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21화 (121/250)
  • #121. 외나무다리 위 두 사람 (2)

    신도현은 빨리 차기작을 내지 못했다는 안달에 힘들어했지만 경우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다. 따지고보면 이전 생에 <제로섬>이 방송되었던 건 2011년. 하지만 이번에 방송된 건 2년이나 빠른 2009년이었다.

    인턴 생활을 하며 단막극으로 실력을 더 키워왔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처음부터 미니시리즈를 쓰게 되면서부터 순서가 뒤죽박죽되어버린 탓에 글을 쓰지 못한 것이지 그의 실력이 퇴보한 건 아니라 믿었다.

    그 증거로 막힌 곳만 살짝 건드려줘도 아이디어가 술술 풀렸다. 서서히 이전 생의 경우가 알던 신도현의 모습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카데미를 다닌 것도 아니고 드라마를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다면서 어떻게 이런 건 생각해 내는 거예요?”

    “그거야 작가님이 도움을 주셨으니까…….”

    “말했잖아요. 나는 숟가락만 얹었다고. 미안해지려고 하는데, 나한테 공을 떠넘기기까지 하면 내가 너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잖아요. 안 그래요?”

    경우의 말에 신도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경우가 이끌고 신도현과 나상재가 함께 만든 시놉시스와 대본을 읽던 강범석이 고개를 들어 경우에게 물었다.

    “느와르……네요?”

    “네, 왜 그러시죠?”

    “드라마로 느와르를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요.”

    “그렇죠. 생각해 보면 느와르라 할 수 있는 영화는 종종 있었지만 드라마는 흔치 않은 것 같네요. 처음 여기 계신 신도현 작가님의 시놉시스를 보고 두 분이 떠올랐는데 이왕이면 느와르가 잘 어울릴 것 같더라구요.”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라고 하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볼 수 있는 가족극이나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 혹은 불륜과 치정, 그로 인한 복수극이 주를 이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다수였다. 아무래도 주 시청자층이 여자들이고 경쟁도 심해지다 보니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게 사실이었다.

    물론 남자들을 위한 드라마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아저씨들의 퇴근 시간을 앞당겼다고 퇴근 시계라 불린 <모래시계>도 사실 어떻게 보면 느와르의 분위기를 풍긴다고 할 수 있었다.

    “저 어릴 때 친구 집에 갔다가 <영웅본색>을 아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었거든요.”

    “캬하, 나도 소싯적에 성냥개비 입에 참 많이 물었지.”

    추억에 젖은 듯 나상재가 옛 생각에 빠져들었다. 눈앞에 성냥개비가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물었을 기세였다.

    그만큼 여기 모인 이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 영화였다. 경우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사람들 기억 속에 남는 그런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감독인 나상재에게 드라마 연출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도 영화 같은 드라마를 만들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애초 신도현이 구상한 이 드라마는 한없이 순수하고 정의로운 남자와 오로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남자의 대결이었지만 경우와 나상재가 합류하면서부터 이 부분은 상당히 수정이 되었다.

    “드라마를 간략하게 소개를 하자면 주인공인 상훈과 경택은 고아원에서 처음 만나게 됩니다. 형제처럼 서로를 의지하게 되죠. 경찰이 되고 싶은 상훈을 위해 경택은 그의 뒷바라지를 하기로 결심하죠. 상훈의 꿈이 자신의 꿈이라 여겼으니까요.”

    하지만 돈도 백도 없는 어린애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결국 조직에 들어가게 된다. 경찰이 되겠다는 친구를 위해 기껏 한다는 게 조직 생활이라는 게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경찰대를 졸업한 뒤 형사과에서 크고 작은 사건을 해결한 상훈은 광역 수사대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 살인 사건을 접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범죄 조직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조직에 잠입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 조직에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친구 경택이 중요 인물임을 깨닫게 된다.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이 경찰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 때문에 타락해 버린 친구에 대한 미안함, 그런 친구를 자기 손으로 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상훈은 모든 것을 그만두려 하지만 비리 경찰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경택이 알게 되면서 그들은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된다.

