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14화 (114/250)
  • #114. 라이벌 (1)

    <크리미널 리포트>는 다섯 번째 시즌이 되어서야 새 캐릭터를 투입했으니 그 사람이 엘리자베스 역의 사라 웨버였다.

    안정적인 연기력을 갖춘 베테랑 배우로 브라이언을 대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비슷한 캐릭터 설정 탓에 애꿎은 배우만 비교 대상이 됐다.

    물론 그녀의 연기를 향한 열정 덕에 차츰 사람들도 그녀를 인정했으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다만, 언젠가 인터뷰에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캐스팅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에겐 힘든 시간이었다고 훗날 고백한다.

    이럴 때 보면 사전 제작이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중간에 캐릭터 설정을 바꾸고 논란이 커지기 전에 바로잡았을 테니까.

    어쨌든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경우는 생각했다. 그는 서둘러 제임스에게 준 리차드가 출연한 드라마를 보여 줬다.

    카메오로 출연한 <역전의 정수>부터 얼마 전에 종영한 로맨스 드라마까지. 여주인공이 남주인공과 결혼하는 모습을 쓸쓸히 지켜보는 장면에서 제임스는 어쩐지 눈물이 살짝 보인 것도 같았다.

    하여간 이 아저씨 감성은 어쩔 수 없다니까.

    어쨌든 거의 날밤을 새우다시피 드라마들을 본 제임스는 충혈된 눈으로 경우에게 물었다. 자신에게 저 배우를 소개해 줄 수 있느냐고.

    오히려 환영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전화해 보니 준 리차드는 마침 드라마 촬영이 끝나 쉬고 있다고 했다. 안 그래도 그동안 일이 바빠 부모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당장이라도 미국으로 올 준비를 하려는 것 같았다.

    아무튼 이전 생과 달리 준 리차드가 <크리미널 리포트>에 등장할지 말지는 이제 그의 손에 달렸다.

    인기 드라마의 변곡점이 될 수 있는 때에 자신이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경우는 뿌듯했다.

    * * *

    “벌써 가신다니 아쉽네요.”

    “조만간 또 볼 일이 생길 것 같은데요. 아, 인맥 관리 잘해 두세요. 작가든 PD든 방송 관계자든 많이 알면 알수록 좋잖아요.”

    “혹시 미국 드라마도 직접 쓰실 생각입니까?”

    “나중에 크리에이터로 참여한다면 모를까 당장에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현지에 실력 있는 작가들 많잖아요.”

    “어쨌든 계획은 있으신 거군요.”

    “시작은 리메이크가 좋을 것 같아요. 시청자들 반응 좋았던 걸로 작가들 구해서 대본 작업 먼저 해 보는 걸로요. 일단 대본이 있어야 제작을 하든 포기하든 할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 지금부터 준비는 해 두세요. 언제든 시작할 수 있게.”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며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여보세요? 그 현호 밑에 있던 비서 있잖아. 얼마 전에 그만뒀다던. 그래, 그 사람. 근데 민경우랑 같이 있는데? 그것도 미국에서?”

    “박현호한테 말해 봐. 뭐라고 반응하는지. 뭐, 안 봐도 비디오지만. 하하하.”

    예상치 못한 일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다.

    * * *

    스튜디오 글로리의 회의실이 전에 없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테이블 위엔 시놉시스와 대본 대신 유명 맛집의 디저트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스트레스 해소용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위해 가끔 단 것을 먹곤 했으니 예기치 않은 다과 타임을 싫어할 이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방송은 물론 촬영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다잉 메시지>의 마지막회 대본을 끝내고 방송국에 넘긴 구연하와 정상혁은 그동안 자신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준 작가실의 작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소소하게나마 자리를 마련했다.

    함께 일한 스탭들은 드라마가 끝나고 회식이 있을 테지만 그 회식에 다른 작가들이 참석할 수 없는 탓에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스튜디오 글로리의 작가실은 작업실이 따로 없는 작가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소속된 모든 작가들이 방송을 준비하고 있으면 좋겠지만 여건상 그럴 수는 없었다. 잘나가는 작가들도 몇 년에 한 작품씩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프리랜서의 특성상 늘어지기 쉬운 탓에 작가들은 방송이 없어도 일부러 출퇴근까지 하면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관리했다. 언제 시작될지 모를 작품 준비를 위해 매일같이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러니 비록 자기 작품은 아니었다 해도 신인 작가 두 사람이 힘을 합치는 모습을 기특하게 여긴 이들은 막히는 부분이나 대사 처리의 매끄러운 흐름, 때론 멋진 장면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두 작가님들 이제 아주 속 시원하시겠어요. 그동안 우리가 옆에서 지켜봐서 알잖아. 얼마나 머리를 싸맸는지.”

