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18화 (118/250)
  • #118. 라이벌 (5)

    사표가 수리되자마자 안청모는 스튜디오 글로리로 출근을 했다. 그러자 송지현 역시 사무실로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작가님 작업실로 가도 되는 일인데요.”

    “괜찮아요. 아직은 시놉시스 수정 중이잖아요. 새로운 환경에 자극받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본격적으로 집필 시작하면 작업실에서 먹고 자고 아예 안 나올 테니까 그때 작업실로 오시면 돼요. 참, 제 작업실 어딘 줄은 알고 계세요?”

    “민 작가한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숙제 검사를 좀 해 볼까요?”

    두 사람을 포함, 경우까지 회의실에 들어가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안청모는 자신이 생각하는 <뷰티풀 라이프>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꼬집었다. 그의 지적에 송지현이 수긍을 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는 모습에 경우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두 사람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에 걸친 회의가 끝이 나고 경우는 직접 내린 커피를 송지현에게 내밀었다.

    “좀 의외였습니다.”

    “뭐 가요?”

    “송 작가님 정도 되시면 다른 사람이 작품에 대해 뭐라고 하는 걸 싫어하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그러다 된통 당한 적이 있거든요.”

    “?”

    “사람들은 제가 대박만 치는 줄 아는데요, 연기처럼 사람들 기억 속에 아예 사라진 드라마가 제게도 있답니다. 방송국에서는 아예 거론도 안 하더라구요. 덕분에 사람들은 모르니 다행이죠.”

    희곡을 썼던 송지현의 재능을 알아본 제작사 PD가 그녀를 스카우트한 이후, 그녀는 보통 작가들이 공모전에 당선돼 단막극부터 시작하는 경로를 따르지 않았다. 첫 작품부터 미니시리즈를 썼다.

    공모전에 당선이 되자마자 120부 일일 연속극의 대본을 썼던 오연옥. 일일 연속극 종영 이후 몇 편의 단막극을 써낸 그녀와는 확실히 대조적이었다.

    “남들 다 하는 공모전, 단막극, 이런 걸 안 해 봤지만 곧바로 미니시리즈를 쓰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잘났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PD님 조언 안 듣고 멋대로 썼다가 완전 폭망했어요.”

    “몰랐습니다.”

    “대부분은 잘 몰라요. 아무튼 그때 제작사 대표가 화진 픽쳐스 김현기 사장님이었어요. 너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 어찌나 일목요연하게 말씀해 주시든지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더라구요. 그때부터 사장님이 제 대본을 봐주셨어요. 문제점 지적도 해 주시고. 어쩌면 제가 이 정도 커온 게 사장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얼마 전 화진 픽쳐스의 김현기 전 대표의 부고가 전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송지현의 얼굴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뭐든 오래 하다 보면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착각을 하게 되죠.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새 환경에 자극도 받고 안 좋은 평가도 무던하게 받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는 비밀이군요.”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그러다 날아가요.”

    “그러기엔 무게감이 있으시죠.”

    “몸무게 이야기는 아니죠?”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가 결국엔 웃음으로 무마됐다.

    오랜 시간 일해 온 선배 작가의 조언은 경우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어쨌든 그로부터 일주일가량 송지현은 매일 출근해 안청모와 함께 시놉시스를 수정했다.

    “거봐요, 내가 뭐라 그랬어요.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잖아요.”

    “그렇네요.”

    “확실히 민 작가 안목 있어요. 처음엔 하도 강력하게 추천해서 뭐 약점 잡힌 줄 알았잖아요. 근데 이렇게 드라마에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그랬구나 싶은 생각까지 든다니까.”

    송지현의 칭찬에 안청모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이내 생각이 났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민 작가, 혹시 그 기사 봤어?”

    “무슨 기사요?”

    “그…… 오연옥 작가님 작품 기사, 종편에서 한다고 하던데. 사람들이 송 작가님하고 빅매치네 뭐네 떠들어 대던데…….”

    말을 하던 안청모가 자신도 모르게 송지현의 눈치를 봤다. 그럴 사람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기분이 상할까 싶어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시놉시스에 집중하면서도 안청모의 시선을 느낀 송지현이 입을 열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 실컷 떠들라고 내버려 둬요. 같은 시간대가 아닌 이상, 거기다 지상파도 아닌데 솔직히 경쟁이라고 하기엔 무의미하죠. 남의 일까지 신경 쓸 거 뭐 있어요? 그럴 시간에 우리 드라마나 연구하죠.”

