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06화 (106/250)
  • #106. 피에타 (2)

    ‘스튜디오 글로리’의 회의실엔 윤기동을 시작으로 경우는 물론 신인 작가 구연하와 정상혁도 의견을 보태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자들의 열기로 회의실은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솔직히 욕심이 나는 건 의학물이지. 자고로 사람 생명이 오고 가는 것만큼 급박한 전개가 어딨습니까? 문제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죠. 안 그래요?”

    “아, 저 예전에 의학물 쓰신 권 작가님 인터뷰 본 적 있어요. 아예 병원에 무작정 찾아가 의사들이랑 몇 달간 같이 먹고 자고 생활하셨다고 하던데요?”

    “그래. 그 형님 고생 정말 많았지. 나는 그 형님한테 직접 들었잖아. 병원에 의사들이 좀 바빠? 분위기 삭막하고 얼마나 조심스러워. 그런데 연고 하나 없이 드라마 쓰겠다고 무작정 들이밀고 들어간 거 아니야. 어떻게 보면 무식한 거지.”

    윤기동의 이야기에 신인 작가가 눈을 빛내며 집중하고 있었다.

    “인터뷰 때도 느꼈지만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취재가 중요하긴 하지만 전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아요.”

    “당연하지. 괜히 눈 빤짝거리지 마. 그런 건 배우는 거 아니야. 옛날이니까 그 의사들도 고생한다면서 챙겨 주고 그러지. 솔직히 따지고 보면 민폐야, 안 그래? 요즘 같은 때 그런 짓 하면 큰일 나. 알겠어?”

    “네.”

    “근데 민 작가님, 의학물 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나요? 내후년이라면 모를까 올 하반기에 하기엔 무리죠.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달려든다고 해도 촉박해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전 의학물보다 수사물이 좋아요. 이미 벌어진 사건 속에서 범인을 잡으면 되는 간단한 플롯이잖아요. 예전에 ‘그 이유가 알고 싶다’에 그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범인은 어떻게든 현장에 증거를 남긴다. 저는 그런 거 볼 때요, 제가 수사관이 된 것처럼 범인이 누군지 증거를 찾거든요. 그 과정이 재밌어요.”

    “구 작가는 명확한 걸 좋아하는 모양이야.”

    “네. 제가 예상한 답이 딱 떨어지면 그렇게 좋을 수 없더라고요. 범인이 현장에 흘린 증거물, 피해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전하려 했던 혼신의 다잉 메시지를 분석해서 진짜 범인을 찾아내는 짜릿함! 멋지잖아요.”

    아무래도 이들 중 가장 어린 막내였던 탓에 조금 주눅이 들어 있던 구연하도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에 의견을 보태는 그녀의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이 미소 지었다.

    “그거 좋네요. 다잉 메시지, 피해자가 마지막 순간 남기려 했던 혼신의 메시지!”

    “그럼 우리 수사물로 가는 겁니까?”

    “전 찬성이요!”

    “저도 괜찮습니다.”

    “윤 작가님은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럴리가요. 내가 지금까지 봤던 드라마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가 뭔 줄 압니까? 수사반장이에요.”

    “수사반장? 그게 뭐예요? 경찰청 사람들 같은 건가?”

    “수사반장을 몰라? 박 반장을 모른단 말이야? 정 작가는?”

    “듣기는 했는데 본 적은 없어요.”

    “스튜디오 글로리 작가들이 비교적 젊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데서 세대 차이를 느낄 줄은 몰랐네.”

    허탈해하는 윤기동의 시선이 경우에게로 향했다.

    “설마, 민 작가도 모른다고 하진 않겠죠?”

    “저는 봤죠. 국민학교 다닐 때였으니까 학교에서 애들이랑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뭐 지금은 최불암 아저씨가 입었던 코트가 멋있었지 하는 생각밖엔 안 나지만요.”

    “허, 허허, 허허허.”

    “수사반장 했을 때면 구 작가가 유치원생 정도밖에 안 됐을 텐데 당연히 모르죠. 아마 머털도사도 모를 거예요.”

    “머털도사는 알아요. 명절 아침이면 하는 만화잖아요!”

    70년대 생인 윤기동을 제외하곤 모두 80년 이후 생들이었으니 세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이나 경력에 상관 않고 오직 드라마를 위해 격의 없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럼 이제 스토리 방향부터 잡아 보죠. 수사물이라고 해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강력 범죄도 있고 미제 사건도 있고.”

    “저는요 예전부터 음모론을 좋아했거든요. 그 핵무기 개발 중이었다는 이휘소 박사님이요. 박사님이 돌아가시게 된 교통사고가 의문점이 많다면서요? 정말 살해당한 게 아닐까요?”

