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12화 (112/250)
  • #112. 예상치 못한 수확 (2)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경우는 묘하게 데자뷰를 느꼈다. 눈이 내리던 3년 전의 그날이 떠올랐던 것이다.

    테이블 위에 어질러진 술병들이 눈에 띄었고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던 제임스의 모습이 꽤나 초췌해 보였다.

    달라진 건 혼자뿐이었던 3년 전과 달리 지금은 동료들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

    이미 서필진과 안면이 있던 그들은 처음 보는 경우가 누군지 묻지도 않은 채 자연스럽게 술에 취한 제임스를 깨우고 있었다.

    “이봐, 제임스. 좀 일어나 봐. 한국에서 중요한 손님이 오셨어.”

    하지만 술기운 탓이었는지 꿈틀대던 제임스는 자세를 살짝 바꾸고는 다시 잠들고 말았다. 경우가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그의 동료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맞은편 소파에 앉은 경우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면 술 마시는 버릇부터 고쳐야 할 것 같은데. 알코올 중독자도 아니고 뭐야, 꼴사납게.”

    낯선 목소리 탓이었는지 제임스가 힘겹게 눈을 떴다. 눈앞에 앉아 있는 경우를 확인한 제임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비볐다. 그러고는 진짜 경우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경우!”

    마치 신이라도 만난 듯 경우를 반가워하는 제임스는 일어나서는 경우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그를 끌어안았다.

    “경우,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나? 정말이지, 너는 나의 천사야, 경우. 바닥으로 떨어진 날 구원해 준 것처럼 이번에도 부디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줘. 제발 부탁이야.”

    진한 술 냄새에 횡설수설한 그의 모습에 경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됐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제대로 이야기 좀 해 주겠어? 듣긴 했지만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

    “아, 그렇지. 너무 반가워서 그만. 그나저나 설마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말이라고.”

    “오, 경우! 정말 고마워. 자네라면 뭐든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브라이언의 딸이 죽었다는 게 사실이야?”

    “그래, 세상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을 케이트가 세상을 떠났어. 그 사랑스러운 아이가 오, 지저스! 이럴 순 없어!”

    괴로워하던 제임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으려는 순간 경우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 제임스. 이런 건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아.”

    안 되겠느냐는 눈빛에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결국 제임스가 술병을 내려놓았다.

    “좋아. 이제 술은 안 마실게. 그게 경우, 네가 바란다면.”

    “내가 아니라 널 위한 거야, 제임스.”

    경우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술은 이제 집어치우지.”

    “잘 생각했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래, 아예 처음부터 하는 게 좋겠어. 브라이언하고는 15년은 됐을 거야. 내가 처음 방송가에 입문했을 때 그 친구도 막 데뷔한 신인 배우였거든. 둘 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오랜 시간을 꿈꿔 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으니까.”

    그러다 조금씩 유명세를 타고 성장해 나가면서 둘은 절친한 사이가 된다.

    브라이언이 결혼한 이듬해 딸이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케이트였다.

    “세상에 그렇게 작고 천사 같은 아이는 세상에 없었을 거야.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어. 브라이언을 닮아 이 아이도 배우가 될 게 분명했다고. 그래서 난 진작부터 그 아이를 눈여겨 보고 있었지. 그런데 그만 불행이 찾아온 거야.”

    브라이언의 딸 케이트가 발병한 건 그녀의 나이 겨우 열 살 때였다.

    “그냥…… 어릴 때부터 몸이 좀 약한 것뿐이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큰 병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지. 그 이후부터 지옥이 시작됐어. 항암 치료를 시작했고 어떻게든 버텨 내려고 애썼어. 케이트도 우리 모두도. 문병을 갈 때마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 주는데. 오, 지저스. 왜 신은 그렇게 연약한 아이에게 그런 고통을 주시는 건지…….”

    브라이언의 연기가 바뀐 건 그때부터였다. 잘생긴 외모에 안정적인 연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니 주로 멜로 역을 소화하던 그였다. 하지만 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코믹한 역할을 일부러 골라 하기 시작했다.

