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20화 (120/250)
  • #120. 외나무다리 위 두 사람 (1)

    경찰 대학의 졸업식 날, 제복을 입은 우재환의 앞에 사복을 입은 강범석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있는 현장.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미소 뒤로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런 미묘한 차이를 오직 표정으로 연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한 카메라에 잡히고 그 장면을 화면으로 지켜보는 경우의 눈빛 또한 그윽해지고 있었다.

    “컷!”

    나상재의 외침에 두 배우의 악수는 풀어졌지만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여전했다. 경우는 이번 드라마도 시작이 좋아 잘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송지현의 드라마 <뷰티풀 라이프>가 은상 예술 대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져 회사에서도 들떠 있는 가운데 느지막이 출근한 경우는 작가실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한번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구먼, 좀만 더 봅시다!”

    “갑자기 제 시놉은 왜 보신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아직 완성된 것도 아닌데 그렇죠.”

    “내 필이 딱 꽂혀서 다른 건 생각이 안 나는데 어쩝니까, 그럼? 작가님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있다고요, 지금.”

    “안 돼요, 아직은 안 된다고요.”

    “두 분 여기서 뭐 하십니까?”

    소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신도현 작가와 나상재 감독이었다.

    평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신도현이 주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의외의 모습에 경우는 어리둥절했다.

    “작가님, 거 마침 잘 오셨네요.”

    영화 <비밀의 계단> 이후 차기작을 구상하던 나상재 감독은 작업실이 따로 없어 사무실로 출근을 하던 중이었다.

    “아니, 내가 일부러 보려고 했던 건 아니고 내 자리가 하필이면 여기 신 작가 옆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정말 우연히 신 작가 책상 위에 올려 둔 시놉시스를 봤다, 이겁니다.”

    “우연히가 아니잖아요, 대놓고 보셨으면서. 작가한테 그게 얼마나 민폐인지 모르세요?”

    “그건 감독님이 잘못하신 것 같네요. 작가들 한참 신작 쓸 때는 예민하잖아요. 서로의 작품에 관심 두지 않는다, 그건 불문율인데요.”

    “그래요, 내가 백번 천번 잘못했어요. 그 점에 있어서는 사과할게요. 근데 신 작가 시놉시스가 굉장히 좋았다니까? 그래서 조금만 더 보여달라고 하는데…….”

    자신을 향한 작가들의 시선이 안 좋아지자 나상재는 점점 주눅이 들고 말았다.

    “예, 내가 잘못했어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나도 내 작품 직접 쓰니까 신 작가 입장 어떤지 이해가 가. 그런데 나는 또 작가인 동시에 감독이라 이겁니다. 좋은 작품을 보면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은 그런 게 있다고요.”

    “감독님이 잘못하신 건 맞는데 오죽하셨으면 이러셨을까 싶은데요. 이왕이면 그냥 보여 드리죠, 작가님.”

    “그게…… 아직 완성이 안 돼서요. 저도 보여 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미완성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요. 그리고 이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시놉시스라구요.”

    경우는 신도현을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더는 작가실의 다른 작가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차를 내준 경우는 그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사실 지금 그가 얼마나 곤란한 상황에 있는지 경우는 잘 알고 있었다.

    첫 작인 <제로섬>이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며 종영했다. 중간에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단 한 작품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으니 신도현 입장에선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스튜디오 글로리와의 계약으로 빨리 차기작을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은 결국 심리적 부담감으로 작용했으니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사정으로 그에게 부담을 주려 하지 않았지만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 그게 작가 본인에게도 좋지 않다는 것을 경우는 잘 알고 있었다.

    “새 작품 시놉시스 쓰고 있었나 봐요.”

    “그게…….”

    “괜찮으시면 제가 한번 보면 안 될까요?”

    “예? 자, 작가님이요?”

    “네. 제가 작가님께 도움을 드릴 수도 있잖아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경우에게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었지만 경우는 어쩐지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것 같았으니.

    결국 쓰다만 시놉시스를 가져와 경우에게 내밀었다. 한참 읽어 본 경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느와르네요.”

