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09화 (109/250)

#109. 피에타 (5)

늘 굳은 표정의 민 회장만 보다 긴장이 풀린 그를 보는 것도, 이렇게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보는 것도, 거기다 자신을 향해 웃는 아버지를 보는 것도 모두 경우에겐 처음이었다.

“마시긴 하지만 일 때문이 아니면 그렇게 즐겨 마시지는 않습니다.”

“하긴, 그런 일이 있었는데 즐겨 마시면 안 되지. 그럼 한잔만 해. 여기, 와일드 터키 스트레이트로 한 잔.”

민 회장의 주문에 바텐더가 잔을 내밀었다.

익숙하지 않은 술 이름이 살짝 걱정되기는 했지만 한 잔인데 별일 있겠냐 싶어 들이켠 경우는 식도를 때리는 듯한 느낌에 절로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을 본 민 회장이 웃었다. 오늘 민 회장의 색다른 모습을 많이 본 경우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술은 아버지가 아들한테 가르쳐 주는 건데……. 생각해 보면 너한테 특히 더 무심했어. 네 형들과는 그러지 않았는데 너와는 너무 거리를 뒀던 것 같아. 나는 그게 네가 자꾸 엇나가서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 때문이었지.”

“…….”

“그래서 후회가 돼. 지나고 보면 모든 것들이 아쉬워.”

민 회장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술이 쓴 건지 인생이 쓴 건지. 그래서 술을 마시는 건지도 모른다.

“요즘 일은 어떠냐?”

“잘돼 가고 있어요. 현재 제작하는 드라마가 방송 중에 있거든요. 곧바로 다른 드라마도 제작하기로 약속되어 있어서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그래, 젊어선 일을 해야지.”

세상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렇듯 그 역시 그랬다. 이 술자리가 너무 어색하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었는데 마침 구연하의 일도 있고 하니 경우는 이 기회에 어머니 윤정숙에 대해 묻기로 했다.

“어머니랑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선보신 거예요?”

“그랬지. 그때 난 철이 없었어. 세상 무서운 줄 몰랐거든. 아버지의 그늘 아래 얼마나 편히 살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나간 선 자리가 마음에 들 리가 있나. 돌아보면 그때 네 엄마 참 예뻤는데 그땐 그걸 몰랐어.”

술 대신, 안주 대신, 민 회장의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생략한 것이 많았지만 경우가 어머니를 이해하는 데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경우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가던 민 회장은 조금 후련한 기분이 되었다. 철없던 아들이 어느 새 철이 들어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과거 이야기에 생각이 난 민 회장은 기사에게 물었다.

“박경덕 어르신 찾는 건 어떻게 됐어?”

“안 그래도 사람을 풀어 마지막 행적지인 포항을 이 잡듯 뒤지고 있습니다. 분명 봤다는 사람이 조만간 나올 겁니다.”

“그래. 반드시 찾아내.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 마지막 유지는 받들어야지.”

민 회장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 * *

“어르신, 아 하세요.”

윤정숙이 직접 밥을 떠서 박경덕에게 먹여 주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예신이 안절부절못했다.

“이사장님, 제가-.”

“됐어. 어르신 식사 시중은 내가 들어야지. 괜찮아.”

윤정숙은 박경덕에게 직접 밥을 떠먹이고 꼼꼼하게 그의 입을 닦아 주었다.

그러니까 시아버지 민판섭이 다른 사람들을 다 물리고 아들에게 마지막 전언을 남기던 그때, 문 밖에 선 윤정숙은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대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남편 민홍준이 다급하게 아버지를 부르던 그때 그녀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시아버지의 민판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죽거들랑 박경덕이 찾아가. 내가 그놈한테 차명으로 물산 주식을 맡겨 놨다. 그거면 정현이가 네 다음을 잇는 데 문제 없을 거다. 그게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인 것 같구나…….’

윤정숙이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남편의 냉대에 그 누구보다 미안해하며 자신이 낳은 아들 준호에게 모든 것을 다 물려주겠다고 하던 시아버지였다. 그런데 뒤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자신이 먼저 박경덕을 찾기로 마음을 바꿨다.

이튿날, 그녀는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친정아버지를 찾아갔다.

“혹시 박경덕이라고 아세요? 저희 시아버지 아시는 분 같은데.”

“박경덕? 박경덕, 박경덕이라……. 아, 그 사람 말하는가 보군. 네 시아버지의 철천지원수가 하나 있지. 갑자기 그 사람은 왜?”

