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15화 (115/250)
  • #115. 라이벌 (2)

    “민 작가가 조건이라고 하니 괜히 겁부터 나네. 뭔데요?”

    “다른 건 아니고 안청모 PD님께 연출을 맡기는 겁니다.”

    “안청모, 안청모라…….”

    “작가님께서 협업할 PD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까다롭다는 거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한테 조건으로 그 사람을 내건 걸 보면 실력이 괜찮나 봐요. 어떤 작품 했는데요? 혹시 민 작가랑 협업한 적 있어요?”

    “저 입봉할 때 조연출 맡으셨어요.”

    “조연출 때 일을 잘했나 보죠? 근데 조연출 잘한다고 연출까지 잘하는 건 아니에요. 그건 아시죠?”

    “물론입니다. 안 되겠습니까?”

    “안 된다기보다……. 민 작가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좋아요. 한번 해 보죠.”

    “감사합니다.”

    “가만…… 근데 안청모 PD라면 MBS 소속 아니에요? 지난번 <제로섬> 연출하다가 하차한 그 PD! MBS 소속 PD가 케이블 드라마 연출을 어떻게 맡아요? 설마 민 작가…….”

    “네. 스카우트할 생각입니다.”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었요? 그럼 민 작가 안목을 한번 믿어 볼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작가님 실망시키는 건 아닐까 걱정되네요.”

    “그런 걱정을 하는 거 보니 다행이네요. 생각 없이 막 저지르는 것보단 적어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드네.”

    “작가님 걱정하시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만으로는 안 돼요. 최선을 다해 주세요.”

    “물론이죠.”

    송지현의 동의가 떨어지자 경우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사실 안청모의 실력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전 생과 달리 그는 현재 지금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제로섬>을 찍을 당시 사고 때문이었다.

    혹시나 송지현도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냥 넘어가 다행이라 생각했다.

    숨기려고 했지만 연출을 맡은 그가 드라마를 찍다가 사고를 당해 중도 하차한 사실이 암암리에 퍼져 버렸다. 사고가 누구 하나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마치 그가 잘못한 것처럼 소문이 나고 말았다. 어차피 나가 버린 사람이었으니 그의 탓을 하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가들이나 다른 스탭들이 혹시나 그와 일을 했다가 악재가 닥칠까 봐 그와 일을 꺼리게 되었고 결국 일손이 부족한 드라마의 B팀 자리만이 그에게 돌아갔다.

    경우가 알기로 드라마 역사에 길이 남을 연출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건만 제대로 활약을 하지도 못한 그의 모습에 경우는 안타까웠다.

    경우는 곧바로 안청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시간 있으면 저랑 좀 만나시죠.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경우는 부디 이번 일이 잘 되길 빌었다.

    * * *

    “제목이 <핏빛 와인잔>이라…… 이거 괜찮은 거야? 좀 더 쌈박한 그런 제목 없어?”

    “그게 다른 건 몰라도 제목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답니다.”

    “뭘 그렇게까지. 적당히 타협하면서 여기까지 와 놓고는 무슨.”

    “그게 오연옥 작가님 징크스하고 관련되어 있어서요.”

    “징크스?”

    “네.”

    박현호의 호응에 김 대리는 신이 난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연옥 작가님이 집필하신 드라마의 제목엔 한 가지 법칙이 있답니다.”

    “법칙? 뭔데?”

    “꼭 다섯 글자여야 한답니다.”

    “그게 뭐야?”

    “보십쇼. <가족의 비밀>, <고래 아가씨>, <돌아온 언니>, <평창동 부인>, <왕실의 품격>까지. 전부 다섯 글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네.”

    “오연옥 작가의 작품 중 다섯 글자가 아닌 건 딱 두 작품뿐이랍니다. 당선된 이후 첫 일일 연속극인 <봐도 다시 봐도>와 주말 드라마 <열 손가락>.”

