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17화 (117/250)
  • #117. 라이벌 (4)

    연기 자욱한 연탄 껍데기집 문을 연 안청모는 피식 웃었다.

    구석진 곳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집게를 들고 돼지 껍데기를 뒤집는 처량해 보이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 김은기.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다니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 그의 모습에 안청모는 혀를 차고 말았다.

    “인상 좀 펴요. 아님 어깨라도 펴든가. 여기 사람들 무서워서 껍데기나 제대로 먹겠어요?”

    목소리에 돌아본 김은기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넌 나 보면 그 소리밖에 할 줄 모르지? 사람 생긴 거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마라. 나 이래 봬도 우리 아버지 닮았어. 우리 아버지 동네에서 미남이라고 소문났었다고.”

    “그 동네가 어딘데요? 어디 달나라? 아니면 화성인가?”

    “너 지금 우리 아버지 생긴 거 가지고 무시하냐? 돌아가신 분한테 너무한 거 아냐?”

    그러자 안청모가 고개를 들고 천장을 향해 말했다.

    “아버님, 쏘리!”

    “참나, 하여간 한마디를 안 져! 너처럼 자기 할 말 다 하는 후배도 없을 거다. 인상을 쓰면 뭐 해? 겁을 먹어야 말이지.”

    “선배 그럼 혹시 그동안 저 겁먹으라고 일부러 인상 쓰고 그러고 다니셨던 거예요? 아이구, 무서워라.”

    안청모의 재롱에 김은기는 자신이 졌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게 어깨도 좀 펴고 항상 웃는 낯으로 다니세요. 이제 나 없으면 옆에서 누가 챙겨 줘요. 후배들이 선배 얼마나 무서워하는데요. 어째 사람이 변한 게 없어요, 변한 게.”

    김은기는 자신의 빈 소주잔에 술을 채워 주며 주절대는 안청모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이내 술잔을 들었다. 입안 가득 감도는 소주의 쓴 맛을 잠시 느끼던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내가 어떻게든 도와줬어야 하는데.”

    “선배가 왜요?”

    “그냥…… 내가 미안해.”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결국엔 다 제 탓인데요, 뭘. 깜냥도 안 된 놈이 욕심만 많아서 덤비다가 사고 났으니 다른 사람이 느끼기에 찝찝할 수도 있죠. 그래도 선배 덕분에 B팀에 들어간 거니까 그 정도면 할 만큼 하셨어요.”

    “그래도 드라마 연출자가 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결국 나가는 거 아냐.”

    “선배,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요. 바짝 긴장하셔야 할걸요. 몇 년만 있어 봐요. 김은기보다 안청모 이름이 먼저 나오는 때가 있을 겁니다. 아니다, 당장 내년만 해도 제 연봉이 선배 연봉보다 더 나오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민 작가가 섭섭지 않게 해 주겠다고 그래서 기대되던 참이구만.”

    “민 작가가 그래? 혹시 거기 남는 자리 없냐?”

    “왜요? 돈 많이 준다니까 혹해요? 미안하지만 선배는 안 됩니다. 선배는 무슨 일이 있어도 MBS에 붙어 있어야죠. 그래야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 편성 잡아 주실 거 아닙니까?”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 벌써 그쪽 식구 다 됐구만. 벌써부터 선배나 이용해 먹고 말이야.”

    “좋은 게 좋은 거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국장 자리 꿰차십시오. 못 하면 알죠?”

    “웃긴 놈이네, 이거. 그 뭐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더니 그거 아냐?”

    김동권 국장에게 안청모가 사표를 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모처럼 밝아진 안청모의 얼굴에 그가 진심으로 이 일을 반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떠나는 사람 미련 없이 보내 주기로 했다. 어차피 아예 못 보는 것도 아니었으니.

    “참, 현석이도 그만둔다고 하던데.”

    “예? 갑자기요? 그럴 거면 진작 그만두지. 그 인간은 어디로 간대요?”

    “그 인간이 뭐냐, 그 인간이. 선배한테.”

    “죄송해요.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도무지 정이 안 가잖아요, 정이. 아무튼 어디로 가는데요? 아예 이 바닥 뜨는 건 아니죠?”

    “유니언 스튜디오 간다던데.”

