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19화 (119/250)
  • #119. 라이벌 (6)

    해가 바뀌고 한 달이 지난 2012년 2월의 어느 날.

    시청률 표를 보고 있던 박현호가 짜증이 치미는지 책상 위로 탁 하고 내려놓았다.

    “시청률이 갈수록 왜 이래? 첫 방은 8퍼센트로 시작하더니 다음날 10퍼센트, 좋았잖아. 종편, 케이블 통틀어서 기록 세웠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젠 6퍼센트도 위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대본 좋다고 김 대리가 그러지 않았어?”

    좋다, 좋다 할 때는 서 과장이라고 하더니 일이 잘 안 풀리니까 대번에 김 대리라고 부르는 박현호의 심리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봐, 김 대리.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죄송합니다. 분명 오 대표님도 그렇고 제작 PD, 황 PD까지 다들 대본 괜찮다고…….”

    “그런데 시청률은 왜 이 모양이냐고?”

    시청률도 시청률이었지만 게시판이 아주 난리였다.

    애가 보고 따라 할까 무섭다, 아무리 시청률이 좋다지만 드라마를 너무 자극적으로 만드는 거 아니냐, 당장 방통위에 신고를 넣겠다는 사람들까지.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박현호를 더욱 짜증 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으니.

    [소소한 감동을 주는 <뷰티풀 라이프> 시청자들 호평]

    [<뷰티풀 라이프> 연일 시청률 기록]

    [배우들 호연, 감동적인 스토리]

    [한층 깊어진 송지현의 품격]

    바로 <뷰티풀 라이프>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들이 문제였다.

    “이봐, 김 대리. 자네도 <뷰티풀 라이프> 봤어?”

    “아니요?”

    “안 봤어? 대답이 너무 빠른 거 아냐? 꼭 들켜서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말이야.”

    박현호의 매서운 눈빛에 김 대리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안 봤다고 하는데 몰아붙일 수도 없는 일.

    “근데 말이야, 치매 노인이 식당에 찾아온 손님들 고민을 해결해 주는 거라며? 뭐라더라, 누굴 기다리느라 식당에 취직한 거라며? 별 내용도 없는 걸 사람들이 왜 자꾸 보느냔 말이야?”

    “글쎄요, 그…… 제가 봤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힐링 드라마라고…….”

    “힐링? 드라마가 무슨 편백나무 숲이야? 피톤치드라도 나와? 힐링은 무슨 얼어 죽을. 뭐? 착한 드라마? 드라마가 그냥 드라마지 착한 드라마가 어딨어? 그럼 우리 드라마는 나쁜 드라마냐?”

    “…….”

    “됐으니까 오 작가한테 가서 말해. 제대로 다시 쓰라고. 이게 뭐야? 다 대본이 별로니까 이러지. 그만 나가 봐.”

    박현호의 말에 김 대리는 서둘러 전무실을 나왔지만 그의 말을 어떻게 전할지 암담했다.

    애초 시놉시스를 자극적으로 수정하라고 했던 건 박현호였다. 자존심 센 오연옥을 설득해 여기까지 온 게 박현호 때문인데 이제 그 책임을 모조리 오연옥에게 돌리면 어쩌자는 건지…….

    내딛는 걸음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에 반해 박현호는 아직도 콧김을 씩씩 내뿜고 있었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스나 시사 프로만 만들다가 드라마며 예능까지 만들려니 생각보다 능력이 딸렸다. 일단은 외주로 맡기고 있지만 결과물이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사람들이 바빠서 시청을 더 안 하는 시간대엔 기존 프로그램을 재방송으로 돌리고 있는데 콘텐츠가 다양하지 않으니 재방송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같이 전문가들이라면서 왜 이 정도밖에 못 뽑아내는지 한심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치워버리지 못한 하나 <뷰티풀 라이프>. 도대체 그 드라마가 뭐길래 폭발적인 성장세는 아니지만 꾸준히 시청률이 상승하는 건지 솔직히 궁금해졌다.

    “에잇, 보긴 뭘 봐. 됐어. 남 잘되게 도와줄 필요 뭐 있어? 됐어, 보지 마. 보지 마.”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호기심이 발동했으니 결국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박현호는 인터넷 다시 보기를 눌러 버렸다.