    그건 모두 딸을 위한 것이었다.

    딸이 TV에 나오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도록, 그래서 고통을 잊을 수 있길 간절히 바라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해맑게 웃던 케이트는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일로 브라이언은 상심에 빠졌어. 나도 이렇게 슬픈데 그 마음이 오죽하겠어?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르기 바랐지만 어쩔 수 없다는군. 더 이상 코믹한 연기를 할 수 없겠대. 하지만 경우도 알다시피 데니가 빠진 <크리미널 리포트>는 상상도 할 수 없다고!”

    “그렇다고 슬픔에 빠진 그에게 출연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긴 하지. 하지만…….”

    사전 제작이라 현재 방송되고 있는 부분은 아무 문제 없다지만 다음 시즌을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니 언제까지고 이렇게 코 빠뜨리며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 매정한 말 같겠지만 이러고 있는 게 브라이언이나 그 딸에게 하나도 도움이 안 돼.”

    “나도 알아, 하지만 케이트가 지금이라도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이 사무실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그 아이가 꽃다발을 들고 브라이언과 함께 찾아왔었거든.”

    지금이라도 케이트가 들어올 것처럼 제임스는 출입구를 보며 회상에 잠겼다.

    그런 제임스를 보며 경우는 이전 생의 일을 떠올렸다.

    브라이언 애들러가 다시 복귀하는 데까지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으니 여기서 아무리 제임스가 울고 짜고 해 봐야 브라이언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이 일은 <크리미널 리포트> 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브라이언이 하차 한 후 시청률이 흔들릴 정도로 이 드라마 속 브라이언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컸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그러니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시청률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대책을 세워 다음 시즌의 대본을 탄탄히 하는 게 필요했다.

    “매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대로는 안 돼. 당신이 아무리 매달려도 브라이언은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에게도 마음을 추스릴 시간을 줘야 할 것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브라이언을 생각한다면 그의 마음에 부담을 줘선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럼 내가 뭘 해야 하지?”

    “내일부터 다시 작가진들 모으고 일 시작해. 이건 친구로서의 부탁이자 투자자로서의 요구야.”

    생각보다 단호한 경우의 태도에 제임스의 얼굴은 약간 멍해 있었다.

    나오는 길에 처음 제임스를 깨웠던 그의 동료와 다시 마주쳤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군요. 민경우라고 합니다.”

    “케빈 윌리엄스라고 합니다.”

    “아, 작가진 중 한 명이시군요.”

    “네, 저 멍청이한테 들은 동양인 천사가 바로 당신이죠? 어쨌든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볼 땐 다음 시즌 대본 준비를 지금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안 그렇습니까?”

    “당연하죠.”

    “이왕이면 바로 시작할 수 있었으면 하는데.”

    “부르면 내일이라도 바로 올 겁니다. 예전엔 일이 없어서 이일 저일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지만 드라마 잘되고 나서부턴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사실 지금부터 회의하고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보시다시피 저 멍청이가 저러고 있으니 문제죠. 작가들은 일 시작하는 데 아무 문제 없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회의하는 모습 살짝 지켜볼 수 있을까요?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한국에서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거든요. 미국의 시스템은 어떤지 이번 기회에 배우고 싶어서요. 물론 여러분들껜 방해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물론이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임스의 친구, 아니 우리들의 천사신데 오세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케빈과 악수를 나눈 경우는 서필진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자, 이번엔 서 팀장님 사무실로 한번 가 볼까요?”

    “미국에서 곧장 오셔서 너무 강행군 아닌가요? 쉬셔도 될 것 같은데요?”

    “비행기에서 너무 잤더니 잠도 안 올 것 같아서요.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 미국 지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게 더 궁금합니다만.”

    “하여간 작가님도 워커 홀릭이세요. 뭐 좋습니다. 가시죠.”