    “두 작품 다 유명하잖아. 나도 기억하고 있는데.”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고 소재가 파격적이라서 꽤 유명했죠. 근데 오연옥 작가 작품치고는 시청률이 생각보다 적게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봐도 다시 봐도>는 당시 시청률이 30퍼센트가 안 나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히트 친 거 아냐?”

    “그 당시 웬만한 일일극은 다 그 정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

    “네. MBS 관계자들에 의하면 <봐도 다시 봐도>가 대본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어서 히트를 칠 거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예상하기로는 40퍼센트는 넘을 줄 알았는데 30퍼센트가 안 넘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도 화제는 됐어. 나도 알 정도니까. 근데 시청률이야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도 작용하잖아. 여름 휴가라든지 벚꽃 필 때도 좀 안 나오지 않아?”

    “그렇죠. 하지만 일일극은 전무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거의 반년은 하거든요. 반년 동안 그렇게 영향을 받기가 흔한 일은 아니죠.”

    “그것도 그렇네.”

    “오연옥 작가님이 장편 말고 단막극도 몇 편 쓰셨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다섯 글자의 제목이었다고 합니다.”

    “단막극으로 시청률 따지기는 그렇지 않아?”

    “네. 단막극은 워낙 시청률이 안 나오니까요. 그래도 단막극 쪽에서는 기록을 세웠다고 하던데요.”

    “그게 다 제목이 다섯 글자라서 그렇다?”

    “그게 아니라면 납득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제목은 절대 양보 못 한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고. 그래서 <핏빛 와인잔>은 무슨 내용인데?”

    기획안이 올라왔지만 읽는 게 귀찮았던 그는 김 대리에게 내용에 대해 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통주를 만드는 여주인공 세현에게 거대 주류 회사 임원이 찾아옵니다. 자신들에게 주조장을 팔라고 말이죠. 전통주 만드는 비법을 알아내 대량 생산을 할 목적이었던 거죠. 하지만 세현은 반대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술맛이 떨어지지. 하여간 대기업 그놈들도 참 문제야. 돈 된다 싶으면 다 달려드니 원. 계속해.”

    그동안 돈도 안 되는 주조장을 운영하느라 빚에 몰려 있던 세현을 주류 회사가 전방위로 압박한다.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와 번번이 대립하는 남자 주인공 범진은 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프랜차이즈 식당에 납품을 해 보는 건 어떠냐 말해 준다.

    사실 범진은 그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대기업의 후계자였던 것. 밑바닥에서부터 배우라는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하고 있다가 세현을 만나게 된 것이었는데.

    “그 남자 도움으로 주조장을 지키겠네.”

    “그렇죠. 그런데 여기엔 비밀이 한 가지 있는데 여주인공이 사실은 주조장 친딸이 아니라는 겁니다. 출생의 비밀이 있는 거죠. 주조장을 팔라고 한 주류 회사 회장님이 사실은 친아버지였던 거죠.”

    “그럼 자기 아버지가 딸한테 주조장을 팔아라 마라 그렇게 싸운다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새어머니와 싸우는 거죠. 이 회장님 부인은 사실 남편에게 숨겨진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답니다. 그러니 만에 하나 그 딸이 나타날 때를 대비해 회사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했던 거죠. 그래서 주조장과 비법이 필요한 거고요.”

    “그런데 하필이면 비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남편의 친딸이다? 재밌네.”

    “네. 사실 생모는 가난한 탓에 재벌가에서 결혼을 반대한 거죠. 그러다 사고를 당해 딸만 남겨 둔 채 죽은 거고요. 지금 키워 준 어머니는 그때 사고 현장에서 도움을 준 사람이었고요.”

    “복잡하구만.”

    “그때 생모가 가지고 있던 목걸이를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여주인공한테 모든 진실을 말해 주죠. 마침 아내가 주조장 문제로 무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주류 회사 회장님이 주조장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갑니다. 물론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여주인공을 만나죠. 그러다 결국 목걸이를 통해 딸을 찾고 여주인공은 새어머니와 겨뤄 주류 회사의 후계자로 성장하는 이야기랍니다.”