    * * *

    이른 새벽, 달빛 식당의 주인 송민석은 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그는 좋은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새벽 시장을 선호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부터 들인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아잇, 깜짝이야?”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는 식당 앞 출입구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미스터 박? 여기서 뭐 하세요?”

    식당 홀 서빙을 돕고 있는 70대 할아버지 미스터 박이었다.

    처음 그가 찾아와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했을 때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젊은 사람도 하기 힘든 식당 일을 늙고 치매까지 걸린 그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탓이었다. 그때 함께 왔던 그의 후배라는 김 씨 아저씨가 그랬다.

    이 근처에서 동생을 잃어버렸다고.

    처음엔 먹고 사느라 동생을 찾을 여력조차 없었다. 밥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동생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는데. 그러니 이곳에서 동생을 기다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어차피 찾을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마음이라도 편하고자 한다며 부탁했다. 보수는 필요 없으니 제발 이곳에서 일하게만 해 달라고.

    가게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돕겠다는 김 씨 아저씨의 말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겠는가.

    걱정이 많았지만 그의 친구들까지 나서 식당 일을 돕고 손님들의 고민도 들어주며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기쁘게 돌아가는 모습에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 새벽에 무슨 일로 여기 있는 건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어르신, 바람이 쌀쌀한데 여기 계시다가 감기 걸려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혜일아, 너 혜일이 맞지?”

    “어르신, 저 민석이에요. 송 사장이요.”

    “내가 이놈아,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치매 초기라 가끔 기억을 잊기는 해도 아예 사람을 착각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송민석은 깨달았다.

    “어르신, 일어나세요.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혜일아, 내가 그때 미안했어. 어린 널 혼자 두고 도망치는 게 아니었는데…….”

    “어르신……”

    “나 살자고 너를 버렸다. 돈 벌어서 너를 찾으러 오면 된다고 생각했어. 한 달만 일하고 돌아올 생각이었어. 그게 1년이 되고 10년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 형, 원망 많이 했지?”

    단순히 동생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아픔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느새 달빛 식당 앞엔 미스터 박과 송 사장이 아닌 젊은 시절의 박현묵과 그의 동생 혜일이 있을 뿐이었다.

    “왜 이제 왔어, 형. 형 얼마나 기다렸다고.”

    “그래, 미안해. 형이 미안해. 나 원망 많이 했지?”

    “오늘은 형이 올까, 내일은 형이 올까, 매일 그렇게 기다렸어.”

    “혜일아, 이제 절대 헤어지지 말자. 형 돈 많이 벌었어. 이제 너 공부도 시켜주고 그동안 못 해 줬던 거 내가 다 해 줄게. 혜일아…… 혜일아…….”

    “어르신? 어르신?”

    정신을 잃은 미스터 박의 모습에 놀란 송민석이 그의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펄펄 끓네.”

    안 되겠다 싶은 송민석은 미스터 박을 들쳐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의 연락에 김 씨 아저씨가 달려왔다.

    “형님은?”

    “지금 잠들어 계세요. 저도 없는데 식당 앞에 계셨더라구요. 날씨가 추워서 몸살감기 같다고 당분간 입원하셔야 할 것 같아요.”

    “고마워, 송 사장. 많이 놀랐지?”

    “뭐……. 그보다 미스터 박이 이상한 말씀을 하시던데요.”

    송민석은 조금 전 그와 있었던 일을 김 씨 아저씨에게 전했다.

    “실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두고 온 거지. 그때 형님 나이 열다섯이었다더군. 동생은 여덟 살이었대. 어린 동생 데리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여관방 앞에 동생 보고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고는 도망쳤다고 하더라고. 여관이면 어린애가 심부름도 하면서 먹고 재워 줄 거라 생각했지.”

    “…….”

    “딱 1년 돈 벌어서 가려고 했지. 그런데 말이 쉽지 어린애가 돈 벌기가 어디 쉽겠어? 거의 거지나 다름없이 그렇게 살다가 겨우 돈 벌고 자리 잡는 데까지 10년이 걸렸대. 그제야 동생을 찾으러 간 거야. 그런데 여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2층집이 생겼다더군.”

    “그게 저희 식당이 있는 자리군요.”