    “서로 다른 사람인데 어떻게 보면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네요. 내가 오른손잡이면 거울 속 나는 왼손잡이가 된다는 어느 시인의 시처럼 말입니다.”

    강범석이 말에 나상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그렇게 볼 수도 있군요. 아, 그래서 민 작가가 제목을 그렇게 짓자고 한 거구먼.”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렇게 봐 주시면 감사하죠.”

    “그럼 누가 상훈을 맡고 누가 경택을 맡는 건가요?”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우재환이 물었다.

    “여러분께 시놉을 보내지 않고 이곳으로 모신 건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죠. 선택은 여러분이 직접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거기에 맞춰 수정을 할 생각입니다. 상훈과 경택을 친구로 설정했지만 두 분 나이 차가 있으니까요.”

    한참 동안의 회의가 이어졌고 결국 나이 어린 우재환이 상훈, 그리고 그의 뒷바라지를 위해 조직행을 감행하는 형 경택의 역할로 강범석이 하기로 했다.

    그 반대되는 경우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죄라고는 모르는 순수한, 그래서 감춰진 진실에 고뇌하는 상훈 역에 우재환이 더 어울린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물론 스스로를 희생하는 경택 역으로 강범석이 딱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역할이 정해지자 작가진은 드라마 수정과 다음 화 대본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대본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하던 약속된 촬영 스케줄을 마친 강범석과 우재환은 이번 드라마를 위해 캐릭터 몰입을 시작했다.

    다른 캐릭터의 캐스팅까지 모두 마치고 첫 번째 대본 리딩을 끝낸 그날 밤.

    대부분이 퇴근해 고요하고 어둑한 스튜디오 글로리였지만 유일하게 밝게 불이 켜진 곳이 있었으니 바로 회의실이었다. 집으로 돌아갔다가 사무실에 다시 나온 경우가 회의실 문을 열자 그곳엔 신도현이 있었다.

    “퇴근 안 하셨어요?”

    “아, 작가님. 작가님은 어쩐 일이세요?”

    “그냥…….”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더니 웃고 말았다.

    “뭐, 같은 이유인 것 같네요.”

    “네, 대본 리딩만 했을 뿐인데 이거 잘못했다가는 배우들한테 밀리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도요. 그렇게 연기를 해 대면 드라마가 조금만 엇나가도 작가 탓하기 쉽죠.”

    그렇게 공감하며 웃고 있는 사이 사무실에 돌아온 또 한 사람, 나상재의 모습에 두 사람은 더욱 크게 웃어 버렸다.

    그렇게 세 사람은 밤이 늦은 시간까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배우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대본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로부터 며칠 후 마침내 <너와 내가 만나는 지점, 뫼비우스>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나상재는 아역들을 앞에 두고 열심히 디렉팅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눈높이 맞게 쉽게 설명한 덕에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학교에서 힘 좀 쓴다는 아이들에게 고아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는 어린 상훈, 자신이 얻어터지건 말건 작은 몸으로 상훈을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경택.

    단 몇 장면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역들의 촬영이 끝나고 그들의 연기를 지켜보던 성인 연기자들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첫 촬영이라 경우는 물론 신도현까지 촬영장을 찾았다. 두 사람은 나상재 바로 뒤에 앉아 카메라에 담긴 배우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상재의 큐 사인이 떨어지자 화면 한가득 강범석이 등장했다.

    * * *

    더러운 어느 술집의 화장실.

    거친 숨을 내쉬며 박경택이 세면대에서 피 묻은 손을 씻어내고 있었다. 아무리 흐르는 물에 씻어도 손에 묻은 핏자국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박경택은 조금 전 자신이 칼로 찌른 사람이 눈에 어른거렸다.

    살려달라 애원하는 남자를 외면한 채 그의 복부를 칼로 찌르고 또 찔렀다. 이미 심장에 멎었는데도 그를 향해서 계속 찔렀다.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는 박경택은 고개를 들어 세면대 앞 거울을 바라봤다. 거기엔 눈물에 젖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첫 살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흥분과 불안을 감출 수 없었던 그때 전화가 울렸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전화기를 몇 번이나 떨어뜨린 그는 겨우 전화를 받았다.

