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10화 (110/250)
  • #110. 피에타 (6)

    SBC의 대회의실.

    캐스팅이 끝난 <다잉 메시지>의 첫 번째 대본 리딩이 있는 날이었다.

    주인공을 맡은 박철민을 비롯해 <셀룰러 메모리>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줬던 김예진과 도은철이 합류했다.

    오랜만에 만난 김예진과 도은철은 물론, 과거 드라마에서 서로 만난 적 있는 박철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러다 너덜해진 대본을 훑어보던 도은철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난 왜 글로리랑 같이 일만 하면 악역만 맡는 지 몰라. 이번엔 또 얼마나 욕을 먹으련지.”

    “그런 거치고는 좀 즐기시는 것 같은데요?”

    “즐기기는 무슨. 내가 언제?”

    “제안 받아들인 것만 해도 그렇죠. 정 마음에 안 들었으면 거절하셨으면 되잖아요.”

    “사람이 또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할 수 있어? 배우는 어떤 역할이든 가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참, 저 선배님 지난번 드라마 아주 잘 봤습니다. 코믹한 역도 찰떡이시던데요? 솔직히 선배님은 꽃중년이시라 그런 역은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진짜 배꼽 잡고 웃었습니다.”

    “내가 원래 연기를 좀 잘했어야지. 이제야 나의 진가들을 알아보는 거 아니겠어.”

    전보다 훨씬 밝아진 도은철의 모습에 분위기가 더욱 좋았다. 예전 같으면 무게 잡고 있었을 그가 배우들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실없는 농담을 한다든지 어려워하는 후배에게도 먼저 다가갔다.

    어쨌든 이번 <다잉 메시지>에서는 비밀을 품고 있는 한 남자를 쫓는 정부 관계자로 등장해 악역을 펼칠 예정이었다.

    지난 <역전의 정수> 연출을 맡은 최무성 PD가 다시 연출을 맡기로 한 가운데 대본 리딩 시간이 임박하자 최무성은 물론 대본 집필을 맡은 구연하, 정상혁이 대회의실에 등장했다.

    그들의 등장 모습을 보며 도은철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 민 작가님은 안 오시나?”

    “직접 집필한 게 아니니까 안 오시겠죠. 왜요? 민 작가님 기다리셨어요?”

    “아니, 내가 왜?”

    “아, 혹시나 오실까 봐 걱정하셨구나.”

    “내가 언제.”

    “민 작가님을 왜요? 혹시 싫어하세요?”

    “선배님 모르셨구나. 도 선배님 천적이 민 작가님이잖아요.”

    “예?”

    “천적은 무슨.”

    “왜요. 민 작가님 앞에 서면 긴장하시잖아요.”

    “그런 적 없어.”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에 김예진이 웃었다. 이쯤 되니 박철민은 민 작가가 아닌 김예진이 도은철의 천적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한쪽에선 TV에서만 보던 유명 배우들을 실제로 만나게 된 구연하가 긴장하고 있었다. 신인 배우들도 있었지만 자신이 글을 쓴 시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연기 생활을 해 온 배우들이 자신이 쓴 대본대로 연기한다는 사실에 어쩐지 긴장이 됐다.

    설정에 오류는 없었는지,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어색함은 없었는지, 이게 말이 되는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작품에 당당한지……. 여러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런 구연하를 눈치챈 정상혁이 조용히 물었다.

    “구 작가, 긴장돼요?”

    “조금요.”

    “차라리 지난번처럼 입고 오지 그랬어요. 여자들은 꾸미면 자신감 생긴다고 하던데.”

    “그렇긴 한데요. 누가 그러더라구요. 변하기 위해 억지로 노력할 필요 없다고. 고마워요. 덕분에 긴장 조금 풀렸어요.”

    “다행이네요.”

    구연하가 떨지 않고 수많은 배우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자 오빠처럼 정상혁이 대견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배우들까지 모두 인사가 끝이 나자 대본 리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오후 6시 30분, 관람객이 모두 빠져나간 예당 미술관 특별 전시실에 한 남자가 홀로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바로 경우였다. 경우는 예신에게 약속한 대로 어머니 윤정숙을 만나기 위해 미술관을 찾았다.

    조도를 낮춘 전시실에 이렇게 홀로 있으려니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 속 여자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히스패닉, 스트립 쇼걸, 펑크족, 여피 등등. 분위기와 차림새는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작품 속 여성은 모두 동일한 인물이었다. 경우는 자화상Ⅰ, Ⅱ, Ⅲ, Ⅳ, Ⅴ로 표현된 작품 제목을 보고 그들 모두 동일한 사람, 작품을 그린 화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가 보기엔 그 그림들 어때? 뉴욕에서 주목 받고 있는 신인 작가 작품이야.”