    “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남자의 대결을 그린 드라마를 쓰고 싶었는데…… 거기까지 쓰다가 딱 생각이 멈췄어요.”

    한없이 순수한 정의로운 남자와 오로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남자의 대결이 생각보다 볼만했다. 본격적인 대결이 어떻게 펼쳐질지 이 두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경우는 상당히 궁금해졌다.

    그러다 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드라마 속에 나오는 두 남자가 혹시 신 작가와 접니까? 제가 나쁜 쪽?”

    “아니, 그럴 리가요. 조금 힌트를 얻은 건 맞지만…… 그보다 티가 나나요?”

    “아니요,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경우의 지적에 신도현은 마음이 들킬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지난번 드라마도 그렇고 민 작가님이 저한텐 질투의 대상이랄까. 나쁜 쪽이 접니다. 작가님은 드라마밖에 모르는 순수하신 분이잖아요.”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하긴 하지만 저 그렇게 순수한 사람 아닙니다. 제 과거 다 아시는 분이 그런 말씀하시니까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래도 저한테 질투의 대상은 맞아요. 그래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쓰고는 있는데 어째 이번에도 쉽지 않네요.”

    벌써 몇 번의 시놉시스를 쓰다 엎었다는 것을 경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때요? 저랑 같이합시다, 이 드라마. 작가님이랑 저랑 나눠 쓰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지난번 <다잉 메시지>처럼 다른 작가들 더 불러서 같이 회의하고 집필은 작가님이랑 저랑 같이하는 거예요. 지난번 구연하 작가와 정상혁 작가가 했던 것처럼. 물론 작가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강요하진 않을 거고요. 제가 봤을 때 작가님 머릿속에 아이디어는 많은데 그걸 끄집어내는 게 어려운 것 같거든요. 회의하고 이야기하면서 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

    “그래 주신다면야, 제가 더 감사하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제가 감사하네요. 솔직히 작가님 작품에 제가 숟가락 얹는 거죠, 이건.”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어쨌든 신도현의 승낙으로 이 드라마는 스튜디오 글로리와 SBC의 두 번째 프로젝트가 되었으니.

    “근데 감독님은 여기 왜?”

    두 번째 프로젝트를 위한 첫 회의가 열리고 크리에이터로 나상재 감독이 합류하기로 했다.

    “나? 못 들었어요? 여기 민 작가가 나한테도 같이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말이야.”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두 분이 은근히 분위기가 맞는 것 같아서요.”

    “내가 어딜요!”

    “말도 안 돼요!”

    거의 동시에 대답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경우는 웃고 말았다. 전부터 두 사람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비슷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시너지를 일으키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나 감독님만 괜찮으시면 이번 작품 연출을 맡아 주셨으면 하는데요.”

    “내가요?”

    “드라마는 어렵나요? 제가 그 생각을 못 했네요.”

    “뭐, 드라마나 영화나 다를 게 뭐 있나요. 처음엔 생각을 못 해서 그랬고 그 다음엔 기회가 없어서 그랬지, 굳이 영화만 하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뭐 지난번 일로 사람이 고집도 좀 꺾어야 한다는 걸 느끼던 참이었으니까.”

    “그럼 나 감독님이 크리에이터 겸 연출을 맡아 주시면 좋겠네요. 신 작가님도 괜찮죠.”

    “작가님만 괜찮으시다면.”

    “무슨 오립니까? 어미 따라 졸졸졸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얼씨구, 나만 보면 눈에 쌍심지네.”

    “두 분, 진정하시죠.”

    오히려 비슷한 건 부딪치는 경향이 있다고 했던가?

    이 두 사람을 어떻게 구슬려야 할지 살짝 고민이 되는 경우였다.

    “참, 그리고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경우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배우 캐스팅에 관한 건데요. 제가 생각을 좀 해 봤거든요.”

    “아직 시놉도 다 안 나왔는데 벌써 배우 캐스팅이요?”

    “그쪽하고 이야기가 된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제가 하자고 하면 할 것 같거든요. 우재환 씨하고 강범석 씨가 괜찮을 것 같은데. 두 분 생각은 어떠세요?”

