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16화 (116/250)
  • #116. 라이벌 (3)

    MBS 황성준 CP는 자신의 조카인 황현석을 불러다가 놓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삼촌?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황현석의 재촉에 황성준이 겨우 입을 뗐다.

    “너, 이참에 MBS 그만두는 건 어때?”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MBS를 나가라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MBS에 더 남아 있는다고 나아질 게 없는 것 같아. 라인이 없는 김동권 국장을 가볍게 봤어. 잠시 잠깐 지나기는 소나기라고 생각했지. 근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지가 못해.”

    <사냥개>만 잘되면 김동권을 밀어내고 자신이 국장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냥개>가 결국 제작 중단에 이르고 김동권이 초강수로 <셀룰러 메모리>를 히트 친 이후 그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후 신인 작가의 드라마인 <제로섬>마저 중간에 살짝 휘청이기는 했지만 시청률 1위로 종영을 했다. 그러자 이사회도 김동권의 작품 보는 눈은 물론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다며 힘을 실어 줬으니 황성준이 불안해진 건 사실이었다.

    “지난번 정기 인사 때 김은기가 CP가 됐어. 너 이게 무슨 의미라고 보냐?”

    “글쎄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좀 늦은 거 아니에요?”

    “그래, 연차에 비해 늦긴 했지. 하지만 그건 김은기가 능력이 부족하다기보다는 라인이 없어서 라는 말이 더 정확해. 밀어줄 사람이 없으니 B팀만 전전하다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못 잡았잖아.”

    “그럼 삼촌 말씀은 김은기가 이제 김동권 국장의 라인이 되었다 그 말씀이세요?”

    “그래, 김동권이 국장이 되고 가장 많은 덕을 본 게 누구야? 바로 김은기 아냐? 듣자 하니 <셀룰러 메모리>도 김 국장이 직접 꽂아 준 거라 하더라. 그 이후에 김은기가 연출한 드라마가 몇 편인데?”

    “하나같이 성적도 괜찮았죠.”

    “다음 국장은 김은기가 될 거라 말이 많아.”

    “하지만 이제 막 CP가 되었는데 그렇게 되기야 할까요?”

    “그래,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소리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넋 놓고 있다가 뒤통수 맞는 거 한두 번 본 게 아냐. 솔직히 너 <사냥개>가 엎어지고 나서 맡은 작품이 몇 개나 돼? 김은기랑 비교해 봤을 때 말이야.”

    “그게…….”

    “김은기가 배는 많아. 안 그래?”

    “네.”

    “나라고 왜 너를 내보내고 싶겠어.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우리한테 절대 유리한 상황은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는 큰물에서 놀아야지.”

    “그럼 삼촌은요?”

    “어떻게든 버텨야지. 버티고 있다가 다음을 노려야지. 결국 이쪽 바닥은 오래 버틴 놈이 이기게 되어 있어.”

    “하지만 스카우트 제의도 없는데 어디로 가요?”

    “유니언 스튜디오!”

    “예? 거기 업계 1위로 통하잖아요. 그런 곳에서 저를 받아 줄까요?”

    “몹쓸 놈들. 뭘 얼마나 해 댔으면 애가 이렇게 기가 팍 죽었어?”

    “…….”

    “자신감을 가져! 이래 봬도 해외 유학파 출신 아냐! 주춤한 건 최근 3년뿐이었지 그전까진 너도 잘나갔어. 안 그래?”

    “그거야…….”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괜찮아. 너 채널 DBN 알지?”

    “새로 개국한다는 종편이잖아요. 거기가 유니언 모기업이라는 소문이……. 삼촌, 설마?”

    “그래, 그 덕에 인재를 마구잡이로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야.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까지 모으는 건 아니고. 너 정도면 꿀리지 않잖아. 다행히 내가 유니언 오진원 대표와 아는 사이라 내가 직접 부탁해 볼 참이다.”

    “삼촌!”

    “그러니 넌 나만 믿고 있어. 거기 가서 히트작 몇 개만 하면 앞으로 우리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거다. 알았지?”

    “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유니언 스튜디오에 찾아온 것이었으니.

