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08화 (108/250)
  • #108. 피에타 (4)

    “구 작가, 어디 선보러 가?”

    이제 막 출근한 구연하를 본 작가실의 모든 작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 후드티에 청바지만 입던 그녀가 치마를 입고 온 것이었다. 그것도 선보러 나오는 여자들이 입는 딱 그런 복장으로.

    “오늘 좀 화려하네. 집에서 결혼하라고 하셔? 벌써 그럴 나이는 아니지 않아?”

    혼기를 놓쳐 명절이면 집에서 압박을 받는 김해영이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얼어 죽을 로맨스> 촬영이 시작된 이후로 그녀의 다크서클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으니 멀리서 보면 해골이 지나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오늘따라 화려하게 꾸민 구연하와 묘한 대조를 이뤘다.

    “선은요, 무슨. 그냥…… 저도 좀 달라지고 싶어서요. 그동안은 주눅 들고 살았는데 이제 안 그럴 거거든요.”

    구연하의 말이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한 작가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구연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사건과 관련된 기사 하나라도 더 읽으려 서두를 뿐이었다.

    이번 일의 발단이 된 것은 전날 저녁,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경우가 선물해 준 가방이 그녀가 넣어 둔 옷장 속이 아닌 책상 위에 있는 걸 보고 의아했다.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 하루를 보낸 탓에 처음엔 자신이 책상 위에 놓아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이내 그 원인을 알아차린 그녀는 거실 밖으로 나갔다. 거실엔 그녀를 제외한 가족들이 과일을 먹고 있었다.

    “야! 너 내 가방 가지고 갔냐?”

    “야라니, 언니한테.”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얘가 지금 내가 선물받고 한 번도 안 써 본 가방을 말도 없이 들고 나갔단 말이야!”

    “그랬어? 가방도 많은데 왜 그랬어?”

    “좀 쓰면 어때서? 가방이 닳기라도 해?”

    “뭐? 나 그거 선물받은 거야. 우리 대표님이 입사 기념으로 사 주신 거라고. 근데 남의 선물, 사람 없는 사이에 맘대로 뜯어본 것도 모자라서 난 한 번도 안 들어 본 걸 네가 가지고 가. 미쳤어?”

    “아무리 그래도 얘가 언니한테 정말.”

    “어차피 너 안 쓸 거잖아. 옷장 속에 처박아 둘 거면서 그럴 바에야 내가 들어 주는 게 더 낫지 않아? 가방은 들라고 있는 거야. 너처럼 그렇게 모셔 두는 게 아니라. 아끼다가 똥 된다는 말도 모르니? 하긴, 너랑은 좀 안 어울리지, 그 가방. 솔직히 내가 더 어울려.”

    “뭐?”

    “아유, 왜들 그래. 언니가 한 번 들 수도 있는 거지. 그러게 넌 왜 받았으면서 놔뒀어. 네가 가지고 나갔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결국 또 내 탓이란 거네.”

    남의 가방을 들고 간 언니가 아니라 가방을 안 든 자기 탓이란 엄마 말에 구연하는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더는 대꾸할 기운도 없어 그대로 돌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쩌려고 쟤가 아무 말도 안 하네. 방방 뛸 줄 알았더니.”

    “그러게.”

    “그래도 이번엔 네가 심했어. 한 번도 안 들어 봤다잖아. 막 선물받을 걸 그러면 돼?”

    “그럼 어떡해? 딱 그 가방이 오늘 입은 옷하고 어울리는데. 쟤 어차피 그거 안 써. 그렇게 옷장 속에 넣어 둔다고 오래 가나. 바람도 쐬고 햇빛도 받고 그래야지.”

    “그래두. 다음엔 그러지 마.”

    “알았어. 엄마. 내가 엄마 말은 잘 듣는 착한 딸이잖아.”

    방으로 돌아온 구연하는 가방으로 보며 생각했다. 언니 말이 옳다고.

    그래서 오늘, 그녀는 언니가 출근한 이후 언니 방으로 들어가 선볼 때 입겠다며 가장 마음에 들어한 옷을 꺼내 입고 아무도 못 본 사이에 출근을 해 버렸다. 아끼면 안 된다고 한 건 언니였으니까.

    구은희가 이 사실을 알고 지랄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상관없었다. 이제부턴 눈치 보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고 위하며 살기로 했으니까.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더니 확실히 옷이 날개는 날개야. 구 작가한테 이런 모습이 있는 줄 몰랐네.”