    그렇게 서필진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제임스의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으니. 건물 자체가 오래돼서 낡긴 했지만 미국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경우는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사무실을 둘러보던 경우는 빈 사무실을 홀로 지키고 있는 중년 여직원인 카밀라 로렌과도 인사를 나눴다. 한국으로 치면 경리쯤 되는 사람이었으니 서필진이 외근을 나가는 사이 전화를 받을 뿐 아니라 사무실이 잘 돌아가도록 잡다한 일을 맡고 있었다.

    “사무실이 아직 휑하죠?”

    “그거야 모셔 온 제가 드릴 말씀이죠. 적어도 사무실은 갖춰 놓고 모셔 왔어야 했는데 일일이 이런 일까지 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고생 많으셨겠어요.”

    “고생이랄 게 뭐 있나요. 어차피 본사는 한국에 있고 저만 미국에 남아서 일하는 건데 이왕이면 일할 제가 편한 게 더 낫죠. 앞으로 더 커질 건데요, 뭐.”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기합이 팍팍 들어가네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한 드라마가 제법 여러 편 됩니다. 그래서 그 드라마들 웹플릭스에 진출했으면 하는데요.”

    “웹플릭스요? 그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 말씀하시는 거죠? 그거 작가님이 고안해 내신 ‘올웨이즈’랑 비슷하던데. 혹시 웹플릭스를 보고 떠올리신 건?”

    왜 아니겠는가?

    1997년 비디오와 DVD를 대여해 주던 이 회사는 2007년 동영상 스트리밍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훗날 50개국 2억 명 이상이 가입한 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니. 그런 공룡 기업을 벤치마킹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 어리석은 일이었다.

    경우는 혹시나 웹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했을 시 ‘올웨이즈’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이미 생각해 두고 있었다.

    웹플릭스에 투자까지 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럴 시기는 이미 지났으니 아쉬움만 삼킬 수밖에.

    “작년부터 해외 시장에 진출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는 건 그쪽에 입점만 해도 전 세계 시청자들을 끌어올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뭐, 저쪽에서 먼저 찾아와 제안해 줬으면 좋겠지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지 별수 있나요.”

    “작가님은 웹플릭스가 해외에서도 성공할 거라 확신하십니까?”

    “일정액을 내면 광고 없이 보고 싶은 콘텐츠를 실컷 볼 수 있어요. 케이블 방송을 신청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힐 텐데 당연히 매력적으로 느낄 겁니다. 문제는 콘텐츠를 얼마나 보유하느냐죠. 그러니 우리 제안 거절하진 않을 겁니다.”

    “근데 방송국과는 이야기가 끝난 겁니까? 한국은 미국과 달리 판권을 방송사가 갖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그 점은 걱정 마세요. 이미 드라마 계약을 할 때부터 확실히 못 박았으니까요.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한 드라마 판권은 모두 우리한테 있습니다. 뭐 돈 더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서필진은 그가 이미 해외 진출까지 염두에 두고 판권까지 보유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자신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근데 미국 사람들 자막 같은 거 보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괜찮을까요?”

    “미국 시청자들을 다 사로잡자, 이게 목표는 아닙니다.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서 만든 드라마가 생각보다 괜찮으니까 한번 보시라 이 정도 수준이죠.”

    “하긴 시즌제를 하다 보면 흥행은 보증되지만 갈수록 흥미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니까요. 새로운 걸 찾는 시청자들의 입맛에 우리 드라마가 신선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아,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말씀 안 드렸네요. 각 드라마 1화씩 번역해 왔습니다. 우리도 미드 수입하다 보니 번역이 중요한 문제더라구요. 팔려면 샘플이 좋아야 하니까요.”

    “번역은 어떻게 하셨는데요? 올웨이즈 번역가들이 했나요?”

    “아니요. 그분들 중엔 미국 근처에도 안 가 본 사람이 태반인데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미국 유학생으로 구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미국 문화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좋을 것 같아서요.”

    확실히 번역이 그 문화권에 맞게 되어 있는 게 여러모로 유리했으니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경우의 모습에 서필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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