    “제 조카라 이런 말 하면 팔불출로 보일지 몰라도 실력은 괜찮은 편입니다. 대표님도 아시죠? AFI, 거기 출신입니다.”

    “아, 그래? 인재가 이렇게 가까이에 숨어 있는 줄은 몰랐어. 앉아.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긍정적인 오진원의 반응에 황성준의 기대감이 한껏 올라갔다.

    제 발로 찾아온 황성준 덕분에 안 그래도 박현호의 수정 요구를 오연옥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궁리하던 오진원은 한 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다음날, 오진원은 오연옥 작가의 작업실로 찾아갔다. 역시 수정 이야기를 꺼내자 자존심 강한 오연옥이 길길이 날뛰었다.

    “뭐? 수정이요? 제깟 놈이 드라마에 대해서 알면 뭘 안다고 내 대본을 보고 수정이 필요하네, 마네 하는 거랍니까?”

    “작가님 참으세요.”

    “나, 이 바닥에 20년은 넘게 있었어요. 그런 나한테 누구도 수정이네, 뭐네 요구한 적 없다고요. 나보다 경력 오래된 PD들도 내 이야기에 수긍했지 토를 잘지는 않았다 이 말입니다.”

    “그럼요. 오 작가님 명성이야 누구보다 제가 잘 알죠.”

    “그런데 이제 갓 서른 넘은 놈이 뭐가 어쩌고 어째요?”

    “박 전무야 확실히 드라마의 ‘드’ 자도 모르죠. 하지만 입장 바꿔 놓고 보면 박 전무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 대표님!”

    “진정하시고 일단 제 이야기 끝까지 들어 보세요.”

    “좋아요. 말씀하세요.”

    “우리가 지금 방송할 곳은 지상파가 아닙니다. 종편입니다. 그동안 뉴스나 시사 프로 몇 번 하던 곳에서 처음으로 드라마도 하고 예능도 하는 겁니다. 박 전무 입장에서야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겠죠.”

    “이해를 못 한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네. 작가님 뜻 제가 잘 압니다. 하지만 기존 시청층과는 전혀 다른 시청자들을 끌어와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자극적이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거죠. 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 전무가 이 일을 위해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노력해 왔는지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 작가님이 조금 양보해 주시죠.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희가 연출은 최고의 인재로 붙여 드리겠습니다.”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는 모양이죠?”

    “네. 미국 유학파 출신 MBS 황현석 PD를 스카우트하려고 접촉하고 있습니다. 작가님도 아시죠? AFI. 이 바닥에서 명문 아닙니까?”

    “그, 그렇죠.”

    “이게 다 작가님과 드라마를 위해서라는 것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좋아요. 박 전무 말이 맞다고 생각해서 요구를 받아들이는 거 아닙니다. 오 대표님 봐서 수정 하죠.”

    “감사합니다.”

    제 발로 들어온 황현석 덕분에 껄그러운 문제를 해결해 버린 오진원은 부담을 덜 수 있었다.

    * * *

    “만나서 반가워요, 송지현입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안청모라고 합니다.”

    송지현이 내민 손을 황송한 듯 잠시 보고 있던 안청모는 손에 찬 땀을 바지에 닦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형님, 너무 긴장하시는 거 아닙니까?”

    “내, 내가 언제?”

    아니라곤 했지만 말까지 더듬는 그의 모습에 경우는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안청모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어쨌든 여기까지 오신 걸 보면 마음은 굳히신 모양이네요.”

    “네, 제가 한 결심은 좋은 드라마를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는 거였지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건 아니었거든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야죠.“

    경우를 보며 미소 짓는 그의 모습에 송지현은 결국 그가 이곳을 택한 게 경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자신도 어쩌면 이곳을 택한 게 그 때문이었으니 안청모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제가 시놉을 써 왔는데 말이죠.”

    송지현은 안청모에게는 물론 경우에게도 가지고 온 시놉을 건네줬다.

    “저도 주시는 겁니까?”