    윤기동에 이어 요즘 일하느라 늘 붙어 있는 정상혁의 시선도 평소와 다르자 구연하는 여자들이 왜 그렇게 꾸미고 다니는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평소 입던 것과 달라 조금 불편했지만 감수하기로 했다.

    “회의 시작하죠.”

    다만 평소보다 가라앉은 경우가 조금 신경 쓰였을 뿐.

    * * *

    “먼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차 타고 금방 왔는데요, 뭘.”

    나상재 감독의 영화 <비밀의 계단>에 출연했다가 결국 우재환으로 교체되어 버린 비운의 배우, 박철민이 경우의 부름에 ‘스튜디오 글로리’에 나타났다.

    경우는 새롭게 들어갈 드라마 <다잉 메시지>의 대본을 맡은 구연하, 정상혁은 물론 크리에이터 윤기동에게도 박철민을 소개했다.

    “아, 그럼 이분이 우리 드라마 박 반장?”

    “예?”

    “아니, 뭐 예를 들어 그렇다는 거죠. 하하.”

    너털웃음을 짓는 윤기동을 보며 경우의 안내에 박철민이 자리에 앉았다.

    범죄 수사물의 특성상 매회 사건이 벌어지고 해결되는 에피소드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해당 회차에만 등장하고 사라지는 단발성 캐릭터가 많았다. 하지만 극의 중심을 잡아 주는 캐릭터 또한 존재했으니 사건을 해결하는 경찰서의 팀원들이 그랬다.

    박철민은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임 형사로 이번 드라마의 주인공에 낙점되었다.

    지난번 <비밀의 계단> 문제로 그의 다음 출연을 약속한 것도 있었고 박철민의 캐릭터가 다혈질에 잘 어울린다는 점을 들어, 약자에겐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임 형사 캐릭터를 그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번 미팅은 캐스팅에 관한 것도 있었지만 지난번 앙금을 풀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기도 했다.

    “솔직히 그때 내색은 안 했지만 자존심이 엄청 상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다 그대로인데 저만 교체됐으니까요.”

    “당연히 그러셨겠죠. 어휴, 마음 고생 심하셨겠네.”

    “그래서 이쪽으론 발도 안 디디려 했습니다.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다음 작품 캐스팅이 와도 거절하려고 마음먹었죠. 근데 그렇게 며칠 지나다 보니 궁금하더라구요.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나는 안 되고 그 사람은 되나 싶었거든요.”

    “그때 일은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러시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과 받으려고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고요. 그냥 그때 제 심정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어쨌건 영화 다 보고 나오는데 왜 교체됐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우재환 씨 좋은 배우죠. 확실히 저랑은 캐릭터가 다르더라구요. 나쁜 역인데도 연민이 느껴졌달까. 전 나쁜 놈한테 그런 감정은 사치라 생각했거든요.”

    “그렇지. 나쁜 놈인데 불쌍하게 생각하면 그놈한테 당한 사람은 어쩌라고요. 안 될 말이지, 안 될 말이야.”

    윤기동의 너스레에 박철민도 결국 웃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그 역할엔 우재환 씨 같은 사람이 어울려요. 배우한테 맞는 역할이 있다는 거 몰랐는데 처음 느꼈습니다. 기성품인데도 맞춘 듯 몸에 꼭 맞는 그런 역할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랬습니다.”

    “박 배우님도 연기력은 밀리지 않으시죠. 이번엔 아마 박 배우님의 맞춤 역할이 될 겁니다. 우 배우가 와도 소용없을 정도로 말이죠.”

    “그래야죠. 저 그날 이후로 엄청 노력했습니다. 발성도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연기 선생님 새로 구해서 지도도 받았습니다. 잘하고 싶었거든요.”

    “네, 이번 드라마 반드시 성공시켜야죠. 시놉시스는 얼추 나왔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좋습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임 형사는 사건 해결의 중심축이기도 하면서 범인이 아닐까 의심이 가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살해당했고 그 용의자로 아버지가 의심받는 가운데 자살한 과거사가 있거든요.”

    “어머니 살해범이 아버지가 맞는 겁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임 형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렇죠.”

    “그렇다는 건 임 형사 마음속에 분노가 항상 들끓고 있겠군요.”

    “그래서 분노 인격 조절 장애를 가진 인물이라고 설정했다는 거 아닙니까.”

    시놉시스를 읽으면서 두 사람이 하는 설명을 들은 박철민은 이미 임 형사가 된 듯 그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구연하와 정상혁은 박철민의 행동, 말투,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습관을 체크하고 있었다.

