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07화 (107/250)
  • #107. 피에타 (3)

    이른 아침 출근한 구연하는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몸은 작가실에 있었으나 그녀의 정신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하나둘 출근한 작가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구연하에게 달려들었다.

    “구 작가, 어제 아무 일 없었어요?”

    “누가 찾아오거나 그러진 않았어?”

    “아, 민 작가님 비서라는 분이 찾아왔었더라구요.”

    “역시 어제 바로 작가 키트 받았구나. 하여간 추진력 하나는 좋으셔. 뭐 받았어요?”

    “영양제랑 뭐 이것저것. 아, 제 가방이 낡았다고 좋은 가죽 가방도 하나 사 주셨더라고요.”

    “어? 우리가 가방은 이야기 안 했는데.”

    “이제보니 구 작가 가방끈이 닳았네. 이런 건 또 언제 보시고. 하여간 민 작가님 참 세심하셔.”

    “근데 새 가방 어딨어요? 혹시 안 하고 왔어요?”

    “너무 비싸 보여서 좀 아까워서요…….”

    “아까워 하지 말고 써요. 그래야 좋은 기운 들어오지.”

    “맞아요. 선물은 바로 해야 주는 사람도 기쁘게 하는 거라고요.”

    “네.”

    “근데 구 작가, 아직도 몸이 안 좋아? 기운이 하나도 없네.”

    “아니, 괜찮아요.”

    “하긴 요즘 계속 드라마 회의하고 그러니까 실감 나나 보네. 나도 드라마 처음 시작했을 때 얼마나 부담되고 긴장했는지 몰라. 아예 다 때려치고 숨고 싶었다니까. 근데 그것도 조금 지나면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 마.”

    “그래요. 민 작가님, 윤 작가님도 계시지만 나도 있으니까.”

    정상혁이 씩 웃자 구연하는 마지못해 웃었다.

    드라마도 드라마였지만 구연하는 지금 다른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었다. 어제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탓이었다.

    어제 저녁, 자신을 찾아온 김예신을 따라 간 곳은 예당미술관. 그곳엔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 경우의 모친 윤정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TV에서 보던 것보단 훨씬 우아하고 포스가 느껴졌다.

    “나 경우 엄마예요. 앉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 작가의 모친이 자신을 왜 부른 건가 싶어 의아해하던 그때 윤정숙이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지금 우리 경우가 구 작가님하고 무슨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고 하던데 맞나요?”

    “네. SBC에 하반기 편성이 잡힌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즘 매일 정신 없이 지내고 계십니다.”

    “구 작가가 날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제, 제가요?”

    “그 프로젝트에서 우리 아들이 빠지게만 도와줘요.”

    “예?”

    “경우가 이번 프로젝트, 드라마국 전효상 국장과 은밀히 한 계약을 바탕으로 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나요?”

    기성 작가들 위주로 돌아가는 드라마 계의 세대교체를 위한 프로젝트라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두 사람 사이의 밀약이 있었다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계약서엔 만약 이 프로젝트에 경우가 빠진다면 ‘스튜디오 글로리’는 당분간 SBC의 그 어떤 드라마도 제작하지 못하게 되어 있더라구요. 그러니 뭘 해서든 경우가 그 프로젝트에서 빠지게만 도와줘요.”

    “하지만 그럼 저희 스튜디오 글로리는요? 저 말고도 같이 입봉하시는 작가님도 있는데요?”

    “그건 걱정 말아요. 스튜디오 글로리에 해가 된다면 경우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빠지는 쪽으로 해결 방안을 찾을 겁니다. 계약서엔 경우가 소속된 제작사라고 했지, 스튜디오 글로리라고 명시되어 있는 건 아니니까. 혹시라도 그걸 문제 삼는다면 제가 해결하죠.”

    “아무리 그래도…… 편성까지 받았는데 방송은 어쩌라고요? 방송이 펑크라도 나면요? 이건 민 작가님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방송국에도 해를 끼치는 일이에요.”

    “그 점도 걱정 말아요. 전효상 국장에게 이번 드라마 후속작을 미리 제작할 수 있도록 해 놨으니까. 구 작가와 동료들이 준비한 프로젝트는 그 드라마 끝난 후가 될 겁니다. 순서만 바뀐다고 생각하면 돼요. 우리 경우만 빠지면 아무 문제없을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거죠?”

    “나는 내 아들이 드라마 작가에 머물러 있는 거 원하지 않아요. 새명의 주인이 되길 원하지.”