    [형, 어디야? 아직도 출발 안 한 거야? 나 오늘 졸업식인 거 잊었어?]

    “어?”

    [설마 지금까지 자고 있는 건 아니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전화를 하고 싶더라니. 아직 안 늦었으니까 빨리 와. 지금 출발하면 시간 안에 도착이야. 나 형한테 보여 주고 싶은 거 있다고. 그러니까 꼭 와. 알았지?]

    “알았어, 갈게……. 형이 꼭 갈게.”

    전화를 끊은 박경택은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엔 여전히 떨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세수를 시작했다. 피도 눈물도 죄책감도 모두 씻어 내겠다는 듯.

    * * *

    우수 졸업생으로 표창장을 받는 이상훈의 모습을 지켜보는 박경택의 눈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행사가 끝이 나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상훈이 박경택을 찾아내곤 그를 향해 달려왔다.

    “형! 나 표창장 받는 거 봤어?”

    “그래, 봤다. 그거 자랑할 거라고 아침부터 그렇게 전화한 거야?”

    “아, 뭐래. 형이 엄마 아빠 대신이니까 보여 주고 싶어서 그러지. 형, 고마워. 다 형 덕분이야.”

    “알았으면 이제부터 나 호강시켜 주는 거냐?”

    “당연하지. 말만 해. 형이 원하는 건 다 내가 해 줄게.”

    “아서라. 공무원 월급 얼마나 한다고.”

    “그래서 형은 돈도 많이 번다면서 꽃도 안 사 온 거야?”

    “꽃?”

    그러고 보니 주변에 부모와 사진을 찍고 있는 다른 졸업생들은 모두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혼자만 꽃다발도 부모도 없는 모습에 박경택은 코를 훌쩍였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들고 다니냐? 쪽팔리게.”

    “그래도 한 번뿐인 졸업식인데, 꽃이라고 사가지고 오지.”

    “……그럼 지금이라도 사 올까? 교문 앞에 많던데?”

    “됐어. 그냥 해 본 소리야.”

    그때 이상훈이 박경택에게 손을 내민다. 뭔가 싶어 보는 박경택을 향해 이상훈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손을 잡으라는 듯.

    하지만 그는 망설인다. 이 손으로 방금 사람을 죽이고 왔기 때문에. 어쩐지 저 손을 잡으면 자신의 죄를 들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자 덥석 그의 손을 잡는 이상훈.

    “악수 한 번 하기 되게 힘드네. 하여간 인물 나셨어.”

    그동안의 고생에 고마움을 담은 이상훈이 박경택의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이상훈의 모습에 박경택 역시 웃었다.

    그때 그들 앞으로 지나가던 친구를 이상훈이 붙잡았다.

    “우리 사진 좀 찍어줘, 형이랑 나랑.”

    “그래.”

    나란히 서 포즈를 취하던 그때 이상훈은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경택에게 덮어 씌워 줬다.

    “뭐야? 곧 울 것처럼. 그렇게 감동했어?”

    “내가 울긴 언제 울었다고.”

    “고마워, 형. 덕분에 여기까지 왔네. 내가 형 진짜로 호강시켜 줄게.”

    “됐네, 이 사람아. 너나 잘 먹고 잘살면 되지.”

    “그럼 안 되지. 형이랑 같이 잘 먹고 잘살아야지. 나쁜 놈 많이 잡아서 승진도 빨리하고. 형 걱정 마. 앞으론 내가 형 지켜 줄 테니까.”

    나쁜 놈 많이 잡는다고 해맑게 웃는 상훈을 보며 경택은 생각했다.

    ‘너, 나도 잡을 거냐?’

    밝게 웃는 이상훈과 다르게 박경택은 환하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런 그들 위로.

    “컷, 오케이!”

    나상재의 외침에 첫 촬영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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