    하필 오연옥 작가의 작품 연출을 황현석이 맡았다는 사실에 조금 신경이 쓰인 것도 사실이었지만 단호한 송지현의 태도에 안청모는 신경을 거두기로 했다.

    “캐스팅은 어떻게 할까요? 혹시 미스터 박에 생각해 두신 분이 있으세요?”

    “네. 사실 이 작품은 그 선생님 보고 생각했거든요.”

    미소 짓는 송지현의 모습에 경우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 * *

    연기 경력만 40년이 넘은 베테랑 연기가 표원문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자, 동네 구멍가게 주인, 학교 수위 아저씨 등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을 주로 연기했던 그였기에 시청자들에게는 꽤나 친근한 이미지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연기를 하고 싶다는 그는 매일 아침이면 약수터로 운동을 나가 건강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날도 운동을 마친 후 씻고 나왔더니 매니저가 어느새 출근해 있었다. 스케줄을 확인해 보니 막바지 영화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왔어? 아침은 먹었고?”

    “그럼요, 선생님. 오늘도 아침 운동 다녀오신 거예요?”

    “그렇지. 이 군도 운동 좀 해. 젊다고 등한시하다가는 나중에 고생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참, 새로 작품 의뢰가 몇 편 들어왔는데요.”

    “그래?”

    “네, 시놉시스 챙겨왔으니까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그러지.”

    매니저와 함께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 안, 표원문은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드라마 2편, 영화가 1편이었다.

    영화는 출연 분량이 많지도 않고 촬영 시기도 스케줄에 큰 상관이 없을 것 같아 출연해도 될 것 같았으나 문제는 드라마 2편이었다. 그것도 비슷한 시기에 방송하는 드라마였으니.

    하나는 채널 DBN에서 힘주고 있는 개국 드라마 <핏빛 와인잔>의 주류 회사 대표인 최 회장 역. 다른 하나는 <뷰티풀 라이프>의 치매에 걸린 식당 종업원 미스터 박이었다.

    이미지 때문이었는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회장님 역할에 흥미가 동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시놉시스를 읽어 보니 주로 활약하는 건 그의 아내 역이었고 이야기 흐름을 위해 존재하는 병풍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른 작품을 보니 또 치매 노인. 나이가 들어 치매 노인을 몇 번 맡아본 적 있는 그는 새삼 어쩐지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하지만 시놉시스를 넘기자 이것은 그동안 그가 맡아왔던 역할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송지현 작가가 쓴 거였어?”

    “네, 송 작가님 평소 작품들하고 분위기가 좀 달라서 놀랐어요. 근데도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고요.”

    매니저의 말에 표원문이 다시 시놉시스에 집중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생각나네.”

    “네?”

    “아, 옛날에 송지현이하고 작품 같이한 적이 한 번 있었어. 그때 완전 망했지.”

    “망해요? 송지현 작가님이요?”

    “뭐, 그땐 송 작가도 작가 경력이 5년도 안 됐을 때지. 이만큼 이름을 날리기 전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때 내가 다른 영화 촬영이 있어서 고사했는데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출연해 달라고 해서 영화를 접고 드라마에 올인했지.”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그래. 근데 드라마가 완전 망해 버린 거야. 시청률이 4퍼센트 나왔나? 옛날에는 시청률이 안 나오면 그것도 화제가 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완전 묻혔어. 여러 사람이 열심히 일했는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면 참 힘들어. 그때 송 작가도 많이 울었지.”

    “어쩐지 상상이 안 되네요.”

    “지금이야 누구나 알아주는 작가가 됐으니까. 아무튼 송 작가가 나한테 참 미안해했어. 나중에 제대로 된 작품으로 꼭 다시 하자더군. 아무래도 영화 출연 포기한 것 때문에 신경이 쓰였나 봐, 그 영화 흥행했거든. 그 뒤로 연락이 없길래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 이렇게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네.”

    표원문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본 매니저는 그가 이 드라마에 출연할 것을 확신했다.