    “그래요? 어쨌든 이제 얼굴 마주칠 일은 없겠네요. 어련히 알아서 하겠죠. 술이나 드시죠, 술이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린 안청모는 주거니 받거니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황현석의 일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알지 못한 채.

    * * *

    김 대리가 박현호에게 서류 뭉치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 따끈따끈한 시놉시스 수정본과 1화 대본이 나왔습니다.”

    “서 과장은 읽어 봤어?”

    자신을 또 서 과장이라 부르는 박현호의 모습에 움찔했지만 김 대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MSG를 첨가해 자극적으로 수정이 되었더라구요.”

    “한번 읊어 봐.”

    “네. 새어머니와 여주인공 생모 사이의 악연을 더했더라구요. 사실은 새어머니가 생모의 친구였던 거죠. 집안의 반대만 겪던 친구가 임신으로 마침내 결혼 승낙을 받자 배가 아팠던 겁니다. 잘생긴 데다가 재벌 후계자인 친구 애인이 탐이 났던 거죠.”

    “그래서 빼앗기로 작정을 하는 거구만.”

    “네. 죽일 마음을 먹고 일부러 사람을 시켜 사고를 낸 겁니다. 친구는 죽었지만 그 딸은 결국 살아난 거죠. 그리고 주조장을 운영하던 마음씨 좋은 부부가 현장을 목격하고 자기 딸로 키운 거고요. 딸을 위해 진실을 숨긴 양어머니는 마침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려 주는 거고요.”

    “그럼 남은 건 복수뿐? 아무리 아버지와 결혼한 새어머니라고 해도 내 엄마를 죽게 한 원수에 천륜까지 끊어 놨으니 당연히 처절한 복수가 이어져야지. 안 그래?”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동안 해 왔던 새어머니의 악행을 모두 까발리고 결국 쫓아내는 거죠.”

    “거봐, 내가 뭐랬어. 훨씬 낫잖아. 이러니까 제목이 더 확 사네. <핏빛 와인잔>! 복수의 결정타를 날리는 거지. 내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너는 피눈물을 흘릴 거다. 캬, 좋네.”

    박현호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김 대리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송지현 작가님의 새 작품이 제작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순간 밝았던 박현호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송지현? 하여간 그 여우 같은 여자……. 편성은 벌써 받았겠지? 아니 그보다, 어디서 한대?”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케이블에서 할 거란 소문이 있습니다.”

    “뭐? 케이블? MBS, KBC, SBC가 아니라? 그 여자가 하겠다고 하면 다들 납작 엎드려서 감사합니다, 할 사람들이 왜?”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잠시 생각에 잠긴 박현호는 마침내 생각이 났다는 듯 박수를 쳤다.

    “그래, 그거네. 이번 작 완전 망한 거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영 아니었던 거야. 지상파에서 까이고 까이다 결국 케이블로 가게 된 거야. 안 그래?”

    “전무님 말씀이 다 옳습니다.”

    “하하, 하하하. 그런 여자를 거금 들여 데리고 올 뻔했네. 아유,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하하하. 하하하.”

    박현호가 정신 없이 웃고 있는 사이, 경우는 QVN 제작기획국 국장 최태영을 만나고 있었다.

    “솔직히 저희야 송지현 작가님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이죠. 아시다시피 저희 QVN은 예능 프로그램 중심이거든요. 드라마 쪽으로도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긴 하지만 먼저 찾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다 이렇게 기획안까지…….”

    지상파 방송을 재방송하는 데 그쳤던 다른 케이블 방송과 다르게 QVN은 자체 제작 프로그램이 주를 이뤘다. 물론 예능 중심이었지만 훗날 시청률 대결로 지상파를 웃도는 드라마를 만들 만큼 드라마 쪽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경우는 다른 곳이 아닌 이곳 QVN을 처음부터 점찍어 두고 있었다.

    “그래도 저희 쪽에서 어떤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지 알고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송지현 작가님 정도면 그냥 편성을 내어 드렸을 수도 있는데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KBC 출신입니다. PD 생활 오래한 덕에 송지혁 작가님 명성 잘 압니다. 방송국에서 서로 모셔 가려고들 난리지 않습니까?”

