.

    그동안 자신의 성공과 시청률에만 목매며 빙빙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자신의 드라마가 그때 봤던 그 드라마와 별다를 게 없다고 느낀 오연옥은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을 떠올리며 다시 드라마를 쓰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 * *

    슛 들어가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평소 마시는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대기실로 돌아간 조재웅은 대본을 보느라 여념이 없는 강범석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쌍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배우가 되기까지 작품을 분석하고 체화된 캐릭터를 표현하려는 그의 노력이 있었다.

    그렇긴 해도 촬영 직전엔 긴장을 풀며 생각을 정리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대본을 보며 고심하는 모습에 조재웅은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카메오로 출연했던 <셀룰러 메모리>를 여러 번 정주행하며 우재환의 연기를 보던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제대로 맞붙어서 연기해 보고 싶네.’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겠다는 그의 원칙까지 깨부수며 드라마 출연에 승낙했던 때만 해도 조재웅은 그가 콧대 높은 신인 배우의 기를 꺾으려 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우재환의 연기가 제법 좋긴 하지만 강범석에 비하면 아직 새 발의 피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형, 왔어? 역시 내가 지금 커피 마시고 싶은 거 아는 사람 형밖에 없지.”

    “상일이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있어.”

    실장으로 진급 후 일이 많아져 강범석만 관리할 수 없었던 그를 대신해 로드 매니저를 하나 붙여줬는데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 신경 쓴다고 자꾸 옆에서 귀찮게 하니까 오히려 더 신경 쓰이잖아. 대본 볼 거니까 좀 나가 있으라고 했어. 아마 휴게실 같은 데 있을 거야. 멀리 가지 않는다고 했거든.”

    그렇게 말하고 커피 한 모금 마신 강범석은 다시 대본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 답이 있기라도 하듯.

    그 모습을 보며 조재웅은 지금 강범석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연기로 밀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

    연기로는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그였지만 늘 정상에 있는 그였기에 더욱 불안감에 시달렸고 그럴 때마다 작품에 몰입하는 것으로 그 불안을 해소하고 있었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내 배우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매니저가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생각한 조재웅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강범석의 말마따나 휴게실에서 다른 매니저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로드 매니저 이상일에게 뒤를 맡기고 자신은 마포로 향했다.

    * * *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멀지 않은 어느 카페 안.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온 조재웅에 모습에 신도현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조 실장님이 저를 어쩐 일로……?”

    “매니저가 작가님 찾는 게 꼭 무슨 이유가 있어서겠습니까? 그래도 한 드라마를 위해서 다 같이 일하는 사이인데 작가님과 좀 소원한 것 같아서요. 일전에 뵙기는 했지만 그땐 잠깐이었고 사람들도 많아서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아, 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범석이가 연기에 대한 열정이 아주 깊습니다. 방금 전에 촬영 현장에 있다가 왔거든요.”

    “그러셨군요.”

    “촬영 기다리는 동안 대본을 어찌나 열심히 보던지 대본이 너덜너덜해졌다니까요. 그만큼 작가님 대본이 좋다는 거겠죠.”

    “뭐, 저 혼자만 작업한 건 아닌데요. 민 작가님도 계시고 나 감독님도 계시고 함께 만들어 가는 거죠.”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시작은 다른 누가 뭐라 해도 여기 계신 신 작가님 아니십니까? 초고가 괜찮았던 덕분에 나 감독님은 물론 민 작가님도 거들고 나선 거구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어쨌든 다른 분들도 그렇지만 신 작가님이 작품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계실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그 대본에서 말입니다. 우리 범석이, 그러니까 경택이 역이 이 상태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부족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감정 표현 말입니다. 아무래도 경택은 희생하는 역할이지 않습니까? 조금 더 인간적인 고뇌나 지금 심적인 괴로움들이 잘 표현되어야 할 것 같단 말이죠. 사실 우리 범석이가 티켓 파워가 좀 셉니다. 그건 작가님도 알고 계시죠?”

    동의를 구하는 조재웅의 말에 신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범석이 보려고 일부러 시간 내서 극장까지 오는 건 그런 범석이의 감정 연기가 한몫한다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3화 이 부분 말입니다.”

    신도현의 시선을 확 끈 조재웅은 비로소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했을 때 경우는 보기보다 깐깐했고 나 감독은 아무래도 <비밀의 계단>에서 우재환과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으니 구슬리기 좋은 사람은 눈앞의 신도현이라 생각한 것이다.

    애초 이번 드라마의 초안을 잡는 것 역시 신 작가였으니 이제 겨우 두 번째 드라마에 들어가는 신 작가라면 자기 입맛에 맞게 구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그런 속내도 모른 채 신도현은 조재웅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었다.

    사실 작품이 시작되면 경력이 좀 되는 작가들은 매니저나 배우를 따로 만나지 않았다. 아예 전화를 꺼놓고 작업실로 찾아와도 문전 박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만나봤자 출연 분량을 늘려달라고 하던지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대본 수정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겨우 두 번째 작품을 하는 신도현은 그런 사정을 알지 못했으니 여우 같은 조재웅에게 목줄이 잡힌 지도 모른 채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촬영 현장.

    “감독님.”

    촬영 장면을 확인하며 다음 일정을 체크하고 있던 나상재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하도섭 실장이 양손에 커피를 든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괜찮으시면 잠깐 저랑 티타임 어떠세요?”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취향에 딱 맞는 휘핑크림 가득 올라간 모카 프라푸치노에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나상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신도현 작가님 어디 가셨습니까?”

    잠시 밖에 나갔다가 사무실로 돌아온 경우는 회의실이 비어 있는 모습에 어쩐지 의아했다. 밤이고 낮이고 회의실에 틀어박혀 있는 신도현이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마침 외출했던 신도현이 돌아왔다.

    “아, 작가님.”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보네요.”

    “네, 잠깐. 그보다 작가님 대본을 조금 수정했으면 하는데요.”

    “대본 수정이요?”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