    “네?”

    “자식들이 넷인데 내가 봤을 땐 경우가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경우는 자신이 막내라 형제들에게 양보를 하려 해요. 막내가 형들과 누나를 제치고 후계자가 되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죠.”

    “…….”

    “하지만 첫째든 둘째든 막내든 무슨 상관이 있나요? 실력이 있는 사람이 회사를 경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글쎄요. 저는 잘…….”

    “구 작가는 형제가 어떻게 되죠? 형제들 때문에 밀려나 본 적 없어요? 혹시 외동이라 잘 모르려나?”

    모를 리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둘째의 설움을 너무 잘 알아 탈이었다.

    “…….”

    “그냥 해 달라는 거 아니에요. 구 작가가 도와만 준다면 그에 대한 충분한 보답을 할 겁니다.”

    “보답이라고 하시면…….”

    “드라마 작가들은 집필할 공간이 따로 필요하다고 하던데. 상암동에 아파트가 하나 있어요. 일만 잘 끝나면 구 작가 앞으로 명의 이전을 해 줄게요. 스튜디오 글로리가 부담스러우면 다른 제작사를 소개해 줄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편성도 보장해 줄 거구요. 공동 집필이 아닌 단독 집필이 낫지 않나요?”

    “만약 제가 거절하면요?”

    “스튜디오 글로리엔 작가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 조금 전 말씀하셨던 같이 하신다는 작가님도 있었죠?”

    “…….”

    “그러니까 구 작가가 우리 경우를 조금만 생각한다면 날 도와줘요. 우리 경우가 드라마 작가가 아닌 새명의 후계자가 될 수 있게. 아마 자신이 제작사나 다른 작가들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면 경우는 스스로 그만둘 겁니다. 그런 아이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구연하를 보는 윤정숙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구 작가? 구 작가?”

    “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회의실 안, 경우는 물론이고 윤기동과 정상혁까지 구연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그래서 그런 거야? 왜 이렇게 넋을 놓고 있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죄송해요.”

    “그렇다고 죄송할 것까지야.”

    “그럼 회의 계속 진행하시죠.”

    “예전에 중앙정보부와 관련된 의문사가 많지 않나요?”

    “간첩 조작? 뭐 그런 게 한두 가지겠어? 지금도 정치권과 관련된 거면 종종 자살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잖아. 근데 수사반장도 잘 모르면서 중앙정보부는 어떻게 알아?”

    “그거야,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진상 규명이다 뭐다 하면서 재조명되는 일이 많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간다면 아예 드라마 배경을 현재가 아닌 과거로 해야 해요. 과거사 진상 규명을 하려면 다잉 메시지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으니까요.”

    “굳이 다잉 메시지가 현장에 남아 있는 것만 있을 필요는 없죠. 과거엔 이런 것들이 남아 있었지만 제대로 조사조차 못 해 보고 끝났다. 하지만 현재 시간을 초월해 그들이 남겨놓은 다잉 메시지로 진짜 범인을 찾는다, 이런 식으로 나갈 수도 있는 거니까.”

    여러 의견이 오고 갔지만 전날 활발히 의견을 낸 것과 달리 구연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의 모습에 경우는 전날 밤 김강철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어때? 사진 속에 그 사람들, 예신 누나랑 구 작가 맞는 거지?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맞아. 잘못 본 거 아니야.”

    “근데 예신 누나가 왔을 정도면 너네 어머니가 나서신 건데. 어머니가 구 작가를 왜 불러?”

    “…….”

    “너 혹시 구 작가랑 사귀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이게 따지고 보면 아들이 하는 회사의 직원을 어머니가 부르는 건데 그럼 답이 딱 나오지.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많이 나오더만. 너 같은 게 어딜 감히 내 아들을! 내 아들 곁에서 당장 떨어져, 당장! 얼마면 돼? 그 정도면 너 같은 형편에 있는 애들한테 과분한 거 아니니?”

    “너, 나 몰래 연기 연습하냐?”

    “괜찮았냐? 혹시 다음 드라마 캐스팅?”

    “이쪽에 꿈이 있었어?”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네가 정 그렇게 나의 재능을 가만두고 싶지 않다면야 굳이 사양하진 않을게.”

    “그래……? 음, 있다. 너한테 딱 좋은 역할!”

    “그래? 뭔데?”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우리가 이번에 범죄 수사물로 할 거거든. 진짜 너랑 딱일 거 같지 않냐? 크으, 메소드 연기 기대할게.”