    “그거야 방송국 입맛에 맞는 드라마를 쓰니까요. 하지만 이번엔 기대하시는 것과 다를 겁니다. 작가님이 그동안 써 온 드라마와는 조금 다르거든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떨리네요. 그럼 한번 볼까요?”

    사락사락.

    오직 시놉시스를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집중하던 최태영이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서야 시놉시스를 덮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참, 좋네요. 그동안 송지현 작가님 드라마 빼놓지 않고 다 보긴 했는데 말씀하신 대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는데요. 치매 노인이 등장해도 우울하지 않고 정말 한편의 아름다운 동화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송 작가님이 들으셨으면 정말 좋아하셨겠어요.”

    “꼭 송 작가님 연극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네요.”

    “송 작가님 연극하셨던 걸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이래 봬도 그 당시 송 작가님 졸업 작품을 직접 본 사람입니다. 아, 그렇다고 실력이 퇴보했다는 건 아니구요.”

    “이해합니다. 솔직히 송 작가님 작품성보다는 대중성에 중점을 두신 분이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이 한결 편하네요. 물론 지금은 대중성에 작품성까지 더한 느낌입니다.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송 작가님 연극하던 시절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요. 민망하다면서 본인 입으로는 말씀을 안 해 주시더라구요.”

    “확실히 그때도 업계 관계자들이 주목했죠. 가난한 중국집 배달부와 스트리트 댄서의 사랑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 냈거든요. 풋풋하면서 밝게요. 다 보고 나간 관객들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주 환했거든요.”

    “어쩌면 그게 송 작가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실제로는 힘들게 살아오셨잖아요. 그런데도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는 거겠죠.”

    “맞습니다.”

    “그럼 어떻게 편성은……?”

    “당연히 내 드려야죠. 지금 당장이라도 원하는 시간대로 드릴 수 있습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희 시간대가 지상파처럼 고정된 게 아니라 유동적이거든요. 원하시는 시간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다음 주라도요.”

    “하하. 감사하지만 그건 저희가 무립니다.”

    “그럼 언제쯤 방송 가능할까요? 될 수 있으면 ‘스튜디오 글로리’ 제작 시기에 맞춰 드리겠습니다.”

    “연말쯤으로 하시죠. 아무래도 연말엔 훈훈한 분위기가 잘 어울리니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편성까지 못 박아 둔 경우는 보도 자료를 뿌리기 시작했다. 송지현 작가의 신작이 연말 QVN에서 있을 거란 소식에 사람들은 의외라 생각하면서도 기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소식은 박현호에게도 들어갔으니.

    “연말? 왜 하필이면 연말이야?”

    채널 DBN 개국 역시 12월로 잡힌 상황. 아니라곤 했지만 그래도 상대는 송지현이었던 만큼 신경이 쓰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봐, 서 과장. 송지현 차기작 시놉시스 좀 구해서 나한테 가져와. 어떤 드라마를 할 건지 내가 직접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근데 전무님…….”

    “왜?”

    “아, 아닙니다.”

    자신은 서 과장이 아닌 김 대리라고 말하려던 그는 그 말을 삼키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QVN 직원들이 돌려보던 송지현의 시놉시스를 겨우 구한 김 대리는 그대로 박현호에게 가지고 갔다. 한참을 읽던 박현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노인네들 이야기 누가 좋아한다고. 예술 하고 싶은 건 알겠지만 이건 아니지.”

    자기 복제라는 비판을 받는 송지현이었지만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항상 높게 나온 그녀였다. 그러니 케이블에 간다는 말에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경이 쓰인 박현호였다.

    가뜩이나 종편이 개국하는 연말, 오연옥 작가의 작품과 비교되기 딱 좋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박현호는 <뷰티풀 라이프>의 시놉시스를 보고 마침내 안심할 수 있었다.

    “홍보팀에 얘기해서 기사 좀 내라고 해. 드라마 계의 쌍두마차, 오연옥과 송지현이 각각 종편과 케이블을 선택했다고. 이왕이면 대결 형식을 빌려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켜 보란 말이야. 누가 승자가 될지 관심 좀 끌어 봐. 그러면서 <핏빛 와인잔> 홍보도 좀 하란 말이야, 알았어?”

    “네, 전무님.”

    두 사람의 시놉시스를 모두 본 박현호는 이번 대결에서 오연옥이 승리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두 사람의 차기작에 대한 기사에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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