    “명색이 돈 대 줄 대표님인데 안 드릴 이유가 없죠. 읽어 보시고 거침없이 말씀해 주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드라마 작가 탑이라 불리는 송지현의 시놉시스였다. 인터넷상에 돌아다니는 그녀의 시놉을 구해 읽어 본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작가가 직접 건네주는 시놉을 받는다는 건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작가인 경우는 물론 연출자인 안청모도 정신없이 시놉을 읽기 시작했다.

    먼저 말문이 트인 건 경우였다.

    “주요 인물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네요.”

    경우의 지적에 송지현은 살짝 미소 지었다.

    사실 송지현의 주무기는 트랜디함이었으니, 젊은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법정에서, 병원에서, 학교, 간혹 생과 사의 경계에서도 그녀의 주된 이야기는 사랑, 로맨스였다.

    그런데 이번 드라마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60~70대 노인들이라니.

    “시니어 식당이요?”

    “젊은 사장이 하나 있고 종업원들은 다 노인분들이죠. 그중엔 치매 환자도 있고요.”

    “…….”

    “우리는 아이들한테 그렇게 말하잖아요. 실수해도 괜찮아. 그런데 노인분들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노인들이 실수하면 절망하죠. 그럴 사람이 아닌데 싶거든요. 사실 그분들에게도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송지현의 할머니는 꽤 오랫동안 치매를 앓다 세상을 떠났다.

    “어렸을 때 할머니를 싫어했어요. 치매가 뭔지 이해를 못해거든요. 밥을 먹었는데 왜 밥을 안 주냐, 맛있는 건 지들만 먹는다, 어린 제가 보기에 할머니는 이상한 말만 하는 사람이었어요.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데 할머니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존재, 그런 생각밖엔 안 했어요.”

    “어렸으니까요. 저도 어렸을 때 그랬는걸요.”

    역시나 할아버지가 치매였던 안청모가 그녀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경우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이 치매라고 하더라고요. 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처럼 되는 게 끔찍하겠죠. 근데 결국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든 걸릴 수 있는 병이잖아요. 막연히 두려워하고 끔찍하게 여기기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식당에서 일하는 거군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요.”

    “서로 도우면 못 할 일은 없잖아요.”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작가님 평소 작풍과는 전혀 다른데요.”

    “사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내 성공밖에는 관심이 없었거든요. 근데 민 작가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자신을 바라보는 송지현의 모습에 경우의 눈이 커졌다.

    “저요?”

    “네. 저는 작가님만큼 돈은 없으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선한 영향력 좀 전해 보려고요. 사실은 이런 이야기로는 지상파를 가지 못할 것 같아서 케이블로 가겠다는 것도 있어요.”

    하긴 아무리 송지현이라고 해도 시청률이 잘 나올 것 같지 않는 드라마를 하겠다고 하면 그대로 받아들여 줄 양반들이 아니었다.

    콘텐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케이블이라면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으니 받아들일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이름 자체가 브랜드나 다름없는 송지현이니까.

    계속 시놉을 살펴보던 경우는 그녀가 전보다 한 단계 위로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

    트랜디함을 무기로 삼던 그녀가 자신만의 철학을 드라마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람과 가까이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어쨌든 시놉 보시고 좀 이상하다거나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적극 반영할 테니까.”

    “어떻게 제가…….”

    “이보세요, 안 PD님! 그런 식으로 안주하다 보면 발전이 없어요. 저도 사람인데 실수한다고요. 그러니까 찾아보세요. 안 PD님은 꼭 문제점 찾아내셔야 해요. 다 좋다고 하면 안 돼요! 그럼 나 같이 일 안 하는 수가 있어요.”

    송지현의 엄포에 안청모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었다.

    “그나저나 제목이 참 좋네요. <뷰티풀 라이프>.”

    “어쨌든 인생은 아름다운 거니까요. 참, 어디서 방송할지 생각해 보셨어요?”

    “안 그래도 다음 주에 QVN 관계자랑 만나기로 약속 잡아 놨어요.”

    “역시, 민 작가 추진력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럼 나도 힘내서 대본 써야겠네. 아자! 안 PD도 파이팅!”

    “파, 파이팅!”

    엉거주춤 주먹을 쥔 안청모의 모습에 경우는 웃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