    “맞아요. 저도 드라마 끝나면 아쉬움도 있지만 홀가분하기는 하더라구요.”

    “거기다 첫 드라마였으니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 어디 소감 한번 들어 봅시다!”

    장난기 가득한 작가들 탓에 구연하와 정상혁은 어쩔 줄을 몰랐다.

    “아이, 왜들 이러세요.”

    “뭐 어때요? 우리들끼리만 있는데. 그래도 기분은 좋죠? 드라마 잘됐잖아요.”

    “맞아요. 완전 부러워요. 시청자들이 시즌 2가 꼭 나와야 한다고 이건 미드처럼 시즌제로 가야 한다고 그러잖아요.”

    “아직 종영한 것도 아닌데 이대로 못 보낸다면서 게시판 난리도 아니고.”

    “참, 그거 짤 봤어요? 임 형사 분노 짤 3종 세트.”

    “예? 그게 뭐예요?”

    “임 형사가 가끔 진짜 나쁜 놈 만나면 화내는 거 있잖아요. 그거 모아서 분노 짤 3종 세트라고 그거 인기던데?”

    “그래요?”

    “우와, 완전 부럽다. 지금 이 순간 누가 가장 부럽냐고 하면 눈앞의 이 두 작가님들이 제일 부러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부럽다고 해 놓고선.”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덕분에 드라마 집필 무사히 끝냈네요.”

    “우리가 뭐 한 게 있다고. 그럼 이제 두 분은 다음 프로젝트는 못 하시겠네요.”

    “어쨌든 <다잉 메시지>라는 대표작이 만들어졌으니까요.”

    “다음은 누가 할까요?”

    “그것 때문에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 오고 싶어하는 신인 작가들이 많다고 하던데요?”

    “신인 작가들 너무 많아져서 우리가 설 자리가 없어지면 어쩌죠?”

    “그런 걱정을 왜들 하십니까?”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작가들이 돌아보니 그곳엔 경우가 서 있었다.

    “작가실 소속은 아니어도 저도 엄연히 스튜디오 글로리 소속 작간데 저만 빠뜨리기 있습니까?”

    “민 작가님.”

    “출근하셨어요? 안 하신 줄 알았죠.”

    “방금 출근했어요. 근데 이게 다 뭐예요?”

    “여기 두 작가님들이 한턱 쏘시는 거죠. 작가님도 어서 드세요.”

    “나도 있는데.”

    경우의 뒤를 따라 등장한 이의 모습에 다들 놀랐다. 그 사람은 스타 작가로 유명한 송지현이었으니 계약을 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마치 연예인을 만난 여고생처럼 다들 눈을 빛내고 있었다.

    “송지현 작가님이 여긴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좀 서운하다. 저도 여기 소속 작간데. 작가가 제작사 올 수도 있는 거죠.”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근데 맛있어 보이네. 나도 먹어도 돼요?”

    “그럼요.”

    “여기 작가님들이 한턱 쏘는구나. 어쨌든 축하해요. 얼굴 보니까 홀가분은 한데 아직 방송이 덜 끝나서 반만 홀가분한 모습이야, 아주. 어쨌든 나도 드라마 잘 봤어요. 아주 재밌던데요.”

    확실히 경력이 오래되다 보니 송지현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상황 파악에 능했다.

    시청률 1위, 스타 작가라 불리웠던 그녀인 만큼 사람들은 그녀가 꽤나 도도하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기보다 털털하고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 작가실의 작가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작가실에 자리 잡는 건데.”

    “에이,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세요. 글 쓸 때 엄청 예민하셔서 본인 키보드 소리도 싫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거의 거의가 작가님 팬이잖아요. 작가님 드라마 안 좋아하는 작가들 없을걸요.”

    “맞아요. 작가님, 데뷔 이전부터 데뷔 이후까지 인터뷰란 인터뷰는 다 찾아보고 작가님 했다는 습작법도 따라 하고 그랬다고요.”

    “뭔가 분위기가 사생팬들 같습니다만.”