“어쩌다 이야기가 나왔어요. 근데 철천지원수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친정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고향 선후배 사이였던 민판섭과 박경덕. 민판섭이 무역업으로 회사를 키운 것과 달리 박경덕은 공사판에서 흙밥을 먹으며 회사를 일으켰다. 민판섭은 무역업 외에도 남몰래 하는 사업이 있었으니 바로 고리대금업. 공사 대금을 제때 받지 못한 박경덕이 돈에 허덕여 민판섭에게 돈을 빌렸다 결국 갚지 못해 회사를 빼앗겼다고.

“아버님이 고리대금업을 하셨을 줄은 몰랐어요.”

“새명이 왜 단기간 그렇게 성장했는데? 그런 식으로 잠깐의 위기만 넘기면 되는 알짜 기업을 꿀꺽해서 몸체를 키웠다. 아주 약은 영감이야.”

그런 집으로 왜 자신을 시집보낸 건지 윤정숙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어차피 아버지께 들을 말은 뻔했으니까.

시아버지는 위기의 순간 사돈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지만 친정아버지 역시 시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이득이 되니 끊을 수 없는 혼인으로 연을 맺은 거지.

“혹시 그 박경덕이라는 사람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 듣기론 포항으로 간다고 했던가? 그쪽에 처갓집이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도 같은데.”

윤정숙은 그 길로 지역 사정을 잘 아는 흥신소 사람들을 고용해 박경덕을 찾아냈다. 가명을 쓴 탓에 그를 찾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영덕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낚시로 세월을 낚고 있었던 그를 찾아갔을 때 이미 치매가 진행된 상태였으니 윤정숙은 그를 그때부터 지금까지 돌봐 주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다는 차명 주식도 주식이었지만 남편이 그를 찾지 못하도록 꽁꽁 숨겨 두는 게 목적이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운전을 하다 룸미러를 살펴보던 김예신이 물었다.

“그런데 원수시라면서 어떻게 차명 주식을 맡길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거? 오해가 있었더라고.”

아내가 일찍 죽고 홀로 아들을 키우던 그는 아들마저 사고로 세상을 뜨자 돈을 빌려 쓴 민판섭에게 회사를 넘겨 버렸다.

물론 민판섭이 박경덕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처럼 철천지원수는 아니었다.

자식도 없고 딸린 식구도 없고 다른 물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만한 창고지기가 없었을 터.

“만약 저대로 어르신이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룸미러로 윤정숙의 얼굴을 확인하던 김예신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쓸쓸한 탓이었다.

* * *

사무실로 돌아온 경우는 책상 위에 놓아둔 <다잉 메시지>의 1화 대본을 읽는 중이었다.

다급한 듯한 남자가 등장한다. 집 안을 뒤져 서류 봉투 속에 숨긴 무언가를 찾아낸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남자는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에 놀라 뒤쪽 창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친다. 집 안은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다.

얼마 후 집 안으로 들이닥친 여러 명의 괴한들. 남자를 찾지만 남자는 어디에도 없다. 한발 늦었다 생각한 끝에 열린 창문을 보며 소리친다.

- 저쪽이야! 얼마 못 갔을 테니 서둘러!

괴한들이 밖으로 나가 사라진 남자를 쫓는다.

확실히 회의를 통해 진행 방향을 잡은 덕분에 혼자서 대본을 쓰는 것보다 빨리 나왔다. 거기다 신인 작가들답지 않게 대본이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탓인지 경우는 좀처럼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거기다 술기운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신경 쓰였다.

‘네 엄마가 그 일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를까, 후계 경쟁에서 떨어진 탓이었는지 아니면 처음 막내아들과 함께한 술자리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야기도 경우에게 해 버렸다.

“박경덕이라…….”

경우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아버지가 그 사람을 찾지 못한 게 어머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머니 한 달간 스케줄 좀 알아볼 수 있을까? 이왕이면 어머니 몰래 알아봤으면 싶은데. 부탁해.”

김강철과 통화를 마친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어머니가 박경덕 그 사람을 찾아 숨겨 두었을지 않았을까?

어머니라면 충분히 그럴 사람이었다. 화가 나 우발적으로 털어놓긴 했지만 혹시 아버지가 알아차리진 않았을까 불안한 마음에 직접 찾아가 볼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마치 드라마 속 범인이 사건 현장을 다시 찾는 것처럼.