    “그래. 그때부터 신문에 광고도 내고 흥신소에 부탁도 해 봤는데 못 찾았어. 그러다 얼마 전에야 겨우 여관에서 일하던 사람을 통해 동생의 소식을 들은 거야.”

    “그럼 동생 분 찾으신 거예요?”

    “아니, 동생을 두고 온 그 해, 열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해.”

    “…….”

    “그토록 찾던 동생 소식을 듣고 형님이 충격을 많이 받았어. 아마 그래서 치매 증상이 심해지신 것 같아.”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텐데.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무게 때문에 송민석의 마음 역시 편치 않았다.

    그날 이후 미스터 박은 꽤 오랫동안 앓느라 식당에 올 수 없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미스터 박 어디 가셨어요?”

    “……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하고 올걸. 제가 강원도에서 왔거든요. 그때 해 주신 조언 덕분에 새 직장에 취직했어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대신 이것 좀 전해 주시겠어요?”

    “이게 뭡니까?”

    “내복 하나 샀어요. 직장 옮기고 월급 받았거든요. 빨간 내복은 아니지만 날씨도 쌀쌀한데 감기 조심하시라고 전해 주세요.”

    그 손님을 시작으로 미스터 박을 찾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

    그리고 가게로 편지며 선물이 오기도 했으니.

    형이랑 싸운 초등학생이 먼저 사과한 덕분에 형의 소중한 장난감을 얻었다며 그림을 그려 보내왔고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를 오랜만에 찾은 새댁은 아버지와 드디어 화해할 수 있었다며 소식을 전해 왔다.

    미스터 박을 찾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미스터 박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송민석은 병원을 찾아 손님들의 편지를 읽어 주며 그가 쾌차하길 바랐지만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동생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미스터 박 오늘도 안 나오셨어요?”

    “네, 좀 먼 여행을 떠나셨거든요.”

    담담한 얼굴의 송민석이 그렇게 말했다.

    미스터 박이 없는데도 김 씨 아저씨와 친구들은 홀 서빙을 계속하고 있었고 손님들은 미스터 박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미스터 박은 이제 식당에 없지만 송민석은 그가 여전히 이곳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 잘 드는 창가에 홀로 앉아 있는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그가 보이는 것 같아 미소 지었다.

    * * *

    “하아, 들어가기 싫은데.”

    또 무슨 소리를 들을까 싶어 전무실 앞에 머뭇거리고 있던 김 대리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전무실의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소리 대신 우당탕하는 소리만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김 대리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전무님?”

    책상 너머 의자가 창문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전무님? 조금 전에 무슨 소리가 났는데……?”

    김 대리 부름에 박현호가 돌아보자 김 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줬다.

    잔뜩 충혈된 눈, 훌쩍이는 코,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화장지 조각까지. 마치 그의 모습이…….

    “전무님, 혹시 우셨어요?”

    “내가 언제!”

    황급히 나온 대답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박 전무가 왜 눈물 바람인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여 드라마 때문에 회장님한테 한 소리 들었나 싶은 생각이 들자 김 대리는 그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너도 사는 게 참 힘들지? 그래 네 맘 안다.’

    아무 말 없는 김 대리가 의아해 고개를 들자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김 대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할 말 있으면 해.”

    쏘아붙였는데도 당황하지 않는 김 대리는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것은 박하사탕 하나.

    “우울할 땐 단 게 도움이 됩니다. 보고는 전무님 기분 풀어지실 때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하겠습니다. 전무님 파이팅! 힘내십시오.”

    그러더니 도로 나가 버렸다. 그런 김 대리의 모습에 박현호가 황당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왜 저래, 저거?”

    그로부터 몇 주일 후, 50부작 <핏빛 와인잔>이 부진한 가운데 <뷰티풀 라이프>가 케이블 역사상 전무후무한 15%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했다. 그리고…….

    “작가님! 소식 들으셨어요? <뷰티풀 라이프>가 은상 예술 대상 후보에 올랐대요.”

    흥분한 경우의 목소리에 송지현이 말했다.

    “방송국에서 주는 상은 많이 받아 봤지만 이렇게 은상 예술 대상 후보에 오르기는 처음이네요. 고마워요, 민 작가.”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아니에요. 민 작가 아니었으면 이런 드라마 쓸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환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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