    경우의 한마디에 다들 빵 터졌다.

    “설마 민 작가님 지금 질투하시는 거예요?”

    “네?”

    “민 작가님도 저희 다 좋아하죠. 근데 솔직히 민 작가님은 어나더 레벨이잖아요. 따라 하고 싶어도 따라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요.”

    “맞아요. 솔직히 실력이 받쳐 줘서 뒷말이 없는 거지 인맥으로 입봉하기가 어디 그렇게 쉽나요? 그것도 제작사 PD라면 모를까 방송국 드라마 국장을 우리가 어떻게 아냐고요?”

    “따라 하고 싶어도 못 따라 하죠, 그건.”

    “이렇게 되고 보니까 맨 주먹으로 일어난 불굴의 의지인 같네, 내가.”

    “당연하죠.”

    원래 남 험담해야 쉽게 친해지는 법. 눈앞에 경우라는 먹잇감을 두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경우를 제외한 작가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참. 일부러 들은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들은 건데 아무래도 신인 작가만 너무 기용하는 건 우리도 좀 부담인 것 같아서요. 다음엔 미니 시리즈 1편 이하 작가들로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뭐야, 그래도 전 안 되잖아요.”

    미니 시리즈 2편이 방송된 김해영이 울상을 지었다.

    “김 작가님이 그러시는 건 좀 오바죠. 혼자서도 능력이 충분하신 분이.”

    “그럼 저희도 다시 지원할 수 있는 거예요?”

    “이봐, 구 작가.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프로젝트 경험이 있는 분은 아무래도 제하는 게 좋겠죠?”

    경우의 명쾌한 답변에 구연하의 얼굴이 금세 흐려졌다.

    어쨌든 궁금했던 이야기도 이참에 해결하고 한바탕 즐거운 시간이 끝나자 경우는 송지현을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그냥 오신 건 아닐 테고. 차기작 때문에 오신 거예요?”

    “하여간 귀신을 속이지. 맞아요. 이제 슬슬 일이 하고 싶어서요.”

    “지금부터 준비 시작해도 빨라야 연말에나 방송되겠는데요? 시놉시스는 다 끝내신 겁니까?”

    “대충? 더 다듬기는 해야겠지만 그거야 손 보면 될 일이죠.”

    “아마 작가님이 하시겠다고 하면 MBS나 SBC, KBC까지 두 팔 벌려 환영할 겁니다. 작가님은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경우의 말에 송지현이 약간 뜸을 들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 그래서 말인데, 지상파 말고 케이블은 안 될까요?”

    “케이블이요?”

    “네.”

    “아니, 왜요?”

    “스스로에게 자극이 되었으면 해서요. 지상파는 아무리 망해도 애국가 시청률은 나오잖아요. 근데 케이블은 그 정도면 대박이라면서요? 그래서 한번 해 보고 싶어요. 제가 톱배우보다 더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떠들고는 있지만 그게 사실인지 그냥 하는 소린지 모험을 해 보고 싶거든요.”

    정규 방송이 끝나고 그날 하루 방송을 마무리할 때면 나오는 애국가. 이 애국가의 시청률이 평균 4~5퍼센트 정도였다. 물론 그것도 TV말곤 다른 볼 게 없던 시절의 이야기였으니.

    나중에야 케이블 TV의 자체 제작 콘텐츠가 늘어나고 TV말고도 즐길 수 있는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지상파 프로그램과 케이블의 시청률이 엇비슷해진 수준까지 왔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현재 대부분의 케이블 방송은 지상파의 방송을 재방송하는 수준, 평균 시청률은 1~2퍼센트. 그러니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에서 애국가 시청률이 나왔다고 하면 소위 대박이라고 불릴 만했다.

    이전 생에 그녀의 드라마도 케이블에서 방송되기는 했으나 훨씬 나중의 일이었으니 지금 케이블행을 택하는 건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 하는 수준.

    그런 곳으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지현 같은 스타 작가가 자진해서 가겠다는 건 사건이었다. 송지현이 업계 탑인 건 정상의 자리에 있어도 끝을 모르는 도전 정신 때문인지도 몰랐다.

    일반적인 제작사 대표였다면 그녀를 말렸겠지만 경우 역시 일반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는 사람이었으니.

    “좋습니다. 그럼 제가 그쪽과 접촉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내 뜻 알아줘서.”

    ”대신 저도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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