    “하여간 나쁜 놈. 친구란 놈이. 가만 보면 네가 제일 나빠!”

    김강철과는 그렇게 농담으로 끝을 냈지만 경우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어머니가 어떤 이유로 구연하를 불렀을지 짐작이 된 탓이었다. 다만 무슨 일을 어떻게 꾸밀지 알 수 없었던 그는 구연하가 어떻게 나오는지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 * *

    분위기 있는 조용한 레스토랑, 통째로 빌렸는지 홀엔 민 회장과 윤정숙 둘만이 있었다.

    조명이며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이며 음식 맛에 선곡까지. 모든 게 자신의 취향이라 윤정숙은 흡족했다. 생각해 보면 남편과 결혼한 이후 이런 시간이 처음이었다.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요?”

    “요즘도 가끔 손 실장 불러서 저녁 먹는다며? 질투라도 났나 보지. 손 실장하고만 저녁을 먹을 게 아니라 나랑도 종종 이런 시간을 갖자고.”

    윤정숙은 훗날을 위해 민 회장의 오른팔, 새명의 핵심 인물인 손석중 실장과 종종 식사를 하곤 했다.

    “당신이요? 당신이 그럴 사람이에요?”

    “나도 늙었나 보지. 젊어선 일만 하느라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어. 그래서 당신 마음 많이 상하게 했다는 것도 알고. 이제야 철이 드는 모양이야. 자식들은 다 컸고 이제 자기 가정 꾸리고 살 텐데 그러고 보면 우리 곁엔 누가 남겠어. 결국 당신이나 나뿐이잖아.”

    “…….”

    “그동안 내가 당신한테 못해 줬던 거 미안하게 생각해. 이제부터라도 당신한테 잘할 생각이야. 듣자 하니 은퇴하면 일만 하느라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이 부족해서 서로 불편해한다는 모양이야. 그래서 당신이랑 이런 시간을 늘려 적응 좀 하려고.”

    민 회장이 하던 이야기를 듣던 윤정숙이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이제 와서?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예요? 내가 당신 속 모를 줄 알아요?”

    “여보!”

    “당신은 그냥 내가 다른 짓 하고 있을까 봐 그게 신경 쓰였던 거잖아요. 혹시나 내가 정현이 걸림돌이 될까 봐. 정현이가 새명 후계자가 되는 거 방해할까 봐.”

    “그런 거 아냐.”

    “30년을 나하고 살 부비고 살았으면서도 마음 한쪽 내주지 않은 사람이 당신이예요. 그거 알아요? 당신 아직도 술 취해서 들어오면 정현이 생모 이름 부르는 거?”

    “…….”

    “영애야, 영애야. 어찌나 애절하게 부르는지……. 죽은 지 30년도 넘었는데 당신 마음속엔 아직도 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아요?”

    “…….”

    “정현이 생모가 당신 첫 여자였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이해해 보려고 했어. 그치만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당신도, 당신 아버지도!”

    아내 윤정숙의 말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아버지 민판섭이 죽기 며칠 전 기력이 다한 그가 다른 사람을 다 물리고 오직 아들에게만 은밀히 말한 유언이었다.

    ‘아범아. 내가 그동안 미안했다. 미안했어.’

    ‘아버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죽을 때가 되니 내가 왜 그 애를 그렇게 미워했나 후회돼. 사랑하는 여자 땅에 묻고 애달파 하는 너를 보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아범아. 그땐 정말 어쩔 수 없었어. 네 처갓집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리 새명은 오늘날까지 이렇게 버티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이 애비를 이해해 다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내가 죽거들랑 박경덕이 찾아가. 내가 그놈한테 차명으로 물산 주식을 맡겨 놨다. 그거면 정현이가 네 다음을 잇는 데 문제없을 거다. 그게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인 것 같구나…….’

    기억이 흩어지자 화가 난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나 당신 아버지한테 나는 새명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봐요.”

    하지만 민 회장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박경덕 그 사람, 아직 못 찾았죠? 근데 왜 못 찾았을까?”

    아내가 아버지와 둘이 나눈 대화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특히 박경덕은 더더욱.

    “이제 와서 미안해하지 말아요. 나도 정현이가 새명을 차지하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 그게 내가 당신과 아버님께 줄 마지막 선물이 될 거예요.”

    윤정숙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민 회장은 아내의 마음 속 응어리가 얼마나 깊은지 그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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