    어느새 전시실에 온 윤정숙이 작품 감상에 집중하고 있던 아들에게 물었다.

    “분명 다른 것 같은데 또 한편으로는 비슷한 느낌도 들어요. 같은 사람이란 걸 알아서 그런 걸까요?”

    “자화상의 부제가 바로 정체성이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난 작가가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 동화되었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옷차림이나 화장으로 외적인 모습이 조금씩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

    “아, 심경의 변화가 생긴 여자들이 머리를 자르는 것처럼요? 머리 자른다고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게 그렇게 되나? 어쨌든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으면서 변하기도 하고 다른 생각을 받아들여서 이전과는 달라질 수도 있고.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던 그 모든 게 나라고 했으니 네 말도 틀린 건 아냐.”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네요.”

    “원래 심오한 척하는 게 현대 미술의 허상이야.”

    “어머니께서 그런 말씀하실 줄은 몰랐어요.”

    “예술이라는 거 자체가 이해하기 나름이야. 정답이라는 건 없거든. 인생처럼.”

    그러자 경우가 어머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머니는요?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에요?”

    “갑자기 나?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튀어?”

    “어머니도 처음부터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는 아니었잖아요. 어릴 때 하고 싶었던 거라든가 그런 게 없나 궁금했을 뿐이에요.”

    경우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던 윤정숙이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흥, 왜? 네 아버지가 시키던? 정현이를 후계자 만들려는데 내가 걸림돌이 되니까 나를 설득하라고? 그래서 갑자기 되지도 않는 꿈 이야기 꺼내는 거야? 왜? 정현이가 후계자가 되는 게 네 아버지 평생의 꿈이래니?”

    “갑자기 아버지 얘기는 왜 하세요? 전 어머니에 대해 묻고 있잖아요.”

    “얼마 전에 네 아버지와 단둘이 이야기 나눈 거 알고 있어. 네 아버지가 나를 계속 경계하더니 결국 너까지 불러낸 거겠지.”

    “아버지는 그런 말씀 안 하셨어요. 그냥…… 어머니가 안됐다고 미안해하셨을 뿐이에요.”

    “그래, 그런 식으로 너한테 동정심을 얻어서 너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야.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돕겠다고 했니? 됐다. 들을 필요도 없어. 나를 설득하려 하지 마.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정현이가 후계자가 되는 건 막을 테니까.”

    돌아서는 윤정숙의 뒷모습을 향해 경우가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어머니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랑 아주 많이 닮으셨어요.”

    그 말에 윤정숙이 우뚝 멈췄다.

    “아버지가 그러시던걸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외할아버지일 거라고. 근데 그거 아세요?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닮아 간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어머니가 구연하 작가 만났다는 거 구 작가한테 들었습니다. 어떻게 저희 작가한테 그러실 수가 있으세요? 제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아세요?”

    “부끄러워? 기껏 엄마한테 한다는 소리가 그거밖에 안 되니?”

    “제가 원하지 않는 걸 강요하시잖아요!”

    “그깟 드라마 작가보다 새명의 주인이 되면 네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아!”

    “그래서 만족하세요? 새명의 안주인이 된 지금의 삶이?”

    “……모든 걸 누리고 살아왔어. 사람들은 새명의 안주인이 된 나를 부러워했다. 만족하냐고? 그래, 만족해. 그러니 내 자식인 너에게도 물려주려는 것뿐이야.”

    “누나 있잖아요.”

    “지선인 안 돼.”

    “왜요? 엄마도 그렇게 살아오셨으니까요? 딸은 결혼하면 출가외인이 될 테니까? 만약 제가 어머니 뜻대로 새명의 후계자가 된다면 누나는 새명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조건에 맞는 상대를 골라 시집보내실 생각이시겠죠.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 그렇게 된다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네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될 거다. 그건 단순히 돈이 있다고 되는 게 아냐. 힘이 있어야지. 내 꿈을 물었니? 난 지금의 새명보다 더 강한 새명이 되길 원한다. 그걸 네가 만들어 가는 게 꿈이야.”

    “그럼 그 꿈은 절대 이뤄지지 않겠군요.”

    “경우야!”

    “저도 어머니 덕분에 어머니 아들로 태어나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덕에 지금처럼 드라마 작가도 할 수 있었고요. 그 점은 감사해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딱 거기까지예요. 누군가 위에 오르고 싶은 생각 없어요.”