    작가들이 초반 작업을 할 때는 배우들을 캐스팅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필을 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때문에 조금 더 현실적인 캐릭터 형성을 위해 머릿속으로 어울리는 배우들로 가상 캐스팅을 하고 드라마를 쓰곤 했다.

    그렇게 하면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캐릭터에 조금 더 생동감이 부여되기 때문이었다. 그 캐릭터와 어울리는 배우를 생각해 집필에 들어가기 때문에 실제 캐스팅에 작가들의 입김이 세지는 것도 당연했다. 드라마를 집필한 작가만큼 그 캐릭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번에는 눈앞에 캐스팅된 배우가 있었으니 조금 더 사실적인 캐릭터를 위해 구연하와 정상혁은 그가 깨닫지 못하는 동안 박철민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다.

    긴 시간 이어진 미팅을 마친 후, 사무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경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전화였다.

    * * *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윤정숙은 김예신을 불렀다.

    “혹시 오늘 스케줄 어떻게 돼?”

    “네 시에 송일 그룹 사모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엔 별다른 스케줄 없구요.”

    “아니, 나 말고 예신 씨.”

    “저요? 특별한 건 없습니다만.”

    “그럼 오늘 예신 씨가 운전 좀 해 주겠어? 김 기사 돌려보내고 말이야.”

    “병원, 가 보시려구요?”

    “응. 벌써 안 찾아뵌 지 여러 날 됐잖아.”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예신 씨.”

    “당연한 일인데요.”

    윤정숙의 말에 김예신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날 오후, 스케줄을 마친 윤정숙은 김예신의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한참을 달려 차가 도착한 곳은 서울 외곽의 요양 병원. 뛰어난 시설은 물론이고 보안이 철저한 이곳에 윤정숙이 들어서자 그녀를 알아본 수 간호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어르신, 좀 어떠세요?”

    “상태가 좀 안 좋아지셨어요. 치매가 점점 심해지셔서 최근엔 본인 이름도 오락가락하세요. 그나마 오늘은 좀 괜찮은 편이긴 한데……. 지금 간병인하고 산책하고 계실 거예요.”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 보죠.”

    윤정숙이 뒤돌아서 나가자 새로 들어온 간호사 김 선생이 수간호사에게 물었다.

    “저분 혹시 새명 그룹 사모님 아니세요? 뉴스에서 봤던 것 같은데.”

    “쉿! 입원 환자와 가족의 신상에 대해서는 관심 가지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관심을 가진 게 아니라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저도 모르게…… 근데 우리 병원엔 웬일로 오신 거예요?”

    “먼 친척분이 입원해 계시거든요.”

    “혹시 오성복 어르신?”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방금 뒤쪽 산책로 길로 가셨잖아요.”

    “그런 눈치로 우리 일이나 열심히 합시다. 새로 입원한 301호 환자, 가족분들한테 주의 사항 알려 드렸습니까?”

    “지금 가려고 했습니다. 수 선생님.”

    눈치를 보며 김 선생이 301호로 간 사이, 뒤뜰 산책로 입구에 들어선 윤정숙은 초점 없이 흐린 눈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발견했다. 휠체어를 밀던 간병인이 윤정숙을 알아보고 잠시 자리를 비켜 주자 윤정숙이 노인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저 왔어요.”

    “색시는 누구슈?”

    “저 홍준이 처예요. 기억하시겠어요?”

    “홍준이? 아, 민가 놈 떡두꺼비 홍준이? 이 썩을 놈의 민가 놈, 제 자식 호적에 잉크도 안 말랐겠구만, 자식 욕심에 그새 장가를 보냈어?”

    “어르신. 벌써 장가가서 손주 볼 나이가 되었는데요.”

    “그래? 근데 색시는 뉘집 딸래미길래 이렇게도 고와? 우리 아들이 조금만 더 컸어도 며느리 삼았으면 싶구만.”

    이 노인이 민홍준 회장의 아버지 민판섭이 죽어 가면서 말한 박경덕이었으니 그를 보는 윤정숙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 * *

    전화를 받은 경우가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청담동의 어느 바.

    전화를 끊자마자 출발했는데도 아버지 민 회장이 먼저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이제 왔냐? 이리로 앉아.”

    경우가 옆으로 가 앉자 민 회장이 다 큰 아들을 뿌듯한 얼굴로 보는 것처럼 경우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근데 어쩐 일로…….”

    “술집에 술 마시러 왔지, 어쩐 일은. 근데 너 술은 좀 하냐?”

    민 회장이 웃으며 경우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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