    “아, 그 영화로도 만들어진 유명한 소설책 실존 인물이신 분? 근데 그거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 아니에요?”

    “뭔가 그럴듯해 보이잖아요. 진짜 같기도 하고. 비밀을 알고 있는 이들이 거대 권력에 쫓기다 목숨을 잃고 약자들이 그런 사람들의 진실을 파헤치는 거죠.”

    “저는요…….”

    그렇게 오랫동안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네 사람은 마라톤 회의를 이어 갔다.

    * * *

    회의가 끝나니 온몸에 진이 다 빠진 구연하는 따뜻한 이불 속이 간절해졌다. 더 남아서 자료 조사도 하고 싶었지만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빨리 쉬고 나아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나 왔어.”

    집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누구 하나 구연하의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런 대접은 익숙했으니 그러려니 하고 거실로 들어서는데 거실 한가득 쇼핑백이며 옷들이 널려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네 언니, 선 들어왔잖니. 내일 맞선에 뭘 입을까 싶어 쇼핑 좀 했지.”

    “선 보러 갈 거면 하나만 사면 되지. 뭘 이렇게 많이 사?”

    “선 한 번 보고 결혼하니? 우리 변호사님 앞으로도 이런 자리 계속 들어올 텐데 그때마다 같은 옷 입고 나갈 수 없잖아. 이왕이면 사는 거 미리 준비해 뒀다가 출근할 때도 입고 재판할 때도 입고 얼마나 좋아.”

    “아, 예.”

    “엄마, 지금 보니까 이 옷 입으면 얼굴이 너무 어둡지 않아?”

    “어둡기는. 우리 딸은 얼굴이 하얘서 뭘 입어도 다 잘 어울려.”

    “그래?”

    구연하의 언니 구은희는 태어났을 때부터 공주처럼 자랐다. 얼굴도 예뻤고 공부도 잘했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반장은 물론 전교 회장도 놓친 적이 없었기에 구은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구연하는 늘 구은희의 동생으로 통했고 끊임없이 언니와 비교되는 처지였다.

    거기다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통과한 후부턴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돌아서자 엄마가 구연하를 붙잡더니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네 거. 가방이야. 끈이 좀 닳았더라.”

    “내 것도 샀어? 어쩐 일이래?”

    설레는 마음으로 열어 본 그녀의 얼굴이 이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딱 봐도 사은품으로 주는 거구만.”

    “얘는, 이벤트 한다고 해서 일부러 네 언니 지갑 하나 더 사고 받아 온 거야. 넌 늘 이런 가방 메고 다니니까 일부러 생각해서 가져왔더니.”

    “그럴 거면 차라리 언니 지갑을 사지 말고 나도 뭐 사 주지 그랬어? 됐어, 내가 말을 말어야지.”

    피곤한 마음에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대학을 다니고 있는 동생 구인호가 들어왔다.

    “엄마, 배고파. 나 밥 줘.”

    “연하야. 인호 밥 좀 차려 줘.”

    “지 손으로 차려 먹으라 그래.”

    “그러지 말고 밥 좀 차려 줘. 아직 애잖아.”

    “얘가 뭐가 애야? 덩치는 나보다 더 커. 엄마는 왜 똑 같은 자식인데 왜 나만 차별해? 나 주워 왔어?”

    “너 또 그 소리야? 넌 툭하면 그러더라. 안 주워 왔으니까 걱정 마.”

    “내가 괜히 그래. 집에서 항상 나만 찬밥이잖아. 언니는 첫째라고 공부도 잘한다고 항상 예뻐하고 인호는 막내라고 아들이라고 감싸고 돌았어. 나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차별받는 심정을 알아?”

    “우리가 널 언제 차별했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금이야 옥이야 키웠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른 얼른 동생 밥 좀 차려 줘. 엄마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다리 아파서 그래. 응?”

    “야, 구인호! 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네가 차려 먹어!”

    “왜 또 나한테 난리야?”

    “아우, 시끄러워. 왜 너만 오면 집이 소란스러워지니?”

    “그래, 나만 없으면 되겠네. 나만.”

    화가 난 구연하는 그대로 집을 나가 버렸다.

    “쟤가 오늘따라 왜 저래?”

    * * *

    시간이 늦었는데도 많은 작가들이 작가실에 앉아 열심히 타자를 치고 있었다. 다다다다 타자 치는 소리만 울리는 가운데 경우가 작가실로 들어섰다. 집중하고 있는 여러 작가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쓱 살펴보는데 기지개를 켜고 있는 정상혁과 눈이 마주쳤다.

    “어? 작가님 어긴 어쩐 일이세요?”

    정상혁의 말에 작업하던 작가들의 눈이 일제히 경우에게 향했다. 경우는 자신 탓에 작가들을 방해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들어와서.”