    “어차피 누군가는 그 자리에 앉아야 해.”

    “전 아니에요. 그건 저를 위한 게 아니란 걸 모르시겠어요? 어머니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저를 수단으로 쓰지 마시란 겁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 외할아버지가 어머니께 그랬던 것처럼요.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내가 널 수단으로 썼다고? 그런 적 없어. 다 너를 위해서-.”

    “아마 외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예요. 어머니를 위한 거라고요. 그래서 어머니는 외할아버지를 참 많이 닮으셨어요.”

    “…….”

    “어머니가 뭐라 하시든 전 어머니 뜻대로 되진 않을 거예요. 대표직, 내려놓죠. 그럼 제작사는 그대로 돌아갈 테고 저만 SBC 포기하면 되겠네요. 어차피 SBC 아니더라도 오라는 방송국은 많거든요. 제가 인기가 많은 작가라서요.”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하니?”

    “그럼 어머니가 해림 요양 병원에 박경덕 어르신 숨겨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께 할까요?”

    경우의 말에 윤정숙이 얼어붙고 말았다. 박경덕도 박경덕이었지만 남편이 아들에게 그 이야기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뭐, 뭐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아버지한테 말씀드리길 원하시면 어머니 마음대로 하세요.”

    “지금 나 협박하는 거니?”

    “네. 어머니가 저한테 사람을 붙여 놓은 것처럼 저도 그랬거든요. 아, 제가 어머니 닮았나 봐요.”

    “…….”

    “어차피 이제 와서 병원 옮겨도 소용없을 거예요. 제가 다 찾아낼 테니까.”

    “이젠 제법 협박도 그럴 듯하게 할 줄 아는 구나.”

    “협박이 아니죠. 이게 다 어머니와 저를 위한 일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싫어하고 싶진 않거든요.”

    “…….”

    “원래는 어머니랑 저녁 먹으려고 왔는데 아무래도 밥 먹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머니, 제발 한 번만 생각해 주세요. 진짜 절 위하는 게 뭔지 말이에요.”

    그렇게 돌아선 경우가 천천히 전시실 밖을 빠져 나갔다.

    윤정숙은 그 앞에 놓은 여러 장의 자화상들을 바라봤다. 자꾸만 경우가 했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외할아버지일 거라고. 그거 아세요?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닮아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디자인 공모전, 1등 수상자는 미국 유학이 상금으로 걸린 대회의 예선에 그녀는 당당히 1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2차 심사를 위해 며칠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추가 작품을 그녀의 아버지가 찢어 놓고 말았다.

    며칠을 울었다. 자신의 꿈이 부서졌으니까.

    그런데 자신이 그런 아버지를 닮았다고? 자신은 그저 새명을 능력 있는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윤정숙은 생각이 많아졌다.

    * * *

    집으로 갈까 하다가 사무실로 돌아온 경우는 작가실에 스탠드가 켜져 있는 걸 보고 문을 열었다. 빈 사무실에 구연하가 홀로 작업 중에 있었다.

    “퇴근 안 했습니까? 촬영 시작하면 바빠질 텐데 차라리 지금 일찍 들어가는 게 나을 건데요?”

    “집보다는 차라리 여기가 편해서요. 근데 작가님이야말로 어쩐 일이세요? 퇴근하신 거 아니세요?”

    “나도 집보다는 여기가 편해서…….”

    경우의 말에 구연하가 피식 웃었다.

    “참, 지난번엔 고마웠어요. 솔직히 얘기해 줘서.”

    “당연한 건데요.”

    “근데 왜 그랬어요?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이득이었을 텐데.”

    “아, 그래서 저도 좀 아깝게 생각은 해요. 아파트가 날아갔으니까 근데…….”

    “?”

    “우리 드라마가 그렇잖아요. 부당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건데 나부터 유혹에 넘어가면 제가 너무 부끄럽잖아요. 전요, 저한테만큼은 당당하고 싶어요.”

    “고맙습니다. 좀 우울했는데 덕분에 힘이 났어요.”

    “아, 그럼 이왕 힘이 나신 김에 이것 좀 봐주세요.”

    구연하가 쓰고 있던 대본을 내밀었다.

    “여기서 이 인물의 감정선 말인데요.”

    그날 밤, 밤이 늦어지도록 두 사람은 드라마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로부터 며칠 후 <다잉 메시지>의 첫 촬영이 시작된 가운데 윤정숙이 출국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