며칠 후 사무실을 찾아온 김강철이 서류철을 꺼내 놨다.

“여깄다. 하여간 일을 시켜도 뭘 그런 걸 시켜. 내가 그거 몰래 알아내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그러게. 난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고생했다.”

“저 입에 발린 소리. 근데 이사장님 스케줄은 왜?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데?”

대답 대신 경우는 어머니의 스케줄을 살펴봤다. 한참을 들여다본 경우는 혹시나 싶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 아주머니. 저 경우예요. 혹시 지난 주 금요일에 어머니 일찍 집에 들어오셨던가요?”

“……늦게 오셨다고요? 확실해요?”

“아니, 그냥 뭣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요. 어머니껜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네.”

경우가 전화를 끊자 의아한 듯 김강철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강철아, 우리 어머니 차량, 새명 비서실에서 관리하는 거지? 미술관 쪽이 아니라.”

“아마 그럴 걸.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김 기사였던가? 너 김 기사 잘 알겠네?”

“무슨. 소속이 달라서 잘은 몰라.”

“혹시 김 기사 아는 사람 없어? 지난 금요일 어머니 행선지가 어딘지만 알면 될 것 같은데.”

잠시 생각하던 김강철이 이내 입을 열었다.

“너네 형 인도로 가고 건설 쪽에서 물산으로 옮긴 형이 하나 있는데, 잠깐만.”

잠시 통화를 하던 그를 경우는 지켜봤다. 그리고.

“그날 이사장님 차량 이용 안 하셨다는데. 김 기사보고 일찍 들어가라고 해서 모처럼 불금이라고 동네방네 자랑해서 알고 있단다.”

“그렇단 말이지.”

잠시 생각에 잠긴 경우는 마침 오늘 윤정숙이 미술관에서 후원하는 예술인 모임에 참석한다는 걸 알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 * *

“경우야, 여긴 어쩐 일이야? 미술관엔 한 번도 안 오더니.”

“그냥요. 한 번도 안 와 본 것 같아서. 어머니랑 저녁 먹을까 싶어서 왔는데. 어머니 계시죠?”

“어쩌지? 이사장님 오늘 예술가들 모임 있어서 거기 가셨는데. 연락해 보고 오지 그랬어.”

“아, 그래요?”

경우는 무척 실망한 듯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난번에 어머니랑 좀 안 좋아서 깜짝 놀라게 해 드리려고 했거든요.”

윤정숙에게 경우가 물산 지분을 지선에게 넘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예신은 그 일 때문에 어머니 마음을 풀어 드리러 온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아, 그럼 혹시 어머니 스케줄 비는 날 언제예요? 그날 다시 올게요. 대신 어머니한테 오늘 저 왔단 이야기는 비밀로 해 주시구요.”

“음, 모레 괜찮아.”

“그럼 모레 다시 올 테니까 처음 본 것처럼 해 주세요.”

경우의 말에 김예신이 웃었다.

“알았어. 대신에 꼭 와야 해. 요즘 이사장님 컨디션 별로셔. 근데 네가 온다면 좋아하실 거야.”

그 말에 경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누나 차 말이에요. 뽑은 지 좀 됐죠? 타고 다니기엔 어때요?”

“차? 차는 갑자기 왜?”

“아, 강철이 저 땜에 고생해서 차 바꿔 줄까 싶어서요. 누나 차 브랜드 괜찮은 거 같아서요.”

“안정감 있고 조용하고 괜찮아.”

“차도 딱 누나 같네요.”

“그런가?”

“한 번만 타 보면 안 돼요? 시승해 보면 안 되려나? 아, 차는 빌려주는 거 아니랬는데 미안해요. 못 들은 걸로 해요.”

“아니야, 뭐 어려운 거라고. 차 키 줄 테니까 한 바퀴 돌고 와.”

“고맙습니다.”

그렇게 차 키를 받아 들고 경우는 미술관을 살짝 벗어났다. 메모리 카드가 빠져 있어서 다행히 블랙박스는 녹화되고 있지 않았다. 경우는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워 두고 내비게이션을 살폈다.

“이 누나도 참 인생 재미없게 사셔.”

가는 곳이라고는 집과 미술관뿐인 김예신이 어쩐지 측은하게 느껴진 경우는 최근 목적지에서 구연하 작가의 집과 다른 곳을 하나 찾아냈으니.

“여기다.”

그곳은 서울 외곽의 요양 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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