    “우재환과 강범석이라…… 난 찬성입니다.”

    “저도 괜찮아요.”

    “근데 두 사람 스케줄 괜찮을까요? 강범석 씨는 더군다나 드라마는 잘 안 하잖아요. 뭐 지난번엔 출연하긴 했지만 그건 카메오였고.”

    “아마 괜찮을 겁니다. 안 되고 되게 만들 테니까 걱정 마세요.”

    경우의 말에 이상하게 수긍이 된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신도현의 시놉시스를 본 순간 경우는 강범석을 떠올렸다.

    지난번 영화 <시체가 나타났다>의 주인공으로 강범석을 만난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한 그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배우 생활이 몇 년인데 척 보면 알죠. 반짝하고 말 사람인지 아니면 오래갈 사람인지. 그런데 몰랐어요. 그 눈빛, 생각해 보면 내가 막 데뷔하고 선배들 보던 그 눈빛이었는데 내 콧대가 하늘을 찌르느라 눈이 가려져 있었더라고요.’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세상은 넓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많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거죠.’

    ‘안일하게 있다가는 밀려나는 건 한순간입니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저도 많은 선배 배우님들처럼 죽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연기하고 싶거든요.’

    ‘그 친구와 제대로 한번 붙어보고 싶어요.’

    경우가 송지현의 드라마를 보면서 새로운 작품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였던 것처럼 강범석이 지금 어떤 심정인지 잘 알 것 같았다.

    우재환, 확실히 신인 배우가 그런 연기를 하면 함께 겨뤄 보고 싶은 거야 당연한 게 아닌가.

    한 프레임 안에 자신이 좋아하는 두 배우가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경우는 가슴이 설렜다. 그는 일단 강범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범석 정도면 배우 의견이 가장 중요했으니 배우만 오케이하면 회사에서도 따를 거란 생각이었다.

    “요즘 스케줄 어떠세요? 일이 많이 바쁘신가요?”

    [그렇죠. 작가님은 모르겠지만 이래 봬도 내가 인기 배우거든요.]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혹시 영화 촬영하고 계신 거예요. 줄줄이 스케줄이 잡혀있는 건 아니죠?”

    [몇 달은 꼼짝 없이 바쁠 예정인데, 왜요?]

    “잘됐네요. 그 후에 저랑 같이 작업하시죠. 드라마로요.”

    [드라마요? 저 드라마 안 하는 거 아시면서. 혹시 또 지난번처럼 돈을 엄청 많이 주는 카메오입니까?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죠.]

    수화기를 타고 낮게 웃는 강범석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아니오. 이번엔 그렇게 못 드릴 것 같아요. 저희가 생각한 적정선에서 개런티를 드릴 예정이거든요. 그리고 카메오 아니고 주인공입니다. 일단은 투탑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중 한 분이 배우님이고 다른 한 분은 우재환 배우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시죠.”

    […….]

    “배우님? 전화가 끊어졌나?”

    [안 끊겼습니다. 그냥 좀 뜻밖이라…….]

    “지난번 배우님 말씀 듣고 저도 생각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마침 좋은 시놉시스가 있어서 같이 해 보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아, 집필엔 저도 참여합니다.”

    [혹시 우 배우도 오케이 한 겁니까?]

    “아니요. 배우님께 먼저 연락을 드린 거거든요. 어떻게 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좋습니다, 하죠. 근데 무슨 역할입니까?]

    “그건 와서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다른 사람도 아닌 강범석이 출연한다는 말에 하도섭 실장은 당장 오케이를 외쳤다. 여러모로 따져도 우재환에게 이득이었다.

    그렇게 주연 배우들의 출연까지 못 박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작가진 세 사람이었다. 매일 날밤을 새며 세 사람은 새 작품에 대해 회의를 이어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시놉시스는 물론 1회 원고가 나오자 스튜디오 글로리 회의실로 강범석과 우재환이 나타났다.

    “오랜만에 뵙네요.”

    “이렇게 다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선배님.”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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