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13화 (113/250)
  • #113. 예상치 못한 수확 (3)

    배드 보이 프로덕션의 회의실.

    지난번 경우의 말 이후 며칠 만에 <크리미널 리포트>의 작가진들이 모였다.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경우에겐 너무나 유명한 이들이었다.

    <크리미널 리포트>에 계속 남아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른 대박 드라마를 쓰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런 이들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경우는 어쩐지 신기했다.

    하지만 회의를 지켜보는 게 어쩐지 답답했다. 당연히 중심을 잡아야 할 제임스가 그러지 못하고 있는 탓이었다.

    어쨌든 중요 인물인 데니를 어떻게 할지 고심하느라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자 다들 한숨만 쉴 뿐이었다.

    이전 생을 돌이켜 보면 네 번째 시즌에서 데니는 첫 장면에 등장한 이후 사라진다.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애매하게 처리 된 이후 계속 다른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 게 문제였다.

    물론 제임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계속해서 그를 언급해 사람들이 그를 잊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그가 다음 시즌이라도 돌아오길 바라는 거였겠지만 그건 드라마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기, 미안한데, 보고 있자니 너무 답답해서 말이야. 나도 한마디 할 수 있을까?”

    애초 경우의 생각은 회의를 지켜보는 것으로 끝내려 했지만 이대로 가다 간 산으로 갈 것 같아 도저히 참지 못하고 결국 끼어들고 말았다. 다들 약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으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는 브라이언이 원했듯이 하차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범인이 쏜 총에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든가, 아니면 교통사고를 당해 심각하게 다쳤다는 걸로 하면 되잖아. 그럼 나중에라도 브라이언이 마음을 바꿔 돌아오겠다고 하면 회복했다는 식으로 다시 등장할 수도 있는 거고.”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하지만 데니는 이 드라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이라고! 결국 그를 제외해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을 뿐이야.”

    “그래도 결정을 빨리 내려야 앞으로 진행이 되지. 이왕이면 회복 후 다시 나올 수 있다는 여지를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물론 드라마 속에서 계속 언급하는 것도 삼가면 좋겠어. 괜한 기대감을 아예 차단하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새 캐릭터로 데니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어때? 그렇게 많이들 하잖아. 이왕이면 완전 새로운 캐릭터로!”

    “그럼 데니와 정반대 성향의 인물을 말하는 거야?”

    “어, 아예 데니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데니는 밝고 실없는 농담도 잘하고 팀이 지치고 힘들 때 기운을 북돋워 주는 역할이잖아. 그러니까 새 캐릭터는 반항아적인 이미지에 트러블 메이커로 가도 괜찮을 것 같아. 이건 시청자 입장에서 내 의견이니까 결론은 당신들이 내야겠지만.”

    어쨌든 이전 생에 그도 좋아하던 드라마였으니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경우는 커뮤니티에서 나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해 들려줬다. 갑작스러운 데니의 하차에 혼란스러웠던 건 작가진들 역시 마찬가지.

    경우의 이야기를 온전히 수긍하는 건 아니었지만 생각해 볼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확실히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물꼬를 살짝만 터 주자 이후 아이디어가 술술 나왔다. 그제야 회의를 지켜보는 경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근데 경우, 영어는 어디서 배웠어? 미국에서 살았던 거야?”

    “아니, 여행 아니면 줄곧 한국에서만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다 영어를 잘해? 완전 수준급이야.”

    케빈의 말에 경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이런 이야기, 은근히 사람 기분을 좋게 했다.

    지난번 미국에 왔을 때도 느낀 거였지만 민경우의 영어 실력은 상당히 좋았다.

    ‘역시 재벌집 아들은 다르구만.’

    어릴 때부터 가정교사는 물론 어학연수까지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해야 해 공부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를 정도로 영어를 배우기까지는 힘든 일이었지만 어쨌든 민경우가 고생을 한 덕분에 지금 경우는 어려움 없이 원어민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만큼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 * *

    회의가 끝이 나자 에너지 드링크를 딴 경우가 제임스에게 내밀었다.

    술이 아니라 살짝 아쉬워하는 표정이긴 했으나 제임스는 경우가 내민 드링크를 마시며 지친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한동안 방향을 잡지 못했을 거야.”

    “뭐, 도움이 되었다니 내 입장에선 다행이네.”