    “주인공은 식당 주인이긴 한데 선생님께 제안이 들어온 미스터 박이 주인공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미스터 박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던데요? 선생님께 시놉을 제일 먼저 보낸다고 꼭 전달해 달라고 했습니다.”

    “송 작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그럼 나도 약속을 지켜야지. 무조건 출연한다고 해.”

    “네, 선생님.”

    차는 빠르게 영화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다른 배우들까지 캐스팅을 모두 마친 뒤 드디어 대본 리딩을 위해 배우들이 QVN 대회의실로 모여들었다.

    “완전 노인정이 따로 없네. 나이 많은 노인네들 집이나 지키고 있지, 뭐 한다고 이렇게 다들 나왔어?”

    “그러는 너는 노인 아니냐? 60이나 70이나. 늙었다고 괄시하지 마라. 나이 들었어도 마음 만은 이팔청춘이다.”

    “언니, 이게 얼마만이야? 우리 같은 드라마 한 게.”

    “그러게. 한 15년 됐지? 참, 너네 손자 이번에 외국에 유학 갔다며? 전액 장학금 받고?”

    “뭘 새삼스럽게. 지가 알아서 한 거지, 내가 뭐 한 게 있나.”

    연기 경력을 합치면 300년은 되는 대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제 10년 차,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달빛 식당의 주인 역을 맡은 조현섭은 허리도 못 편 채 선생님들께 인사하기 바빴다. 그와 함께 미스터 박의 손자 역을 맡은 이태수 역시 동병상련의 동지애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후 대본 리딩이 시작되자 나이에 상관없이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회의실 안에 후끈 달아올랐다.

    * * *

    <뷰티풀 라이프>의 첫 방송이 나가고 난 뒤 경우는 출근을 하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드라마 시청률 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그 대상이 송지현이니만큼 신경이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송 작가의 새로운 시도가 어떻게 될지 관심이 쏠린 가운데 시청률 표를 본 경우의 안색이 좀 어두워졌다.

    3퍼센트.

    하필이면 먼저 방송을 시작한 오연옥 작가의 <핏빛 와인잔>이 8퍼센트를 넘었으니 첫 대결의 승자는 오연옥이라는 기사까지 뜨고 말았다.

    케이블치고는 잘 나온 시청률이었지만 분명 기대치에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거기다 오연옥과의 비교는 신경 쓰일만 했으니 아니나 다를까 송지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소식 들었어요. 시청률이 생각보다 안 나왔네요. 아무리 케이블이라지만 5퍼센트는 무난히 넘을 줄 알았는데.]

    “전 작가님이 시청률은 신경 안 쓰시는 줄 알았죠.”

    [아닌데, 나 엄청 많이 신경 써요. 원래 전교 1등이 혹시나 2등이 치고 오지 않을까 걱정하잖아요? 그런 거랑 똑같죠, 뭐.]

    “그렇습니까? 그런데 저는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시청자들이 더 많이 봐 주면 좋겠지만 어쨌든 재미있게 봐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죠. 인터넷 게시판 안 보셨어요? 본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난리던데요.”

    [세상 모든 제작자가 민 작가 정도만 되면 좋겠네요. 이렇게 작가 마음 편하게 해 주는 제작자는 민 작가밖에 없어요, 알아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화진 김 대표님도 시청률 가지고 저 엄청 압박했다고요. 그러니 시청자 취향에 맞는 드라마를 써라, 시청자만 생각해라, 그 잔소리를 한 거죠.]

    “그럼 전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시청률은 상관없으니 작가님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하세요. 제가 서포트 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네. 어쨌든 제 마음대로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시청자 취향 더 생각해서 써 볼게요.]

    신경이 아예 안 쓰이는 건 아니었지만 작가에게 미칠 악영향 때문이었으니 조금 밝아진 송지현의 목소리에 경우는 다소 안심을 했다.

    초반부터 휘몰아치는 전개에 <핏빛 와인잔>으로 시선이 쏠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극적인 음식만 먹다 보면 식재료 본연이 내는 맛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

    경우는 은근하게 오래 끓인 해장국처럼 송지현의 드라마를 찾게 될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이 심심한 이야기에 자신들의 모습을 엿보게 될 테니까.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송지현의 이야기에 자극을 받은 그 역시 새로운 소재에 대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작가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3~4회 방송이 나가자 그의 예상대로 <뷰티풀 라이프>의 시청률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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