    김 대리의 말에 박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는 있네.”

    “그럼요. 오연옥 작가님 작품이니까요.”

    “그래서 제목이 핏빛 와인잔이라고? 그러기엔 이야기가 좀 심심하지 않아? 그리고 전통주라면서 와인은 뜬금없지 않아?”

    “하하. 그렇긴 한데…… 아마 주류 회사에서 와인을 만들겠죠.”

    “제목은 건들지 말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게 하라고 해. 뭐 전통주보다 폼은 더 나니까. 대신에 뭔가 좀 부족한 거 같으니까 조금 더 자극적으로 해 보라고 그래. 재미는 있는 것 같은데 자극적인 뭔가가 부족하단 말이지. 참, 연출은 누가 맡기로 했어?”

    “유니언 소속 PD들을 물색 중에 있습니다.”

    “그래, 그런 건 전문가한테 맡겨야지.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서 과장이 알아서 해. 지원 아끼지 말고.”

    “네, 전무님.”

    “그럼 나가 봐.”

    인사를 한 김 대리가 밖으로 나왔다.

    “김 대린데…….”

    자신을 서 과장이라 부른 박현호 탓에 이야기를 하느라 흥분되었던 그의 기분이 팍 식어 버린 것 같았다.

    처음 서필진이 회사를 나가기 전 자신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그를 보며 김 대리는 일말의 기대감 같은 것이 생겼다. 자신에게 어쩌면 라인이 생길 수 있다는 기대감.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서필진을 대신해 그의 일을 맡게 되었을 때는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이제 자신도 실세의 눈에 들어 그의 오른팔이 돼 출세의 길을 걷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현호는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고 번번이 그를 서 과장이라고 불렀으니. 그나마 처음에는 잘못 부른 것을 인지하고 미안하다며 사과도 했지만 이제는 자각조차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다 알고 있으면서 자기 편할 대로 부르는 거든가.

    어차피 박현호라는 인간이 원래 그런 인간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대로 박현호 옆에 꼭 붙어 그의 오른팔로 살아남는 것만 생각했다. 그는 오늘도 인터넷을 살펴 가며 상사에게 잘 보이는 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김 대리의 야심 따위는 알지 못했던 박현호는 친구로부터 걸려 온 전화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를 버리고 기껏 갔다는 데가 민경우 밑이라 이거지?”

    서필진, 민경우 이 두 놈을 어떻게 해야 속이 시원해질지 고민에 빠졌다.

    * * *

    “갑자기 어쩐 일이야?”

    “서운하게 왜 그러십니까? 우리가 일이 있어야 전화하고 만나는 사이였어요? 전 진짜 형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그렇네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애써 웃었지만 안청모의 얼굴이 전보다 까칠한 게 느껴졌다.

    “일이 많나 봅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

    “넌 어째 갈수록 얼굴이 좋아진다?”

    “이게 다 몸에 좋은 거 챙겨 먹고 있어서 그렇거든요. 젊어서부터 관리를 해야 한다고요.”

    “그래, 천년만년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래서 말인데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건 어때요?”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와 함께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 지금 형님께 스카우트 제의하는 겁니다.”

    경우의 말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 안청모는 눈만 끔뻑였다.

    그 시각, 유니언 스튜디오의 오진원 대표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에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 문을 열자 반가운 얼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긴 어쩐 일이야?”

    “대표님께 긴히 부탁드릴 게 있어서 그렇죠. 잘 지내셨죠?”

    “못 지낼 게 뭐 있어? 황 CP는 영 아닌 것 같아.”

    “들으셨어요?”

    민망한 듯 황성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듣는 귀가 어디 한둘인가? 근데 이분은…..?”

    “제 조카입니다. 지금 MBS PD죠.”

    황성준 옆에 있던 황현석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황현석이라고 합니다.”

    황현석이 바짝 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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