    “미국엔 얼마나 있다가 갈거야? 듣기론 많이 바쁜 것 같던데.”

    “아, 내가 아니라 우리 서 팀장이 바쁘지.”

    “그 서필진이라는 그 사람? 경우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다 경우 같은가 봐.”

    “뭐가?”

    “아주 정확하다고 할까? 처음 찾아왔을 때도 그랬지만 아무튼 깐깐해.”

    “우리 서 팀장이야 일을 잘하지. 지금도 아마 웹플릭스랑 협상하고 있을 거야. 내가 싸게 먹혀도 괜찮으니 일단 입점하라고 했는데 분명 내 생각보다는 비싸게 팔고 오겠다 하겠지.”

    “웹플릭스? 거기에 너네 드라마가 들어간다고?”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거의 그렇게 되지 않겠어? 근데 왜? 설마 웹플릭스를 안 좋게 생각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니야. 우리 드라마도 제의가 들어오긴 했어.”

    “아, 미국은 판권이 제작사에 있으니까 너만 오케이 하면 되겠구나.”

    “그래. 솔직히 고민이 되기는 해.”

    “뭘 고민해. 이왕이면 들어가. 될 수 있는 대로 비싸게 받고 말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 그보다 말이야.”

    “응.”

    “솔직히 궁금했어. 네가 드라마를 쓴다는 걸 들었으니 네가 만든 드라마는 어떤지 말이야. 아, 사실대로 말하면 동양권 드라마는 본 적이 없어. 기껏 해야 영국이나 유럽의 드라마, 영화를 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동양권은 손대기가 그렇더군.”

    “문화권이 아예 다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지금이야 일로 생각하니 닥치는 대로 보는 편이지만.”

    “역시 일이 되다 보면 즐기는 게 쉽진 않아.”

    “아무래도. 아, 그럼 한번 보는 게 어때? 일 아니고 그냥 편한 마음으로. 어차피 동양권 드라마는 안 봤다고 했으니 이번 기회에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 한국 드라마, 아시아에서는 꽤 괜찮은 축에 속한다고.”

    “그래? 좋아. 그럼 한번 보자고.”

    경우는 가지고 온 노트북을 사무실에 있는 TV에 연결했다. 능숙하게 기계를 만지는 경우의 모습에 제임스는 감탄했다.

    “이런 것도 할 줄 안단 말이야?”

    “이 정도는 기본이지 뭘 그래?”

    “나는 기계치라서 손만 대도 망가지는 게 대부분이라.”

    “비싼 거 맡기면 안 되겠군. 그럼 뭐부터 볼래? 액션, 스릴러, 범죄, 로맨스까지 장르는 다양해.”

    “이왕이면 경우가 쓴 걸로.”

    <셀룰러 메모리>는 첫 작이기는 하지만 그땐 스튜디오 글로리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판권은 MBS에 있었다. 지금 판권을 가져오려고 협상하는 중이었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했다면 모를까 방송국에서 쉽게 내줄 리 없어 김기영 변호사 또한 애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두 번째 작품 역시 MBS에서 만든 <부녀자, 남편 살인 사건의 전말>이었다. 이 역시 판권은 MBS에 있었으나 단편이라 제임스가 보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아 경우는 그걸 보여 주기로 했다. 다만 번역이 미리 되어 있지 않다는 단점으로 경우가 보는 내내 옆에서 설명을 해 줘야 했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이사를 온 뒤 첫사랑과 제외한 정혜는 현실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첫사랑과 은밀한 만남을 이어 오고 그러던 차에 남편이 사망한다.

    자살처럼 꾸며졌지만 살인이라 판단한 경찰은 제일 먼저 아내 정혜를 의심하고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그녀는 스스로 죄를 인정하지만 거기엔 비밀이 숨겨 있다는 게 주요 줄거리였다.

    집중해서 보던 제임스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야 경우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저 여자는 범인이 아니라는 거지? 그럼 우리가 본 건 다 뭔데?”

    다 보고 나서도 모르겠다는 듯 울분을 터뜨리는 제임스의 모습에 경우는 그만 웃고 말았다. 원래 그렇게 혼란을 주려고 의도한 것이었는데 다행히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 사람에게도 먹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드라마에 대해 설명을 해 주자 제임스가 물었다.