    “아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작가님은 당연히 환영이죠.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 아이돌이잖아요.”

    “제가요?”

    “모르셨어요? 잘생겼지, 돈 많지, 매너 좋지, 거기다 제일 중요한 글 잘 쓰지. 그만하면 아이돌이죠.”

    “평소엔 저희들 방해된다고 작가실엔 잘 오지도 않으시더니 무슨 일 있으세요?”

    “그건 아니고…….”

    경우는 비어 있는 구연하의 책상을 보며 물었다.

    “구 작가는 어디 갔습니까?”

    “아, 조금 전에 집에 갔어요.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쫓아냈어요.”

    “회의 할 땐 괜찮은 거 같더니…… 많이 안 좋아요?”

    “아니요. 원래 감기는 초장에 잡아야 하잖아요. 왜요? 구 작가한테 무슨 볼일 있으세요?”

    “구 작가한테 직접 볼일은 아니니까 잘됐네요. 안 그래도 구 작가 있으면 말하기 어려웠을 텐데. 구 작가가 필요한 게 뭐 있나 싶어서요.”

    “아하, 그것 때문에 오셨구나.”

    스튜디오 글로리의 작가들 사이에서 일명 ‘작가 키트’라 불리는 이것은 경우가 회사에 들어온 작가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이왕이면 필요한 것을 선물하자는 경우의 주의가 반영된 것이었는데 그 탓이었는지 작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구연하가 스튜디오 글로리에 들어온 지 좀 지났지만 그동안 이일 저일 바쁜 탓에 챙기지 못해 뒤늦은 선물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예전엔 작가들이 몇 되지 않았으니 그냥 한눈에 봐도 뭐가 필요한지 알았지만 아무래도 작가들 수가 많아지다 보니 그들 모두를 꼼꼼히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구 작가한테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요?”

    그동안 작가실에서 함께 생활하던 작가들이 하나둘 입을 열자 경우가 열심히 받아 적었다. 그렇게 작가실을 나오자 마자 바로 앞에 있는 백화점을 다녀온 그가 김강철을 불렀다.

    “왜 또?”

    “여기 이거랑 요것들 좀 구 작가한테 배달, 부탁한다. 구 작가 주소도 거기 있을 거야.”

    “이걸 꼭 다 저녁에 가져다 줘야 해?”

    “구 작가 차도 없는데 직접 들고 가기 힘들잖아. 그리고 내가 바빠서 선물이 늦었어. 하루라도 빨리 전해 주면 좋잖아. 거기다 곧 드라마 시작하려면 지금부터 체력 보강이 필수야. 영양제도 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먹여야지.”

    “하여간 악덕 사장이구만. 한마디로 아프지 말고 일해라, 이거지?”

    “꼭 그렇다기보다는 이왕이면 안 아프고 일하면 좋잖아.”

    “그게 그거지. 알았다. 도련님이 시키는데 시키는 대로 합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김강철 역시 익숙하다는 듯 물건을 챙겨 사무실을 나갔다.

    * * *

    구연하는 캔을 따자마자 꿀꺽꿀꺽 들이켰다.

    퇴근하면 따뜻한 이불 속에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찬바람 쌩쌩 부는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 차라리 사무실에 있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 거기다 평소라면 시원하게 느꼈을 맥주도 오늘따라 춥게만 느껴졌다.

    “아, 소주를 마실 걸 그랬나?”

    이게 다 혼자만의 공간이 없어서 그런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놈의 집구석을 나가든지 해야지.”

    그래도 편성을 받았으니 원고료를 받으면 이참에 독립을 해야겠다 다짐을 하며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으스스 떨리는 몸에 얼마 있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터덜터덜 걸어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이런 서민들이 사는 주택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번쩍이는 외제차가 서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이런 차는 없었는데 어쨌든 보기 드문 광경에 구연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갔다.

    잠시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딸깍 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가 내렸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는 브랜드 같은 거 하나 모르는 구연하가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옷을 휘감고 있었다. 딱 전문 직장인 여성 같은 포스에 나름 잘나간다는 구은희도 비교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아. 이 모습을 구은희가 목격했어야 하는데……. 그랬으면 코가 납작해졌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삼키고 들어가려는데 여자가 입을 열었다.

    “혹시 구연하 작가님 되십니까?”

    낯선 목소리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리자 구연하는 당황했다.

    바로 그 순간 머지않은 곳에서 차를 세워 두고 구연하에게 배달할 물건들을 확인하던 김강철은 구연하 앞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예신이 누난데? 예신이 누나가…… 구 작가를 왜 만나?”

    이상한 예감이 든 김강철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최대한 잘 보이도록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곧바로 경우에게 사진을 전송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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