    “한국 드라마는 다 저렇게 심오해?”

    “아니, 한국 드라마의 대다수가 멜로나 로맨스라고 생각하면 돼. 텔레노벨라에 버금가는 복수나 치정도 많긴 하지만 히트를 쳤다고 볼 수 있는 드라마는 로맨스가 많아. 앞으론 장르가 더 다양해질 예정이지만.”

    “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한국은 사랑의 나라라고.”

    “그 정도까지는. 어쨌든 재미있었어?”

    “어, 확실히 너도 정상은 아냐.”

    “칭찬 고마워.”

    “이왕 시작한 거 로맨스도 보고 싶은데. 사랑의 나라에선 로맨스를 어떻게 그리는지 궁금해.”

    “좋지.”

    생각해 보니 경우의 성향 때문이었는지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한 드라마 중 로맨스는 김해영 작가의 작품이 전부였다. 아직 종영하지 않은 <얼어 죽을 로맨스>보다는 종영한 <곰과 여우 사이>가 더 나을 것 같아 경우는 그 작품을 보여줬다.

    이번엔 번역을 해 온 거라 두 사람 모두 집중해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쪽이 더 나한테 맞는 거 같아.”

    “재미있었어? 솔직히 좀 걱정했는데.”

    “뭐가?”

    “아무래도 그렇잖아. 미국이나 유럽은 결혼이 당사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하니까 다른 가족들과의 갈등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부모와 사이가 안 좋아지는 경우도 있어.”

    “시집살이는 어느 나라나 불문율이라는 건가?”

    “어?”

    “아니야, 아무것도. 어쨌든 재미있게 봤다니 다행이야. 솔직히 제임스가 쓴 작품들만 봐도 이쪽은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주로 심각한 게 많았잖아.”

    “그렇긴 한데 그거야 일이고 오히려 즐기는 쪽은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아예 다른 장르를 보게 되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데 도움이 되거든.”

    “그래?”

    “같은 장르만 보다 보면 머릿속에서 한계를 정하는 것 같아. 여기까지만 생각하라고. 그래서 보는 건 다양하게 보는 편이야.”

    “사람 크게 다르지 않군.”

    이해한다는 경우의 태도에 제임스도 웃어 버렸다.

    어쨌든 여러편의 드라마를 몰아보느라 시간이 꽤 흘렀다. 정리를 하려는데 쌓여 있던 영상 파일을 본 제임스가 물었다.

    “근데 이건 뭐야?”

    여러 파일 중 유독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으니.

    “아, 이건 드라마는 아니고 친구가 광고 편집본을 좀 봐 달라고 해서 말이야.”

    제임스가 호기심을 보인 것은 준 리차드의 광고 촬영 영상이었다.

    한성음료의 새로운 광고가 나왔을 당시 안동성이 한번 봐 달라고 보내 준 거였으니. 어쨌든 준 리차드를 소개해 준 사람이 경우였고 잘나가는 드라마 작가에다 제작사 대표인 그의 의견을 듣는 게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 보내 준 것이었다.

    최근엔 메이킹 영상을 푸는 것도 홍보에 도움이 되었다. 해서 메이킹을 감각적으로 편집해 홍보물로 만드는 추세였으니. 그때 받은 파일을 노트북에 그대로 놔둔 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걸 제임스가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별건 아니고 광고 메이킹 영상이야. 그래도 한번 보겠어?”

    “경우가 괜찮다면야.”

    그렇게 재생된 영상.

    제임스의 미간에 주름이 지고 있었다.

    “다시.”

    “다시.”

    “한 번 더.”

    준 리차드에게 관심을 가지는 그의 모습에 경우는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여러 차례 반복해 본 제임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누구야? 한국 사람이야? 한국 사람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미국 사람이야. 정확히 말하면 한국, 미국 혼혈이고. 이름은 준 리차드. 3년 전까지만 해도 브로드웨이에서 배우로 활동했지. 우연히 나랑 연을 맺어서 지금은 한국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만 활동할 것 같지는 않아.”

    경우의 설명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해 듣고 있었다.

    ‘이건 전혀 예상 못 한 일이었는데?’

    “배우로 활동했으면 드라마 출연이라도 했어? 혹시 저 사람이 출연한 드라마 볼 수 있을까?”

    “물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